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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의 비전을 쫓는 삶 3
      ▲여주봉 목사 나는 지난번에 비전과 관련하여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비전과 관련한 네 종류의 사람을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전은 그 단어(vision)가 의미하는 바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보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 또한 그 핵심은 결국 ‘보는 것’이다(마 13:10-17).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에서 씨앗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가리킨다(19절).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선포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고 계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그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고 강력하게 촉구하셨다. 따라서 여기의 씨앗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예수님을 통해 행하고 계셨던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모든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씨앗’이 예수님을 통해서 사방으로 뿌려지고 있었다.이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본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예수님을 통해 행하고 계셨던 그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을 듣고 본 네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 당시 그 ‘씨앗’이 사방으로 뿌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고, 그 결과 또한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비전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비유에서 길 가에 해당하는 자들이 바로 방랑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전혀 보지 못했다. 당연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통한 그 놀라운 기적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과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했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전혀 보지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비전을 전혀 보지 못했다.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길 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13-15절 참조). 길 가는 굳은 마음을 상징한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과 지혜와 경험과 전통을 고집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이리저리 판단하는,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전혀 없는 교만한 마음, 강퍅한 마음을 상징한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정확하게 그런 사람들이었고, 그 결과 그들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 놀라운 역사들을 행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그들을 소경이라고 부르셨다.그 많은 성경적인 지식과 그 뛰어난 종교적인 헌신과 의식(儀式)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랑자였다는 사실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이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에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들의 성경적인 지식이 정통적이었을지 모르지만(마 23:1-3 참조), 그들은 하나님과의 어떠한 인격적인 교제나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요 5:37), 당연히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전혀 알지 못했다(마 16:3). 그 결과 그들은 나름대로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고, 소위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심지어 그들은 앞장서서 하나님을 대적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대적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개인 뿐 아니라, 교회도 방랑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는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소명을 받았지만, 각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마치 큰 그림의 각 퍼즐 조각처럼 그리고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각기 달랐듯이, 다를 수 있다. 조지 바나는 같은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할지라도 각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각기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만약 같은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서로 경쟁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교회가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세워질 수 없다. 그저 벽돌만 많이 쌓아 놓는다고 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벽돌들이 설계도를 따라 각기 제자리에 놓여야 방과 부엌과 거실이 되고, 더 나아가 집이 된다. 그리고 건물이 그렇게 세워질 때, 어떤 건물은 가정집이 되고, 어떤 건물은 상가가 되고, 어떤 건물은 학교가 될 것이다.마찬가지로 사람만 많이 모인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그 일에 성도들과 교회의 사역이 맞추어질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될 것이다. 또한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뒷받침이 있을 것이다.어떤 사람이 태평양에서 부지런히 그리고 사력을 다해 노를 저어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그런 사람이 바로 방랑자다. 그런데 조지 바나의 인터뷰 결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개인이건 교회건 혹은 기독교 단체건, 방랑자가 매우 많다.                
    • 오피니언
    • 기고.연재
    2020-01-10
  • 사람들이 기독교를 거부하는 세 가지 이유
        기독교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복음주의 기독교 변증가인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는 이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1. 응답받지 않는 기도 "신은 죽지 않았다(God's Not Dead)"는 영화의 끝 부분에 영화 내내 학생의 기독교 신앙을 공격하고 비꼬고 조롱하던 무신론자 대학 교수는 어린 시절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과 그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던 자신의 응답받지 않은 기도가 자신을 결국 무신론자로 만들었다고 인정한다. 자신을 위로해주려고 애쓰던 목사님을 찾아가 나눈 대화에서, 그 목사님은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노(No)"라고 말씀하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교수는 고뇌하면서 이 영화에서 가장 신랄한 말 중 하나를 말한다. "하나님은 노(No)라고 하실 때가 너무 많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실 때가 너무 많아.) 그 기도가 그저 차를 갖게 해달라는 것이나, 시험에서 A학점을 맞는 것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하게 해달라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도가 당신의 친구나 당신의 자녀가 암으로 투병하거나, 오랜 실직으로 고통당하는 가정이거나, 약물 남용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한 사람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반복적으로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그 터널의 끝에서 빛은 나타나지 않았다. 성경의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사랑의 아버지라고 성경이 약속하지만 않았다면, 자녀들의 요청에 속히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약속하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약속하지만 않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성경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6-8)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 비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기독교인들조차도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과 다른 듯한 현실을 놓고 하나님의 약속과 퍼즐을 맞추기 위해 사투한다. 2. 악은 왜 존재하는가? 찰스 다윈, 테드 터너(CNN 설립자), 바트 어만(자유주의 신학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들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이지만, 모두 매우 강한 지성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하게 되거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불가지론자가 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그리고 이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악을 보면서 절대자 신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터너는 자신의 어린 여동생이 죽는 걸 봐야 했고, 다윈은 자신의 어린 딸 애니의 죽음을 겪었다. 어만은 신정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인생에서 발생하는 악과 비극과 전능하고 선한 신을 화해시키는 문제는 불신자들과 신자들 사이에 끝없는 토론을 일으킨다. 자신의 자녀가 갑작스럽게 죽거나 퇴행성 질환으로 고통 당하다 천천히 죽어갈 때, 정치적 폭군에 의해 살해되거나 대학살을 당할 때, 전능하고 선한 신에 대해 혼란을 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악이 그들을 찾아올 때,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고, 리차드 도킨스가 말하는 악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믿기 시작한다. 그는 말한다. "전자와 이기적 유전자, 통제 불능의 물리적 힘, 유전자 복제의 우주에서, 어떤 사람들은 상처 받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행운이 찾아온다. 거기에서 당신은 어떤 라임이나 이유도, 정의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관찰하는 우주에는 아무런 설계도, 목적도, 악도,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통제 불능의 무자비한 무관심만 있을 뿐이며 그것만을 기대할 수 있다." 3. 말과 삶이 다른 그리스도인 바나 그룹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30%만이 복음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간디의 유명한 말과 일치하는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예수님의 행동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인 래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는 자신에게 수 천 개의 기독교에 대해 도전하는 질문들이 쏟아지는데, 자신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한 힌두교 친구가 물은 질문이라고 했다. "너는 회심이 초자연적이지만 정말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아는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의 삶에서는 왜 그것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이 정말 삶에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가?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교회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선행의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병원, 고아원, 학교, 재난 및 구호 단체, 노숙자 보호소, 의복 및 생필품 제공 등에 이르기까지. 이런 곳들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사랑의 증인이 되기 위해,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에 의해 설립되거나 운영되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말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 2:15) 여전히 잘못된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그것은 일탈한 기독교인들의 개인적인 행동일 뿐이다. 4.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슈마허는 "기독교에 대한 이 세 가지 장애물에 대해, 나는 이 문제들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제기하지 않는 것들을 좀 생각해보라고 제안하고 싶다"면서 "이러한 장애물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삶과 성경이 본질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선인이 악인에 의해 살해 당하고(가인의 아벨 살해, 창 4:8), 기근이 일어나고(창 41:27), 라헬처럼 사랑하는 아내가 출산 중 죽고(창 35:19), 훨씬 더 악한 나라에 의해 나라들이 정복 당하고(단 1:1-2), 원수에 의해 생계와 가족, 건강이 파괴되었고(욥 1-2장),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태어난 자 중에서 이 사람보다 더 큰 자가 없다 했던 사람이 악한 여인에 의해 감옥에서 부당하게 살해당했고(마 11:11, 14:1-12, 세례 요한의 죽음), 의로운 사람의 진실한 설교가 거부 당하고 심지해 살해까지 당했으며(행 7장, 스데반의 순교), 생명의 구원을 놓고 기도한 위대한 기독교인들의 기도가 응답되기도 했지만 응답되지 않기도 했다(행 12:2,5,12, 기도로 감옥에서 풀려난 사도 베드로와 감옥에서 순교한 사도 야고보)고 지적했다. 그는 무고하고 죄 없은 한 사람의 기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죽음을 피해가게 해달라고 했던 기도는 거부되고(마 26:42), 원래 사형이 선고된 사람과 운명이 뒤바뀌어 십자가에서 처형 당했다(마 27:21)는 것. 하나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도, 성경에서는 이들의 영웅적인 면모와 함께 죄의 모습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에 대해 두 번이나 아내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고(창 12:13, 20:2), 야곱은 에서에게 임할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를 속였으며(창 27장), 다윗은 간음을 저지르고 그 여인의 남편을 죽였고(삼하 11장), 예수님의 제자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으며(26:47-50),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마 26:56, 마 26:69-75), 요한 마가는 바울의 선교 여행 도중 이탈했으며(행 13:13), 더마는 사도 바울을 떠났다(딤후 4:10)는 것. 슈마허는 "요즘은 악은 존재하고 기도는 응답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고, 믿는 자들의 성품의 결함은 성경 어디에서나 발견된다"며 "성경은 우리가 매일 매일 걸어나디는 불공정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것과 인생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나의 대답은 성경과 우리의 현실은 조화를 이루어 희망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성경에서 우리는 무고하고 죄없는 사람의 구원을 위한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친한 친구에 의해 배반까지 당하고, 악의 비극적 희생자가 본 것처럼 된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악으로부터 위대한 선을 보시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은 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사흘 후에 보여준다"고 말했다. 성경에서 우리는 왜 악이 존재하는지(사단에 의해 악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 언젠가 어떻게 하실 것인지, 왜 기도가 자판기처럼 응답되지 않는지, 왜 신실한 신앙인들이 그것이 가짜인 것처럼 행동하는지에 대해 발견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이러한 대답을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이 길의 끝이 무엇인지 하나님처럼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음으로 걸어갈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때로는 이것이 어렵다"면서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키는 이 세 가지 중요한 이슈를 자신의 삶에서 직접 당하시고 견뎌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시선을 고정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신뢰함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그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글을 마쳤다.              
    • 교계뉴스
    • 문화
    2020-01-09
  • 2020년, 교회는 세상에 무엇을 줄 것인가?
      ▲이효상 목사ㅣ교회건강연구원장   2020년 새해, 새날이 밝았다. 섬기는 교회와 가정, 그리고 이 민족과 겨레의 가슴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하며, 이 땅에 평화가 가득한 한해가 되기를 기도한다. 2020년, 새로운 10년을 준비해야 할 대전환의 때이다. 금년은 역사적으로 유관순열사 순국100주년이자,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는 동시에 4.19혁명 60주년이다. 근대사의 굴곡진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4월에는 총선이 있다. 국내정치는 포플리즘의 극치를 넘어 날마다 발표되는 선심정책으로 경제는 기력을 잃어가고 있다. 나라 경제가 거덜나며 빚은 쌓여만 간다. 우리 외교는 고립되고 안보는 불안하다. 자유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 과거에 매몰된 무능한 운동권에 의한 탈이념화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 이를 둘러싼 국론분열은 이미 위험 수위에 달했고 심화된 사회갈등은 적대적 진영간 갈등과 대립으로 고착화되어가고 있다.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론 안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어 어떤 식으로든 선거에서 민심에 표출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련의 정치적 갈등을 미래의 희망으로 치환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차분함과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진중함이 요청되어 진다. 2020년 분열된 지금의 초갈등사회에 교회는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교회와 크리스천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 선명한 복음의 본질과 십자가의 영성 회복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2020년, 한국교회는 십자가 정신과 그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크리스천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삶을 보여야 한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돌려대는 삶’ ‘고발하여 속옷을 빼앗으려고 하면 겉옷까지도 내어주는 삶’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까지 라도 동행해 주는 삶’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삶’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삶’이 그것이다.   지금 교회가 할 일이 많다. 교회는 아무리 힘들고 바뻐도 10년후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3.1운동의 일으킨 주류종교로서 민족이 사는 길,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의 자립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모습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것인가. 다음세대에게 어떤 모습을 남겨주고 싶은가. 그래서 과거의 민족주의 대신 미래와 글로벌 시민으로 시선을 돌려 국제적으로 당당하고 자부심 넘치는 나라가 되도록 하는 캠페인을 교회가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는 한강의 기적을 만든 국민적 역량을 다음세대와 함께 미래세대가 희망을 갖는 나라를 만들어 가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관심과 역량을 쏟아야 한다. 다음세대가 우리와는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믿음을 전승하고 역사를 전승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음세대를 생각하고 더 많은 고민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상처받고 병든 심령, 초갈등의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 회복케 하는 유일한 길은 '건강한 교회운동'이 대안이자 해답이다. 교회는 ‘건강한 교회’ 운동을 통해 세상 속에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며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건강한 교회운동‘은 막힌 시대의 물꼬를 터주고 대안을 만들며 사회와 소통하고 역사를 품는 공교회 운동이다. 새해에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가 연합하고 협력하여 ‘건강한 한국교회’를 세우겠다는 결심과 함께 3.1운동하는 심정으로 우리 사회의 품격을 한 단계 더 올려놓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새해에는 점점 더 커지는 양극화로 내몰리는 서민들의 삶에 관심과 손길을 펴야 한다. 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가슴을 넓혀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보수든 진보든 함께 품어야 한다. 집안에는 여러 자녀가 있는 것처럼 교회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물며 나라에도 다양한 세력이 존재한다. 궁극적 목표는 그것을 넘어 십자가의 길을 가야 살 수 있다. 그 길이 민족이 사는 길이자 제2의 안창호, 유관순의 길이고. 자주 독립국가의 길이다.   2020년, 새로운 꿈과 도전, 변화를 위한 열정으로 새 출발하자.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나침반이다.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어디서 멈춰야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스펙트럼의 빛이다. 그래서 늘 눈부시다. 교회는 이 사회의 파숫군이다. 어디쯤 새아침이 밝아오는지, 어떻게 어둠을 떨치고 일어서야 하는지를 알리는 나팔 소리이다. 그래서 늘 깨어있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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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8
  • “생물은 결코 우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에도 보이지 않는 이 작은 미생물은 어떻게 그렇게 정교한 단백질을 만들 수 있을까? 정말로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연히 진화하여 그렇게 된 것일까?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였다고 하나, 이 작은 미생물이 만드는 단백질 하나도 생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하찮은 대장균이 만들어내는 단백질 한 개쯤은 가장 진화된 생명체라는 인간이 쉽게 만들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대장균이 만드는 단백질 하나도 만들 수 없는 것일까? 우리 사람의 몸 안에는 자그마치 5만 종류가 넘는 다양한 단백질들이 있는데 이것은 또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100조 개에 달하는 인간의 각 세포는 매초마다 2천 개의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모든 세포는 잠시도 졸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며 어떤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일하고 있음에도 너무도 조용히 일하고 있기에 우리 사람들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이 모든 생체 컴퓨터를 설계하고 가능하게 하신 분은 누구일까?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136편 5절). 파스퇴르는 이 말씀과 그 사실을 잘 아는 과학자였다. 다만 부정되는듯하던 생명의 자연 발생설이 20세기에 들어와서, 그래도 생물은 우연히 자연 발생되었다고 생각한 소련의 유물론 생화학자 오파린의 화학 진화설에 의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생명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생각해낼 수 있는 이론이 우연주의 진화론뿐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 유명한 생물 속생설을 증명한 파스퇴르이지만, 그의 업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마 또는 두창이라고도 부르는 천연두는 천연두바이러스에 의해 일어나는 무서운 전염병이다. 수년전 세계의 의학자들은 이 병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질병이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에드워드 제너(1749-1823,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다)라는 영국의 한 크리스천 의사가 발견한 예방접종에 의해 우리 몸에 이 질병을 이길 수 있는 면역이라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예방주사를 맞으면 가벼운 병에 먼저 걸리게 되어 우리 몸에 그 병에 대한 저항력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천연두뿐 아니라 다른 전염병에도 이와 같은 예방접종을 하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이 바로 파스퇴르다. 먼저 가벼운 병을 일으켜 면역을 얻게 하려면 특별한 배양균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을 백신이라고 부른다. 백신이나 예방접종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파스퇴르였다. 예방주사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우리 인류는 여러 가지 전염병으로 커다란 고통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파스퇴르의 이와 같은 명성은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가축들 사이에 유행하던 무서운 탄저병에 대한 백신을 개발하였을 때 그 당시 많은 의사들과 수의사들은 그가 만든 백신을 믿지 않았다. "의사도 아닌 파스퇴르가 조금 유명해졌다고 마치 예방주사로 모든 전염병을 물리칠 수 있는 것처럼 고집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주로 면양과 소 말 등의 초식 동물들에게 많이 발생한 탄저병은 다리가 몹시 약해져서 무리를 따라다니지 못하게 되고 비틀거리다가 갑자기 죽어버리는 병이었다. "탄저병은 이 병에 걸려 죽은 동물에게서 살던 세균이, 벌레 등을 통하여 주위의 풀들을 오염시켜서 이 풀을 먹은 다른 동물들이 전염되는 것입니다. 내가 개발한 백신을 맞으면 탄저병을 막을 수 있습니다." "파스퇴르의 주장은 엉터리야. 이번에야말로 우리들이 파스퇴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듭시다." 파스퇴르의 업적을 시기하던 많은 과학자들은 그가 개발했다는 백신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기회야말로 파스퇴르의 명성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당시 의학 협회에서는 그가 무엇을 발표하면 의사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줄 개랭이라는 의사는 그와 주먹다툼 일보직전까지 가고 결투를 신청할 정도로 의사들은 그의 연구 성과들을 불신하였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업적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그런 오해를 품은 사람들 대부분은 그의 성격과 인격을 들먹거리곤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는 그가 한 분야의 개척자로서 얼마나 많은 오해와 불신을 이겨내고 위대한 과학적 성취를 했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공개적인 예방접종 실험의 성공 1881년 5월 5일, 파스퇴르는 연구와 실험뿐 아니라 오해와 시기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삼중고의 상황 하에서 마침내 과학사에 있어 유명한 공개실험을 시작하였다. 실험 장소는 프랑스 물랑의 근처 마을인 푸이르포르란 곳의 어느 수의사 목장이었는데, 그도 파스퇴르의 입장에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프랑스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영국 런던에 있는 《더 타임스》지에서는 특파원을 보낼 정도였다. 의사와 수의사 그리고 농학자들과 여러 과학자들이 이 흥미 있는 실험을 보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그들은 파스퇴르의 실험이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공공연히 떠들어댔다. 참으로 이 실험은 파스퇴르 개인의 자존심과 명예가 걸린 실험이었다. "하나님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도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건강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예방접종이야말로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 25:40). 그는 이미 실험실에서 확인하였던 이 실험이 반드시 성공해서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 큰 경제적 부담이 없이 사람과 동물들에게 이 방법이 널리 보급되기를 기대하였다. 실험에 사용된 면양은 모두 60마리였다. 이중에서 10마리는 그대로 두고, 나머지 50마리의 면양을 각각 25마리씩 나누어 두 무리로 분류하였다. 파스퇴르와 그의 조수들은 25마리를 다른 무리와 구별하기 위해 한쪽 귀에 구멍을 뚫고 이들 면양에게만 탄저병 백신을 주사하였다. 그런 다음 50마리의 면양을 함께 목장에 풀어주었다. 2주일 후에 보니 접종을 받은 면양들은 가벼운 병을 앓았지만 모두 회복되어 있었다. 5월 17일, 파스퇴르와 조수들은 백신을 한 번 더 접종하였다. 그리고는 면양들이 또 한 번 가벼운 병에 걸린 다음 회복되는 그달 말까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2주일 후인 5월 31일, 파스퇴르 일행은 다시 목장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50마리의 면양들 모두에게 탄저병을 일으키는 맹독의 배양균을 오른쪽 넓적다리에 주사하였다. "이제 6월 2일이 되면 아무런 접종을 받지 않았던 면양들은 모두 죽을 것이지만, 먼저 예방접종을 받았던 면양들은 한 마리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파스퇴르는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장담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명예를 건 엄청난 도박이었을까? 아니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그의 확신이었을까? 드디어 역사적인 6월 2일이 되어 많은 구경꾼들이 목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물랑 농업회의 회장인 프랑스 농림성의 고관도 있었다. 그밖에도 의사와 수의사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의 신문사 기자들이 지켜보았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그날의 결과는 파스퇴르가 예언한 바로 그대로였다. 목장에는 22마리의 면양들이 나란히 죽어 있었으며, 그 옆에는 2마리의 면양들이 괴로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도 한 시간이 채 가기 전에 숨을 거두었고, 나머지 한 마리도 결국 그날을 못 넘기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접종을 받은 면양들은 모두 살아서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실험은 이렇게 끝났다. 이 실험의 결과에 대해 당시 영국 《더 타임스》지의 특파원은 이렇게 기사를 썼다. "이제 농업계는 전염병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없이 예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예방법은 비싸지도 않으며 어렵지도 않다. 단 한사람이 하루 1000마리의 면양을 접종 시킬 수 있다." 그 후 2년 동안 약 10만 마리의 동물들이 접종을 받게 되었다. 이 중 탄저병으로 죽은 동물은 단지 650마리에 불과 하였는데, 이것은 접종이 있기 이전에 10만 마리당 약 9000마리가 이 병으로 죽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이 실험을 통하여 예방접종의 효험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과 동물을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백신의 개발이 점점 더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여러 업적은 차치하고, 오직 이 한 가지 사실 만으로도 파스퇴르는 분명 인류에게 크게 기여한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러나 파스퇴르에 대하여 우리들이 지나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사실이 또 한 가지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겸손한 믿음이다. 곤충학자 파브르와의 인연 파스퇴르는 한때 『곤충기』를 써서 유명한 파브르와 사귐을 가진 적이 있다. 당시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는 누에에서 실을 얻는 양잠업이 성행하였는데, 그 누에에 병이 크게 번져 양잠업자들이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누에의 몸에 반점이 생기는 이 병을 연구하던 파스퇴르가 당시 유명한 곤충학자였던 파브르를 찾아간 것이었다. 파스퇴르는 파브르보다 꼭 한살이 위였다. "파브르 선생, 누에에 생기는 이 반점은 원인이 무엇일까요? 곤충에 대해 누구보다 애정이 많으신 파브르 선생께 조언을 구합니다." "질병의 치료에 관해 파스퇴르 박사만큼 유명하신 분이 누가 또 있습니까? 큰 도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 두 사람이 작디작은 미생물과 곤충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랑하고 관심을 갖게 돠었다는 것이 참으로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즈음 교회에서 과학 강좌를 열고 있지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창조 세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듣고는 큰 은혜를 받곤 한답니다." 파스퇴르는 비록 파브르에게서 누에의 질병치료에 대한 큰 도움을 얻지는 못했지만, 같은 신앙인으로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프랑스가 낳은 두 유명한 생물학자가 동시대인으로서 모두 생명의 우연발생을 부정하고 진화론을 반대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흥미를 끈다. "자연 발생이 일어난다는 것은 생식 인자가 나온다는 것이요 생명이 우연히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부여자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물질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되며 하나님은 단지 우주 운동의 부여자로서만 가끔 기억될 것이다." 이렇게 파스퇴르는 우연주의 진화론을 부정하였다. 파스퇴르는 결국 6년 만에 혼자의 힘으로 누에의 질병을 일으키는 두 가지 형태의 박테리아를 찾아내고 치료하는 방법도 알아내어 프랑스의 양잠업을 되살렸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끈기를 이어받은 파스퇴르는 정말로 집념의 과학자였다. "의지, 일하는 것 그리고 기다림은 사전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이다. 이 세 단어야말로 내게 성공의 금자탑을 줄 세 개의 초석이다." 10대 초반 그가 썼다는 이 말은 그가 지닌 끈기가 어떠하였는가를 상징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1881년 탄저병 실험이 있은 후 어느 유명한 신문은 그를 가리켜 "프랑스 과학의 영광"이라고까지 칭송한 적이 있다. 이만큼 그의 업적은 프랑스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에게 커다란 은인이었다. 이런 그가 매우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를 더욱 감동시킨다. "나는 내가 무엇을 알면 알수록, 내 믿음이 겨우 시골 농부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고 느끼곤 합니다." 파스퇴르는 이렇게 나이가 들면서 믿음이 점점 깊어갔다고 알려지고 있다. "아마 황태자께서 도착하신 것 같군요. 제가 좀 더 일찍 입장했어야 했는데------ 참으로 죄송합니다." 런던서 개최된 국제 의학 회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가하여 회의장인 세인트 제임스 홀에 그가 들어섰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듣고 그가 멋쩍어하며 했다는 이 유명한 이야기도 그의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는 일화다. 파스퇴르의 노년 1888년 파스퇴르는 개의 질병인 광견병의 예방과 치료법을 개발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에서 마련해준 '파스퇴르 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되었다. 연구소 낙성식에서 파스퇴르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후 디프테리아의 연구에 마지막 온 힘을 쏟던 그는, 지병인 중풍(뇌출혈)이 악화 되어 1895년 9월 28일, 73세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갔다. 파스퇴르가 숨을 거둘 때 그는 한손으로는 아내의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십자가를 쥐고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건강과 병 없는 사회를 위하여, 집념과 끈기로 온몸을 바친 이 경건한 믿음의 과학자 파스퇴르를 사용하신 것이다. 파스퇴르가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이름으로 장례를 치러 국가와 인류에게 공헌한 그의 업적을 기렸다. 국민들 모두가 그를 칭송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이제 파스퇴르가 프랑스 최고의 위인들이 묻힌 파테온 묘지에 묻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그만 문제가 생겼다. 파스퇴르의 일평생 훌륭한 내조자였던 그의 부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묻힌 팡테온 묘지에는 남편 파스퇴르의 시신을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고집스럽게 버틴 것이다. 결국 그의 시신은 파스퇴르 연구소 지하에 묻히게 되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그의 묘지 천장에는 4명의 천사가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과학이라고 새겨진 명패를 각각 하나씩 들고 오늘날도 그의 믿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한 사람의 고집스런(?) 믿음이 하나님을 믿은 한 과학자의 생애를 생생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알리게 된 것이다. 얼마나 멋진 고집(?)인가! 이런 일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안타깝기만 하다. 아무튼 파스퇴르가 근대 의학 연구의 진정한 창시자라는데 대해 오늘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더불어 그는 병리학과 면역학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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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7
  • 선교사들의 새해맞이
                                                                                                          ▲정용구 선교사   2020년이 시작됐다. 선교사들도 선교지에서 새해를 맞이한다. 필자가 사역하던 선교지에서는 한국의 ‘송구영신예배’를기억하면서 한인들이 한인교회에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면 치안도 불안하고, 현지인들도 새해를 맞이한다는 기쁨에 마음이 들떠서 술을 마시고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많다. 특별히 늦은 시간에 외국인들이 모임을 하거나, 이동을 할 경우 쉽게 주목받기 때문에 신변에 위험을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이 많다. 따라서 자정 가까운 시간에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런 만큼 송구영신예배 시간만큼은 고국에 있는 성도들과 같이 예배를 드린다는 설정 아래, 한국시간으로 새해가 되는 시간을 계산해 예배를 드렸다. 한국시간으로 자정은 선교지 현지시간으로 오후 8시 30분이다. 이 시간대는 별 무리 없이 안전하게 송구영신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송구영신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이제 선교현지 시간으로 자정이 되기에 한 번 더 새해를 맞이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선교사들도 신정(1월 1일)이나 구정을 맞이하면 한인마트를 통해 비싸지만 어렵게 떡을 구해서 떡국을 끓여 먹는다. 선교지에서 감히 떡국을 먹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를 드리고, 특별히 한국음식이 몇 가지 더 곁들여지면 감사가 이어진다. 많은 선교사들이 이런 특별한 날을 기억하고, 한국에서 올때 가지고 오는 대표적인 식자재 중에 하나는 잡채를 만들기 위한 ‘당면’이다. 부피는 크지만 무게가 가벼워서 항공기로 오는 편에 넣어도 크게 무리가 되지 않고 ‘한국의 잔치음식’으로 내놓기에도 가장 적절한 음식이기에 이런 특별한 날에는 잡채 요리를 많이 접하게 된다.식사 후에는 선교사 자녀들의 세배가 이어진다. 현지 학교 교복과 편안한 옷에 익숙한 선교사 자녀들이 갑자기 등장한 ‘한복’을 입는다. 어색하고 낯설어서 그런지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다. 한국에 왔을 때에는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세배를 했던 기억이 있었던 그들이 마주 대하는 것은 선임 선교사나, 나이가 좀 있으신 선교사님께 세배를 하게 된다. 선교사자녀들은 한복도 어색하고, 세배도 어색하다. 세배를 받는 분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는 동료 선교사들은 너무나 즐거워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선교사 자녀들이 ‘자신들의 진짜 부모들께 세배를 드리면, 부모들이얼마나 좋아하실까?’라는 생각과 함께 고국에 계신 부모를 생각하면서 조용히 눈물을 훔친다.이어지는 순서는 ‘윷놀이’다. 한국에서야 볼 것이나 할 것도 많지만, 선교지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가장 많이 하는 것중 하나가 ‘윷놀이’다. 선교지에서 윷놀이는 묘한 감정을 불러오기도 한다. 오랜만에 승부욕을 발휘해 열기가 더해진다. 그럴 때면 늘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선교지에서 일하는 선교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에 서로 놀라기도 한다.선교사들은 짧지만 이를 통해 잠시 고국을 생각하며 새해를 맞이한다. 한국을 그리워하며, 잠시나마 한국 음식과 놀이로 그리움을 달랜다. 또 이러한 시간이 되면 잊지 않고 고국을 위해 기도한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영적인부흥과 선교를 향한 열심이 일어나기를 위해 기도한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선교사들의 기도가 응답이 되도록, 하나님이주신 2020년 하루 하루를 귀하고 소중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경험하는 은혜가 이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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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6
  • 성탄절, 9명에게 새 생명 선물하고 떠나
    ▲ 성탄절 40대 뇌사자가 9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고 떠나 감동을 전했다.   40대 남성이 성탄절에 장기기증으로 9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고 떠나 감동을 전했다. 24일 보건복지부 장기이식등록기관인 사단법인 생명을나누는사람들에 따르면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병원에 뇌사상태로 입원 중이던 송모(43) 씨가 이날 오후 5시께부터 장기기증을 위한 적출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성탄절인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질 전망이다.화물운송기사이던 송 씨는 지난 15일 자정께 경기도의 한 고속도로에서 트럭을 운전하다가 사고로 머리 등을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사상태에 빠졌다.생명을나누는사람들의 상임이사 조정진 목사는 송 씨의 지인에게서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가 송 씨의 베트남인 아내와 모친에게 장기기증을 설득했고, 가족들은 그의 장기와 조직을 기증하기로 결정했다.적출 수술을 진행한 아주대병원은 송 씨의 심장과 간, 췌장 등 장기 9개와 안구, 연골과 피부 등 조직을 이날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KONOS)로 보내 필요한 환자들에게 제공되도록 할 예정이다. 아울러 생명을나누는사람들 측은 송 씨의 남은 가족들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 송 씨는 한국말이 서툰 아내와 18개월 된 아들, 암 투병 중인 모친과 함께 살다가 사고를 당했다.조 목사는 "송 씨의 장기로 9명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의 조직으로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혜를 보게 된다"며 "세상에 큰 선물을 주고 떠난 송 씨의 남은 가족을 위한 후원계획을 기독교대한감리회 측과 함께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송 씨의 모친은 "아들이 죽음을 맞게 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하니 장기기증에 동의했다"며 "나도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인데 아들의 장기가 다른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장기기증과 송 씨에 대한 후원 문의는 생명을나누는사람들(☎ 1588-0692)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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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6
  • "겸손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성탄에 널리 퍼지길"
    한교연 대표회장 권태진 목사   한교연(한국교회연합, 회장 권태진 목사)은 2019 성탄절 메시지를 전했다. 이들은 “전쟁의 소식, 군중의 아우성, 미움, 분열뿐만 아니라 창조 원리를 역행하는 일이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이들은 “죄와 사망으로 결박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며 “환영하며, 찬양하며, 영접 한다”고 전했다. 또 이들은 “겸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친구가 되셨다”며 “이처럼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 각자가 존중받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와 섬김과 빛의 정신이 이번 성탄에 온누리에 회복이 돼야한다”며 “ 겸손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이 땅에 이뤄지는 성탄이 되길 바란다”고 역설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이다.   한교연 2019 성탄절 메시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임마누엘!죄인 되어 사망에 결박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이 땅에오신 것을 환영하며 찬양하며 영접합니다.어둠에 속한 백성에게 참 빛으로, 사망에 잡힌 자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분열이 있는 곳에 화합을,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사망이 있는 곳에 생명으로, 짐승만큼 낮아진 자리인 말구유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눈 어두워 보고도 알지 못하고 대적하며, 사망의 길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성탄의 정신이 너무나 필요한 때입니다. 전쟁의 소식과 군중의 아우성 소리가 정치, 경제, 안보, 문화 곳곳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중심에도 빛이 없어서 창조의 원리를 역행하는 인명 경시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이 모든 것을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온 인류가 이번 성탄에 평화와 화해를 통해 서로 사랑으로 질서를 잡아가기를 소망합니다.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피조물이며 그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함으로 모두는 자유와 평화, 인권을 보장받으며 행복한 나라에 살 수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정신이 바로 주님의 정신입니다.오늘날 사회 뿐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곳도 세속적 물질주의와 물량주의에 붙잡혀 가진 자와 힘 있는 자가 지배하는 원리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와 섬김과 빛의 정신이 이번 성탄에 온누리에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탄생하신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의 친구로 그들을 돌아보는 삶을 사셨습니다. 겸손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성탄이 되길 소원합니다.특별히 지금 한국교회는 바울 사도가 탄 로마로 향하던 배가 유라굴로 풍랑을 만난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해와 달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때이지만 희망은 있습니다.우리 한국사회와 교회는 빛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6.25의 환난 때도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선조들의 신앙을 계승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나가는 큰 능력과 기쁨을 얻는 성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할렐루야!! 2019. 12. 25 한국교회연합 대표회장 권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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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6
  • 성육신의 은혜
    ▲이학박사(물리학)·밝은빛명광교회 교육목사   성탄의 계절이다. 성탄절이 되면 동정녀(童貞女) 탄생의 신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동정녀 잉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생물학적으로 동정녀 탄생의 가능성 여부를 질문할 일이 아니다. 이런 질문은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무지의 소치다.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면서 동시에 창조에 참여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같은 방법으로 오실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일한 대책이신 주님이 친히 이 땅에 오신 이 신비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들어 있다.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희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 예수님은 구속주로 오시면서도 선민의 혈통만을 고집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는 예수님을 유다와 그 며느리 가나안 여인 다말의 후손으로, 모압 여인 룻(룻 4:17-22)과 보아스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시도록 하셨다.대개 인간이 지어낸 여러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을 다스리려고 이 땅에 출현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땅에 다스리기 위해 오시지 않으셨다. 왕께서 자기 백성을 섬기려고 오셨다.인생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바치기 위해서 오신다. 이것이 무슨 과학으로 이해돼야 할 일인가?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고 그 교조(敎祖)가 있다. 그러나 그 교조들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구주 예수님을 제외하고, 다른 종교의 교조는 아무도 절대 주권을 가진 창조주가 아니다.또한 다른 종교의 교조들은 정상적인 잉태과정을 거쳐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100% 인성만을 가지고 있다. 신성(神性)이 수도(修道)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반면에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은 독특한 방법으로 잉태되셨다. 동정녀 잉태이다. 죄성 없는 잉태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100%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100% 신이시다. 세상을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이 땅에 오시는 방법이다. 아무도 이 사실을 흉내 낼 수 없다. 동시에 부인할 수도 없다.그러면 과연 이 일은 과학적으로 가능할까? 한마디로 전혀 불가능하다. 이 동정녀 잉태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사실을 설명해 보려고 몇몇 과학자들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창조의법칙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특별한 방법, 즉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초과학적 섭리로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천지를 창조하시고 물리 세계의 법칙마저 창조하신 창조주 그 분만이 초과학적으로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다. 이것도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다. 그것을 우리 과학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기적의 법칙도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독특한 섭리 사역이다. 주님이 그렇게 오신 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할 뿐이다.“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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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4
  • 하나님의 비전을 쫓는 삶 2
    ▲여주봉 목사   지난번에 나는 개인 뿐 아니라, 교회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서, 특히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비전이라는 사실과 비전의 성격에 대해서 나누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비전과 관련하여 네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이다.존 맥스웰 목사는 비전의 4단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참고로 존 맥스웰 목사는 비전의 성격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나나 조지 바나나 헨리 블랙가비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방랑자. 비전을 전혀 볼 줄 모른다.졸병. 비전을 볼 줄 알지만, 자신의 것으로 추구하지 않는다.성취자. 비전을 보고 그것을 추구한다.리더. 비전을 보고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나는 그 부분을 약간 변형하여 비전과 관련하여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전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해서, 그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방랑자.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는 사람.겁쟁이.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만 대가 지불이 두려워서 가지 못하는 사람.성취자.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온 삶으로 달려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룬 사람.리더.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온 삶으로 달려가 하나님의 비전이 그를 통해 성취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그 자리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방랑자. 방랑자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자기가 세운 비전이나 목표 혹은 꿈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과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심각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 방랑자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조지 바나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어른들, 십대들, 목회자들, 교회 스텝들, 정계와 재계 리더들, 비영리 단체와 선교단체의 장들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무려 20만 건의 넘는 인터뷰를 가진 후에 내린 몇 가지 결론을 그의 책 『The Power of Vision』에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몇 개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비록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고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대부분의 담임목사들은 그들이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에 대해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들의 회중들의 삶과 지역사회의 삶에 거의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비전의 개념에 대해서 안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비전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역 교회에 내에서 당회나 청빙위원회가 담임목사를 청빙하면서 그를 검증하는 핵심적인 기준으로서 교회의 비전을 의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비슷하게 모든 개신교 교회 20개 중 한 교회보다 더 적은 수의 교회만이 그들의 평가 과정에 대한 열쇠로서 그들의 비전 진술서(vision statement)를 사용한다.”이것을 보면, 오늘날 안 믿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방랑자인 것을 볼 수 있다.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다.비전과 소명은 다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이유가 소명과 비전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건 단체건 그것은 소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전은 소명과 다르다. 비전은 소명 그 이상이다.한 예를 들어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복음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 나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 삶을 드렸고, 그것을 위해 준비했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신학교에 다닐 때 나는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신학교 교수가 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신학교 교수가 될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목회자로서의 나의 소명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1991년 이전에는 방랑자였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전혀 보지 못했다.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모든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그리고 각 교회는 그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여러 목표를 가지고 그 일에 헌신하며 섬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아니다. 조지 바나도 그런 점에서 교회의 mission(소명)과 비전을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mission을 비전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소명은 각기 서로 다르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선, 우리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더 명확하게 해준다. 예를 들어서, 내가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나의 목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내가 목회 중에서도 어떤 종류의 목회를 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해준다. 또한, 우리의 사역을 위한 비전이 하나님의 소명을 위한 일 중에서도 어떤 일에 우리의 시간과 정력과 물질을 투자해야 할지, 하나님을 위한 일들 중 어떤 일을 거절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등 우리의 사역을 위한 방향을 설정해 준다. 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행할 때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뒷받침을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뒷받침하신다. 이것은 개인과 단체 모두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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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7
  • 포스트 비전트립
    ▲정용구 선교사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당시 121만 명에 불과했던 연간 대한민국의 출국자 수는 2019년 올 한해 2,890만 명에 달했다. 엄청난 숫자가 해외로 나간다. TV에서도 드라마와 요리 방송 못지않게 많이 방영되는 것이 ‘여행’ 프로그램이다.교회의 비전트립(‘단기선교’, 이하 ‘비전트립’)도 옛날에는 주로 여름에 많이 진행됐지만 요즘에는 겨울에도 적지 않은 팀들이 사역을 진행한다. 비전트립에 대한 책을 쓰고,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팀을 만들어 인솔도 한다.특히 선교현지에서 선교사로서 팀을 받아 본 입장에서는 비전트립팀이야 말로 너무 귀한 하나님의 선교자원이다. 비전트립을 위해 적지 않은 훈련과 팀워크, 선교지를 방문해서 선교사와 선교지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본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를 위해 가장 근접하게 준비된 일꾼’들이다. 모두가 선교사로 나가지 않아도 ‘선교를 위한 동역’으로 ‘가장 큰 선교동력’이 될 가능성이 많은 집단이다. 그러기에 이들이 비전트립 후에 구체적인 선교동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들이 선교현장에서 보고 배운 귀한 것을 자신의 교회에서 더 구체적인 선교사역으로 이어지도록 사명을 가지고 ‘선교동력’으로 자신의 교회에 녹아져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다음과정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비전트립을 다녀 온 뒤에 많은 선교학교나 훈련들이 이어지지만 그 중간단계에서 더 구체적이고, 선명한 연결고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언젠가 문화공연 기획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를 통해 기획자는 관객들을 위해서 사전에 공연에 대한 역사적 흐름이나 등장인물들에 대한 사전 지식을 제공한다. 또 공연 후에는 관객들과 함께 다시 공연 후 이해되지 않거나, 자신의 느낌을 나누는 과정을 거쳐 공연을 더 깊게 이해하도록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 과정을 비전트립에도 좀 적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비전트립을 위해 선교현지도 미리 공부하고, 사전준비와 훈련도 한다. 또 현장에 가서 많은 경험을 한다. 그럼에도 비전트립을 마친 후에 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훈련하는 팀을 잘 보지 못했다. 비전트립의 현장사역 기간 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는 짧은 일정에서 놓친 부분이나, 함께 나누지 못한 마음을 같이 나누고, 어렵게 만든 선교동력을 계속 이어나가면 좋겠다. 하지만 이를 위한 구체적인 모임에는 에너지를 많이 쏟지 않는 것 같다. 귀국하는 공항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비전트립 선교보고예배와 영상과 회계결산으로만 마무리하면 안 된다. ‘선교동력을 향한 연결 사역’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예를 들면 다녀 온 사역에 대한 ‘심화연구, 발전된 후속사역 준비, 다음 팀을 위한 훈련, 6개월, 혹은 1년 사역 이어가기, 비전트립팀의 선교동력을 통한 우리교회 선교활성화’ 등으로 이어가기를 기대한다. 한 번의 비전트립에는 많은 수고와 인력과 재정이 들어간다. 이 귀한 선교동력을 한 번의 이벤트 행사로 그치기보다 교회의 제대로 된 선교동력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그 동안의 비전트립이 ‘가는 것’에 많은 비중을 뒀다면 이제는 ‘갔다 와서’에 비중을 둔 ‘포스트 비전트립(Post Vision Trip)’을 통해 더욱 성장하고, 내실 있는 비전트립이 되기를 기대한다.이를 위해 비전트립을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어떻게 비전트립이 ‘다음세대 한국교회 선교동력’이 되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지금의 자리에서 함께 했던 비전트립을 함께 갔던 지체들과 이 과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해 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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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7
  • 청소년들의 눈으로 본 교회
    ▲정재영 교수 교회학교의 쇠퇴   최근 한국 교회에서 주일학교가 점차 사라지고 있어 비상 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것이 어제 오늘의 현상은 아니지만 주일학교는 감소를 넘어 해체로 치닫고 있다.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규모는 더욱 확산되고 있다. 2010년부터 주요 교단이 총회에 보고하는 교세 현황은 주일학교 해체의 심각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8년 기준 중고등부가 없는 교회 48%, 중등부가 없는 교회 47%, 초등부가 없는 교회 47%, 유년부가 없는 교회 47%, 유치부가 없는 교회 57%, 유아부가 없는 교회 97.4%, 영아부가 없는 교회가 78.5%에 이른다.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교회에 중고등부와 유초등부가 없는 형편이다. 다른 교단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2015년 인구센서스에서 우리나라 10대의 종교 구성비에서 개신교가 22.1%가 나온 것을 보면 비율 면에서 개신교 청소년 수가 적은 것이 아니라 저출산으로 인해 청소년 인구 자체가 줄어든 것이 큰 원인이라 여겨진다. 10년 전에 비해 10대 개신교 인구가 7.1%, 10세 미만이 17.3% 줄어든 것이 이를 말해준다. 또한 교회 규모가 교인 수 50명 이하의 작은 교회의 경우에 주일학교를 따로 운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교인 수 100명 이하의 소형 교회가 전체 교회에서 대략 70% 정도를 차지하고 그 중에서 50명 이하의 교회가 또한 70% 정도를 차지한다고 추정한다면 전체 교회에서 약 절반 정도의 교회에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측되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주일학교를 늘리는 것은 출산율 증가와 같은 외부 요인이 작용하고 있으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직접적인 대책이 되지는 않겠으나 교회마다 교회 학교 교사 지원도 줄고 있고 그나마 운영되고 있는 주일학교도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청소년들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따라서 현재 교회 중고등부를 활성화할 뿐만 아니라 기독 청소년들이 신앙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교회연구소>와 <한국교회탐구센터>가 공동으로 기독 청소년들의 인식 조사를 실시하였다. 기독 청소년에 대한 실증 조사가 거의 없는 데다가 기존의 조사가 실태 파악 위주로 이루어져서 교회나 교회 중고등부에 대한 이들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는 어른들의 관점이 아니라 청소년의 관점에서 교회와 중고등부에 대한 평가를 하도록 함으로써 교회 학교 운영에 기초 자료로 삼고자 하였고, 중고등부 예배가 없어서 어른 예배를 드리는 경우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청소년들의 인식도 파악하여 기독 청소년들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갖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청소년 사역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가족 종교화 되는 기독교 이 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모태신앙 50.8%를 포함하여 초등학교 이전에 교회에 출석하는 비율이 70%에 이른다는 결과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서 정착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중고등학생 때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특히 교회에 출석한 계기는 70% 정도가 부모를 따라서 왔다고 응답하여 비기독교인 가정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는 매우 적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현재 교회에 다니는 이유에 대해서도 예배나 설교가 아니라 가족을 따라서 다닌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는 점에서 가족 종교화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기독교가 끼리끼리의 종교로 전락할 우려도 나타내고 있다.그리고 여러 항목에서 부모가 모두 교회 출석할 경우에 신앙의 영향이 크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부모 모두 비기독교인인 경우에는 교회에 계속 다닐 의향도 상대적으로 낮게 나와서 기독교 가정이 아닌 학생들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부모 중 한분만 교회에 다니는 경우에 가정 안에서 교회에 나가고 신앙 안에서 양육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신앙생활에 대해 더 강요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있고 교회에 대한 이미지도 더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신앙의 강요가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자녀의 신앙 교육에서 보다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기독 청소년들이 신앙성장에 가장 도움을 받는 것은 예배/설교라고 했지만, 학생예배에 대한 만족도는 51.2%로 높지 않았다. 어른 예배에 드리는 경우보다 오히려 낮게 나왔다는 점에서 학생 예배에 대한 재조정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 공과공부에는 70% 정도만 참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만족한다는 응답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여 학생 예배를 드리는 청소년들 중에 3분의 1 정도만 공과공부를 의미 있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공과공부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또한 지도 목회자에 만족도가 비교적 낮게 나온 것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가장 모범이 되고 영향을 받는 인물은 부모였고, 특히 어머니의 영향이 큰 것으로 나타나서 부모에 대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다음으로, 경제 수준이 높을수록 아버지가 기독교이 비율과 부모 모두 기독교인 비율이 많아진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것은 경제 수준이 낮을 경우에는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하기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제 수준이 낮을수록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많고 특히 자영업자들의 경우 휴식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영업에 매달려야 하는 실정이므로 종교 활동에 시간을 할애하기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또한 경제 수준이 상층인 학생들과 기독교인 부모를 둔 학생이 상대적으로 삶의 만족도가 높게 나타난 결과로 볼 때 경제 수준이 낮고 그래서 부모 모두 교회에 나오기 어려운 경우에 자녀가 교회에 나오기도 쉽지 않고 삶의 만족도 낮은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경제 수준이 낮은 경우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낮게 인식하여 경제 수준이 낮은 청소년들이 신앙적으로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회 밖 청소년에 관심 가져야 이 조사에서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이른바 가나안 청소년들의 대해서도 조사했는데, 이 경우 역시 부모의 신앙 여부가 중요한 요인으로 나타났다. 부모가 모두 비기독교인이거나 모두 교회 출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본격적인 관심이 생길 시기인 중학교 때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으며 교회를 떠난 이유도 교회 출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 가장 큰 것으로 나와서 이 시기에 신앙이 잘 정립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 중에 절반은 여전히 분명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4명 중 3명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싶다고 했으며 10명 중 6명은 교회에 다시 출석하고자 하는 의향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와서 이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여기서 우리는 본래 주일학교가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들을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산업혁명기의 영국에서 서민 자제, 특히 노동하는 아동을 대상으로, 일요일에 학교를 개설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했던 자선교육 기관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제도화가 되어서 교회 안에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신앙 교육을 하고 이들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이번 조사 결과처럼 교회 청소년들이 대부분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인 상황에서 교회 밖 청소년들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구체적인 사역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특히 경제 수준이 높고 안정된 부모를 둔 자녀들이 교회에 더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저소득층의 청소년들, 이른바 위기 청소년들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소년들에 대한 교회의 사역이 교회 안 청소년들을 관리하는 수준을 넘어서 교회 밖 청소년들에 대한 선교적 차원의 다양한 사역들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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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연재
    2019-12-16
  • (이창엽 선교사칼럼)ΙΧΘΥΣ(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그리스도)Ιησοζ Χριστοζ Θεου Υιοζ Σωτηρ
                    ΙΧΘΥΣ -Ιησοζ Χριστοζ Θεου Υιοζ Σωτηρ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그리스도)  기독교 박해 시절 카타콤 등에서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 은밀하게 통용된 기독교의 상징으로 물고기 형상을 하고 있다.                                    동·서양 물고기 상징- 현어 vs 풍경 vs 목어 vs ΙΧΘΥΣ 현어는 맞배집이나 팔작집 지붕의 박공판이 '人' 자 모양으로 마주치는 곳에 부착하는 '어형(魚形)' 또는 '초화형(草花形)' 장식을 말한다. 기능은 물론 큰 장식 효과를 나타내 신분 과시용으로 활용되었고, 중국 절강성 태순(泰順)의 고가옥의 현어는 장식물 외에 화재 예방의 주술적 의미와 건물의 품격을 높이는 효과를 나타낸다.   순천 송광사, 지네 철과 현어   풍경(風磬)이란 처마 끝에 달아 바람에 흔들려 소리가 나게 하는 경쇠이다.(국립국어원,2020)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처럼 나태하거나 게으르지 말고 수행정진 하라는 상징물이다.   합천 해인사, 풍경   물고기는 밤에도 낮에도 눈을 감지 않음에 착안하여, 구도자는 졸거나 자지 말고 항상 깨어서 꾸준히 수도에 정진하라는 의미로 형상화하였다. 둥근 형태는 ‘목탁’이라 하고 긴 형태는 ‘목어’라고 구분한다.   양산 통도사, 목어   익투스 ΙΧΘΥΣ(물고기) 는 기독교 박해 시절 카타콤 등에서 초기 기독교인들 사이에 은밀하게 통용된 기독교의 상징으로 물고기 형상을 하고 있다.   ΙΧΘΥΣ는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의 약자이다. ΙΧΘΥΣ는 Ιησοζ Χριστοζ Θεου Υιοζ Σωτηρ 이에수스(예수) 크리스토스(그리스도) 테우(하나님의) 휘오스(아들) 소테르(구원자)이다.   익투스 ΙΧΘΥΣ                                
    • 오피니언
    • 이창엽선교사
    2019-12-13
  • 말씀으로 일어난 부흥
      ▲이정기 목사   한국 교회가 큰 위기를 맞았다. 총체적인 위기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더욱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 존재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이런 얘기를 듣는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그러나 초대교회에도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의 갈등과 불평이 있었다. 초대교회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 돌아가도 별 수 없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와 완벽한 사람은 없다. 믿을 것은 말씀밖에 없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오직 성경!’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많은 책들가운데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두말할 것 없이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겔3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끌고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신다. 전혀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였다. 그런 뼈들을 향해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을 대언하자 뼈들이 연결되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고, 생기를 향해 대언했더니 생기가 들어가 큰 군대가 된다. 전혀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씀으로 회복시킬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한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요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요1:14절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다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그 자체에 엄청난 능력이 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 지고 눈이 뜨였다.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딤후3:16-17) 말씀이 능력이다. 말씀이 축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나라는 부강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는 부흥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일터는 창대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가정은 번성하게 된다.  느헤미야 8장에는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벌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운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 부흥은 말씀으로 일어난 부흥이었다.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한다. 백성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6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말씀을 사모하는 백성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여 모이는 곳에 임한다.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난 오순절 사건도, 고넬료의 가정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도, 미스바에서 일어난 승리의 역사도 모두 사모하여 모일 때 일어났다. 어느 때든지 축복과 부흥의 원리는 동일하다. 축복과 부흥 전에는 항상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이 있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고, 말씀이 더 듣고 싶고,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임하게 되는 전조이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젓을 사모함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벧전2:2)  에스라가 백성들 앞에서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 일어섰다는 것은 말씀을 경외하는 모습이고,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순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말씀의 권위를 높이는 만큼 은혜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 말씀이 귀하게 느껴지고 말씀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들리면 역사는 일어나게 될 것이다.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고, 믿음의 역사가 있어서 소문난 교회였다. 모든 믿는자에게 본이 되는 교회였다. 그 비결은 말씀받는 태도가 좋았기 때문이다. 살전2:13절에 “~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에, 그 말씀이 믿는자들속에서 역사한 것이다.  에스라가 읽어준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고, 크게 기뻐하고, 말씀에 순종한다. 칠월에는 초막절을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초막절을 지킨다. 이방인과의 잡혼을 금한다. 안식일 날 해서는 안될 일들을 금한다. 안식년을 똑바로 지킨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단한다. 말씀으로 일어난 부흥이었다. 우리 신앙생활에 변화가 없는 이유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많고, 성도는 많은데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사는 한 사람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 한 사람이 가정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성공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가장 큰 축복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 순종만큼 복된 길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 축복하시고, 순종하는 만큼 사용하신다. 참된 부흥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말씀으로 시작된 부흥은 근본적인 변화가 있게 한다. 신앙생활의 내용이 달라진다. 신앙의 수준이 달라진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부흥이 필요하다. 말씀이 깨달아져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크게 기뻐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요새 지식 정보 산업이 뜨고 있다. 인터넷을 보면 엄청나고 방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 원하는 지식 대부분 다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지식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변화시키는 능력은 말씀안에 있다. 말씀 안에 사는 길이 있고, 말씀 안에 회복의 길이 있다. 말씀따라 살면 신기하게 문제도 풀리고, 말씀따라 살면 신기하게 인간관계도 풀리게 된다. 이제 작은 일을 해도 하나님 말씀보다 앞서지 말자. 작은 사업을 해도 말씀 중심적으로 운영하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마4:4> 말씀없이 잘사는 길은 없다. 말씀없이 성공도 없고, 말씀없이 성숙도 없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으로 나타난다. 말씀을 통한 깨달음으로 회개하고, 크게 기뻐하고, 순종하여 삶의 현장에서 말씀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부흥 많이 체험하며 사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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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3
  •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는 통합 전국학생중고등부연합장 김진옥 장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교직을 통해 중고등부를 섬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은 저의 삶에 축복이며 행복입니다.” 교회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을 섬길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는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는 김진옥 장로(전주신일교회). 그는 35년여 동안 교직(근영여중)을 통해 학생들과 동거동락 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 그가 통합 전국학생중고등부연합회 회장을 맡아 하나님 나라 확장에 일조하고 있다. 다음세대의 핵심인 교회 청소년들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지에 대한 고민을 김 장로는 교회와 학생들을 섬기며 오랜 세월 동안 고민해왔다. 특히 현장에서 경험한 사역의 열매들과 학문적 검증을 토대로 청소년 사역의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런 김 장로는 ‘믿음이 이긴다’는 진리를 제시하며 교회는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믿음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불확실하고 야누스 같은 얼굴을 지닌 정보시대의 청소년들에게 어떻게 불변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기독교교육을 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김 장로는 삶을 통해 그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도 삶과 신앙의 멘토인 아버지 김삼기 장로가 교과서이며 멘토의 역할을 보여줬다. 임실 삼계가 고향인 그는 아버지가 삶과 신앙의 멘토이다. 김 장로는 어릴적부터 아버지의 삶과 신앙을 지켜보면서 성장해왔다. 김 장로는 “아버지(김삼기)가 장로로 어머니(김옥녀)가 권사로 오래 세월 동안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셨다. 할아버지(김학점)와 할머니(김희자)는 오수교회를 섬기면서 6.25 때에 순교를 당하셨다”며 “쌍치 금성교회를 어릴적부터 다녔다. 12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버지께서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셨다. 그 섬김을 지켜보며 자랐다.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아버지 김삼기 장로를 지켜보며 교회에 대한 섬김과 봉사에 대해 몸으로 터득하기도 했다. 군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김 장로는 “군대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많았다.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꼈다.훈련 도중 지뢰가 폭발했다”며 “그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살려주셨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과 결단이 있었다”고 밝혔다. 김 장로의 삶은 교회 우선주의 삶을 살고 있다. 신일교회에 출석한 지는 20년 됐고, 장로 임직은 8년 됐다. 김 장로는 “1부와 3부 찬양대 대원으로 섬기고 있다. 인사위원장도 맡아 섬기고 있다. 교회에서 나누고 섬기는 일에 앞장서왔다”며 “이에 지인들의 오해도 있었으나 교회를 섬기는 사역에 헌신해오다가 전국연합회 회장직도 맡았다”고 했다. 김 장로는 지난 3월 3일 전국학생중고등부연합회 회장직 취임감사예배를 드리고, 지난 7월에 무주에서 개최됐던 전국학생수련회와 8월에 서울영락교회에서 있었던 전국학생찬양경연대회, 10월에 전주신일교회에서 가졌던 성경고사대회가 등이 전국연합 행사이다. 이 연합행사를 치러내기 위해 김 장로는 잠시 동안 마음 고생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겨내고 행사를 마무리했다. 또, 2020년 1월 초순에는 전주신일교회에서 500여 명의 전국교사들이 함께모여 교사세미나를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다. ‘청소년과 함께 죽고 청소년과 함께 산다’는 생각으로 지난 35년간 청소년 사역을 펼쳐온 김 장로. 일찍이 교직을 통해 청소년 사역에 부르심을 받고 나선 그가 오늘도 교육의 현장으로 달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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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2
  • 샬롬나비 "이웃 상실한 개인주의 한국 사회를 향하여"
      김영한 박사© 샬롬나비(원장 : 김영한 박사)는 대림절 메시지 첫 번째로 ‘이웃 상실한 개인주의 한국 사회를 향하여’를 전했다. 이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상호 연결된 이웃”이라며 “그러나 우리는 극단적 여야 대립 등 총체적 소통 부족 속에서 살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은 “한국사회는 상부상조의 아름다운 전통을 지니고 있었지만, 현재는 개인주의가 강한 사회로 달려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강림하셔서, 재난 속 우리의 고통에 참여하시고 공감하신 하나님”이라며 “대림절은 우리 모든 죄 짐, 상처, 어려움을 아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절기”라고 강조했다. 때문에 이들은 “대림절에 하늘에 고고히 홀로 계셨던 하나님이 아니”라며 “우리 고통과 절망 속에 함께 공감하시는 하나님 은총”처럼 “우리도 이웃들에게 인도주의적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이다. 대림절 메시지1 <이웃 상실한 개인주의 한국 사회를 향하여> 우리는 하나의 고립된 개인이 아닌 하나님의 창조 질서 속에서 상호 연결된 이웃이다. 자연과 사회, 이웃나라도 각자 도생 아니라 서로 배려, 함께 살아가야할 우리의 동반자이다. 2019년 대림절 첫 주일은 12월 1일 주일부터 성탄 전 4주간동안 대림절 주간으로 예수의 성탄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이다.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오늘날 원자화되어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대림절의 빛 속에서 성찰하기에 이른다. 대림절은 하나님과 소통이 끊어진 인류와 소통하고 구속하기 위하여 이 세상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대망하는 절기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 구성원들은 소통의 부재 속에 살아가고 있다. 오늘날 극단한 여야 대립, 정치적 소통의 부재를 넘어 지역과 계층 그리고 세대를 초월해서 총체적인 소통의 부재가 팽배해졌다. 우리는 지금 개인주의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고, 소통의 단절이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사회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개인적인 가치관이 강하고 소통이 결여된 사회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과거 한국 사회는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 돕는 문화를 아름다웠다고 간주하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면서 위로했던 시기가 추억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과거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미덕은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구현하기란 힘든 것인가? , ‘누가 네 이웃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개인의 가치관을 가장 중시(重視)여기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공동체 의식의 회복을 위해서는 어떤 노력들이 필요할까? 샬롬나비는 대림절을 맞이하여 개인주의 사회에서 다시금 공동체의 미덕을 회복하기 위한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자 한다. 1. 우리는 공동체와 동떨어져 살 수 없는 연고적 존재자들이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연고적(緣故的) 존재들이다. 누구의 아들과 딸이며 학교와 직장 등에 소속되어 살아가는 우리는 최소한 어느 집단에 연고된 존재들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이상 우리는 단독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의 안에 거하시면서 함께 교제하시므로, 고독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와 함께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교제하며 살아가라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창조행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들을 개인이 아니라 작은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로 설계하셨다. 남녀가 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짝을 허락하셨다.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첫 단추이다. 가정을 통해 사회가 형성된다. 사회는 그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살아가는 유적 존재자들이다. 동양에서도 크게 하나 된다는 대동사상으로 함께 어울러져 사는 사회를 이상사회로 꿈꾸며 살아 왔다. 인간은 오직 이성의 힘으로만 단독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타자와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우리는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반드시 타자와 함께 삶을 공유하는 존재이다. 연고적 존재로서 우리는 서로가 배려하고 살아야 하며, 개인의 삶에 공동체를 배제시킬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2.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사람을 넘어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단지 인간과의 관계만을 설정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인간과 모든 동식물의 관계성을 포함한다. 성경에서 인간은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는 남녀가 하나가 되어 가정을 이루는 사회 구성원을 넘어 그 가정은 자연 속에 또 다른 구성원임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사회를 넘어 자연과 함께하면서 공동체에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말하고, 인간 사회에서 자연까지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 과정을 통해 인간이 자연(모든 생명체)을 다스리게 하셨다. 여기서 자연을 다스리는 행위는 단순한 지배나 통치의 의미가 아니라 자연과 함께 잘 어울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자연과의 동반자적 사명을 말한다. 인간은 우리들 사회 공동체를 넘어 자연과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타자는 인간을 넘어 자연과 모든 생명에 대한 경외까지 연장된다. 이에 우리는 사회 구성원뿐만 아니라 자연까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외연의 확장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은 사회 구성원과 자연의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나와 함께 한 동반자로서 서로 간에 배려하는 공생(共生)의 가치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야할 삶의 터전이요 우리의 삶의 따뜻한 보금자리이기 때문이다. 3.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공동체의 보살핌과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가치관이 절실히 요청되어야 한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와서 물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는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했다. 이어 청년이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이에 예수는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 후 부자 청년은 예수의 말을 듣고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면서 지나갔다. 예수는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황금률을 우리에게 제시했다. 예수는 지극이 이타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자신의 재산을 남과 같이 공유하는 삶을 제시한 것이다. 실제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조선패망 후 이회영과 이시영 같은 분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을 하였고, 경주 최부자댁은 흉년이 들었을 때는 이웃의 땅을 사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이웃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어 300년간 가문의 재산을 보존하였다. 최근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요 전설의 배우 신영균씨도 500억을 기부하였다. 기부의 황제라고 불리는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그리고 페이스북를 만든 주커 버커와 같은 CEO들은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인물로 유명하다. 그들은 지금도 가난한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그들은 배고픈 아이들에게 빵을 주고 있다. 연기자인 주윤발 탑 스타도 기부황제에 이름을 올렸다. 그는 “돈은 내 것이 아니라, 내가 잠시 맡아 보관할 뿐이다. 내가 죽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주윤발은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사회의 약자를 위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마찬가지로 그의 아내도 전 재산 기부에 찬성하면서 아름다운 선행의 가정을 몸소 실천했다. 4. 우리는 타자의 얼굴을 외면하지 말고 그에 대한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 포스트모던 사회는 타자와 함께하는 공간이 점점 줄어가고 있다. 그만큼 우리사회에서 개인주의가 발전하면서 타자에 대한 배려의 폭이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이다. 유대계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윤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타자의 얼굴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특히 헐벗은 얼굴을 보고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요청한다.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마주함 또는 만남은 하나의 단순한 행위를 넘어 윤리적 요청이라고 보고, 타자의 얼굴을 통해 윤리적 명령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얼굴을 외면하고 있다. 예수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요청되는 계명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웃사촌’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지금 누가 네 이웃인지 물어보아야 한다. 지금도 우리의 이웃은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타자의 얼굴이 우리와 마주칠 때, 그들의 얼굴에서 나오는 도움의 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곧 연말연시가 다가오고 있다. 따뜻한 온정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웃들이 생각나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올 해 우리가 이웃의 따듯한 온정을 베풀지 못했던 시간들을 회고하면서 올 겨울에는 마음으로 주위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5. 우리는 난민(難民)에 대해 국제적으로도 연대의식을 가지고 하나 된 지구촌을 이루어가야 한다. 오늘날 국제사회는 점점 더 자신의 국가 이익만을 추구하는 고립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있고, 국제간의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종교간의 갈등과 인종간의 갈등이 많아지면서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다. 쿠르트족 난민, 이슬람 난민들이 발생하고 있다. 난민들에 대한 구호와 인도주의적 도움이 절실하다. 종파와 인종의 차원을 넘어서 인도주의적 배려와 피난처 제공이 절실하다. 지금 홍콩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의 눈치를 보기 때문인지 국제사회에서 홍콩의 민주화에 대한 지원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우리는 ‘세계는 하나’라는 의식 속에서 다른 나라들의 어려움도 돌아보고 힘든 우리의 이웃나라들을 보듬으며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지구촌을 일구어 가야 하겠다. 6. 자유민주화를 갈망하는 홍콩주민들은 우리의 이웃이다. 홍콩 자유민주화를 지지한다. 우리 한국인과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이웃인 홍콩 시민들과 홍콩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이들이 추구하는 자유민주화를 지원해야 한다. 홍콩 그리스도인들은 홍콩의 자유민주화를 위하여 적극적인 참여를 하고 있다. 이는 신자들이 공동체를 위하여 해야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중국 중앙정부 독재자 시진핑은 장기 집권을 위하여 중국의 가정 교회를 핍박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중국 공신당은 중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홍콩 반환시에 체결한 일국 양제에 대한 국제적 약속을 무시하고 홍콩 시민들의 자유민주화 요구를 무시하고 있다. 인권 정부라고 자처하는 한국정부는 인권 탄압하는 중국 정부에 항의하고 홍콩 시민들의 자유민주화를 지지하고 한국교회는 홍콩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지지를 발표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7. 그리스도는 이 대림절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친구, 위로자, 구속자가 되신다. 오늘날 서로가 서로에게 소외된 현대 4차산업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지위를 버리시고 이 재난과 갈등과 증오와 고통의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 대림절에 강림하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강림하셔서 이 세상의 모든 전쟁, 재난, 난민들의 어려움, 환경 재난 가운데 우리의 고통에 참여하시는 공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대림절은 이 세상이 이기주의적으로 파편화되는 것을 도외시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 짐, 상처와 어려움을 함께 지시고 우리와 공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게하는 절기다. 대림절에 들어서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저멀리 하늘에 고고히 홀로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절망의 현장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공감의 하나님의 은총을 전달하고 서로 간에 배려하고 가까운 이웃과 먼 이웃에게 인도주의적 사랑을 실천하는 배려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연재
    2019-12-02
  •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니
    루카스 크라나흐(소), 나인성 과부 아들의 부활, 제단화, 1569년경. 비텐베르크 교회, 독일 Resurrection of the Widow's son from Nain, altar panel by Lucas Cranach the Younger, c. 1569, in the Stadtkirche Wittenberg      예수께서 제자들과 많은 무리가 동행하여 나사렛과 가까운 나인성 성문 앞에 왔을 때과부의 외아들을 메고 나오는 장례행렬을 만났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눅7:13-16)   예수님은 죽은 과부의 외아들을 다시 살리신 이적을 행한 위대한 하나님이시기 전에 외아들이 죽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 위로해 주시는 따뜻한 인간이셨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신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일을 잊지말고 사회적 약자를 생각하라는 것이다.(신24:17-22) 1) 너는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 과부의 옷을 전당 잡지 말라2)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일부를 남겨두라3) 감람나무나 포도를 수확할 때에도 일부를 남겨두라 위에서 객(客히브리어로는 게르)은 나그네 체류자와 외국인 등 거주자가 일반적으로 소유하는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에서 게르는 일반적으로 개종자로 간주되었다. 선민의식이 투철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개라고 부르던 시절이니 지금 우리가 말하는 나그네나 귀화자들하고는 다른 개념이다.                  
    • 교계뉴스
    • 문화
    2019-12-02
  • 다산신도시 작은교회 도전기
      ▲이효상 목사ㅣ교회건강연구원장   25년 살던 경기도 구리시를 떠나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 살았던 남양주로 이사했다. 다산신도시로 입주한 탓인지 다산 선생 형제들의 신앙과 정신을 생각하게 되고, 교통사정이 좋은지, 가까이에 편한 마트가 있는지, 맛집은 어디인지, 스포츠센터가 좋은지 등에 관심이 가게 된다. 학부모라면 자녀들이 다녀야할 유치원과 초중고가 있는지, 주변 환경에 관심이 크다. 그 중 크리스천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마 처음엔 이전 교회를 계속 다닐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교회를 정하고 기존교회를 떠나는 것은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사정상 교회를 다시 정해야 할 경우도 있다. 너무 멀리 이사 왔거나, 자녀들이 어리거나,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어 먼 교회로 가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롭고 건강한 교회를 찾는다. 신도시 입주민들은 새로운 교회를 생각하고 찾는다. 아마 주님도 여러 모습으로 교회다운 교회를 찾으실 것 같다. 신도시 새로운 지역, 새로운 교회는 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틈새전략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꼭 큰 건물교회가 아닌 작은 공간도 좋을듯하다. 카페나 레스토랑, 학원이나 식당을 빌려 주일 오전만 이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도 가능하다. 어차피 작은 교회는 소그룹이기에 중대형 교회를 흉내로는 생존이 어렵다. 기존의 생각이나 패러다임을 바꾸고 가족같은 공동체, 교회다운 교회를 지향하면 좋겠다. 여기에 목사 1인의 교회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투명성과 건강한 공동체로서 공교회성까지 갖추면 더 할 나위가 없이 좋다.   요즘 성도들은 건물이 큰 교회를 찾기 보다는 공동체가 건강한 교회를 찾는다. 다산에 도전장을 내밀고 개척한 작은 상가교회나 목회자를 만나보면 참 순수하고 열정이 대단하다. 이런 개척도전기, 건강한 생존기에 관심과 애정이 더 생기고 주목하게 된다. 다산동의 예장합동 다산따스한교회(손진원 목사)는 3월에 개척한 성복중앙교회 분립 1호이다. 손 목사는 제자훈련의 전문가로, 교회소개 전단을 잘 만들어 전도에 사용한다. 예배가 찬양과 경배로 뜨겁고 예배 후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는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결단, 축복, 격려하는 악수례를 하는 독특함이 있다. 이어 따스한 애찬과 따스한 소그룹 활동으로 친교하며 말씀을 나눈다. 수요예배에는 성경66권을 공부하며, 금요철야는 주기도로 하는 기도회를 가진다.   가운고등학교 정문앞에 위치한 예장통합의 하늘누리교회(윤호용 목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과 관계가 깊어지도록 하는데 사명을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새신자에 대한 교인들의 친밀도가 높다. 예배전 중보기도팀을 통해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를 기도한다. 예배는 차분하고 안정감을 지녔다. 매월 말씀주제(예를 들어 ‘공감’)를 가지고 진행되며, 오후예배는 목장예배로 후원협력 선교지를 중심으로 모인다.   다산동 예스프라자의 감리회 주이음교회(정현수 목사)는 퇴계원에서 시작하여 오남리를 거쳐 다산동에 세 번째 정착한 교회다. 정 목사는 서글서글한 인상과 차분함, 친근감이 장점이다. 교회적으로 성도들이 큐티에 열심을 내며, 말씀사경회와 새가족전도를 위해 ‘릴레이’기도를 주일오후와 수요기도히는 성경통독을 진행하며, ‘가족소통학교’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예장합동 기쁨누리교회(성성섭 목사)는 감자탕교회에서 개척한 교회로 분당에서 6월에 이전해 왔다. 사모님의 인테리어 실력으로 꾸며진 성전이 포근하고 아름답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영향력을 끼칠 사람을 키우자’는 창립비전을 가지고 설립 1년 정도된 교회이다.   가운동의 예장고신 온생명교회(손재경 목사)는 칼빈이나 루터 등 종교개혁가들이 만든 ‘시편찬송’(고려서원)을 예배 전이나 예배에 별도로 사용하는 전통적 예전으로 드린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예배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좀 생소하고 적응이 낯설다. 예배전 결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에서 십계명 낭독도 있다. 대표기도가 5분 정도면 좀 긴 편이다. ‘전교인 성경읽기와 돌아보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설립 10년을 넘겼다.   이렇듯 다산에는 괜찮은 교회들이 꽤 많다. 사랑하는교회, 세한교회, 바라봄교회, 풍성한교회, 신풍라파교회, 도동세광교회, 한빛교회, 경성교회, 두드림교회, 세은교회, 미금제일교회, 우리이웃교회, 도동순복음교회, 주마음교회, 선한교회 등 이름처럼 교회마다 특징도 다양하다. 비록 상가지만 부흥하는 교회, 목사님의 성품이 참 좋은 교회, 구제와 사회봉사를 잘하는 교회, 매주 기도와 전도를 열심하는 교회, 설교의 말씀이 좋고 성경공부를 하는 교회, 성도들의 교제가 풍성한 교회 등이 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선하고 좋은 교회들이다. 10월말 구리에서 이전해 온 나루순복음교회(나송아 목사)나, 11월말 한양수지인 상가에서 개척한 순복음 다산충만한교회(이평수 목사)도 있다. 참고로 한국교회는 70%가 출석교인 100명 미만이다. 개척교회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한 작은교회 목회자들의 꿈과 믿음에 마음이 간다. 새신자가 와도 반겨줄 사람이 없고 재정의 부족함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희망과 열정을 잃지 않는다. 전도와 예배준비, 안내와 반주, 점심식사 준비까지 다 목회자와 사모의 몫이다. 돕는 손길이 절실하다. 이런 작은 교회가 한국교회 생태계의 근원지이다. 작은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국교회가 전체가 살 수 있다. 새로운 신앙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작고 열악한 교회들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좌석수는 최대 100석 미만, 평균 교인 출석수 50여명 남짓하지만 주님의 임재가 있고 부흥의 가능성을 믿기에 관심이 간다. 다산신도시에는 좋은 교회가 많다. 새로 이사 와서 건강한 교회와 좋은 공동체를 만나 행복한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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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2
  • 교회 지도자들이여! 이젠 제자리를 찾자
    큰사랑교회 박광서 목사   좌익의 판도라에서 나온 온갖 사악한 영들이 이 나라를 혼돈과 파괴의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보통 국가 안위의 기초는 ‘경제’와 ‘안보’와 ‘국민의 성숙도’로 판단한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래 현 정권의 경제점수는 몇 점일까? 반환점을 돈 지금 문재인의 ‘J노믹스’는 낙제 점수다. 성장률, 취업자 수, 중산층 비중 등 10개 주요 지수에서 역대 정권 중 최악이다. 제2의 베네수엘라가 대한민국의 미래상으로 다가온다. 안보는 어떤가? 역시 동일하다. 군 해체로 군대는 민병대 수준으로 전락해 있고 한미일 동맹은 파기 직전에 있다. 그럼에도 이 정권의 북을 향한 사랑은 도무지 식을 줄을 모른다. 현 정권의 유일한 목적이 대한민국을 김정은에게 진상(進上)하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현 상태가 지속된다면 공산화는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분별 못하는 인생들이 왜 그리 많은 것일까?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 원인은 국민의식이 심각하게 좌경화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좌경화율이 90%에 이른다고 한다. 그 나라는 보수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일시적일뿐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답이 없는 불행한 나라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떨까? 혹자는 약 70%에 달한다고 한다. 지나친 말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태가 지난 40년 좌익의 주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대학진학율이 80%인 수준 높은 국민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착각하지 말자. 이 나라는 이제야 보수가 뭔지 고민하는 부끄러운 수준의 나라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좌익은 지난 40년 정치, 경제, 법조, 종교, 언론, 교육, 행정, 군대, 사회, 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침투하여 헤게모니 장악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성공했다.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교육과 군대와 문화와 사회를 장악했다. 그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저들은 오늘을 소망하며 철저히 희생하고 절제했으며 주밀하게 움직여왔다. 지금도 그 작업은 진행형이다. 반면 보수우익은 어떤가? 너무 어리석었다. 저들의 간계와 움직임에 무지했고 자신의 기득권에 침 흘리며 탐욕의 화신들로 살아왔다. 보수를 표방하는 제1야당의 현재 모습을 눈여겨보면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뼈를 깎는 개혁의 진통을 겪어도 부족한데 전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지도자들도 보수 위정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경과 역사가 증명하듯 타 종교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한계가 있다. 오히려 좌익의 주역 혹은 들러리가 되기 쉽다. 왜 그런가? 참된 개혁의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점을 잘 아는 좌익은 교회를 제일 두려워하고 골치 아파한다. 저들은 교회의 인간의 영혼과 양심을 깨우는 진리운동을 매우 불편해한다. 자신들이 그 진리운동을 감당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억지와 선동을 주 무기로 삼는 것이다. 교회만 무너뜨린다면 저들의 목적은 쉽게 달성된다. 이 점을 교회가 간파해야하건만 오히려 좌익에 동조하는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들이 교회 속에 적지 않아 보여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왜 좌익을 지지하는 것일까?   나라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음에도 “아무 문제없다, 뭐가 문제냐”며 공산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정말 공산국가를 소망하는 것인가? 특히 교회 지도자가 이런 입장에 있다면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 같이 “과거 보수정권도 이 정도는 해 먹었다.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사람 있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잘 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볼멘소리를 한다. 이런 모습에 혹자는 “좌익을 지지하는 이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비판하곤 한다. 그리스도인이 왜 좌로 기울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 두 사람의 견해가 도움이 될 듯싶다. (1) 낸시 피어스(Nancy Pearce)는 ‘사실과 가치의 분열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성경의 눈으로 해석했다. 즉, 과학도 성경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체계였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은 요지부동의 자리를 굳혔고, 성경적 진리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취향이요 선호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신앙인조차도 진리보다는 현실에 더 영향을 받는다. 성경을 신행의 준칙으로 여기지 않는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에게 성경과 좌익의 선동 중 무엇이 더 와 닿겠는가? 혹자는 “나는 좌도 우도 아닌 중도다”고 주장한다. 과연 투표 현장에서도 유효할까? 투표 현장에서는 좌든 우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성경적 판단보다는 지연과 학연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여기서 신자임에도 사회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교회가 좌경화됨은 거듭난 신자들이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영국의 보수철학자 로저 스크루톤(Roger Scruton)은 공산사회주의를 ‘영지주의’(gnosticism)로, 정치 지형을 재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저들의 신조어를 ‘주술’(呪術)이라 표현한다. 필자 역시 스크루톤의 통찰에 공감한다. 공산사회주의는 칼 맑스의 특정 지식을 추구함으로 지상의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는 헛된 소망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종교다. 그 신념에서 나온 억압, 착취, 해방, 인권, 혐오, 차별과 같은 교리적 신조어들은 추종자를 세뇌하기 위한 주술과 같다. 따라서 공산사회주의는 하나의 종교요 그에 따른 교리들이 주술인 것이다. 맑스 이래로 이 우상종교에 빠진 이들이 세상에 넘쳐나고 있다. 대한민국도 직간접적으로 그 희생양이 적지 않다. 이 종교가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옷을 갈아입으며 전 세계를 파멸과 죽음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깨어나야 대한민국이 산다 필자는 최근 초대 교회 기독교 유적지 탐방을 다녀왔다. 바울의 선교지를 살피며 복음전파를 위한 바울의 정공법에 놀랐다. 초기 기도처 대부분이 거대한 우상신전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유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마지막 권면에서 보듯 바울은 이단과의 싸움과 영적 분별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영혼 구원과 교회의 파수는 바울의 중대한 사명이었다. 사도 바울과 비교해 볼 때 오늘의 목회자의 태도는 어떨까? 목숨을 내걸고 진리와 교회를 파수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상황이 위중함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교회는 정치문제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해. 골치 아픈 일을 일부러 만들어 교회로 갈등에 빠지게 할 필요는 없어. 교인들이 나가면 어떻게 해. 우리교회는 특정 지역 사람이 많아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조용히 있고 싶어. 나라 구하는 일은 남이 다 알아서 해주겠지.” 공산사회주의자들이 이 사회와 한국교회에 칼을 들이미는데도 왜 교회 목회자들은 침묵하는 것일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본다. (1) 좌익에 대한 목회자들의 무지가 한 몫을 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아무래도 성경과 신학에 익숙하다. 세상학문을 배설물로 표현한 바울의 영향(?) 탓인지 몰라도 일반학문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 그로 인해 정치사상이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적 깊이가 약하다. 그나마 있는 지식도 좌익에 의해 심겨진 왜곡된 지식이 전부라 목회자의 좌경화는 필연적인지 모른다. (2) 성경과 성령의 영향에 의한 목회자들의 착한(?) 성정도 한몫을 한다. 목회자들은 싸움닭인 좌파들과 달리 웬만하면 싸움을 피하려 하며, 정치적 문제에 대해 공적으로 나서는 것에 극히 꺼린다. 프란시스 쉐퍼가 학문 중에 제일 늦게 반응하는 것이 신학이라 말했듯이, 영적 흐름에 제일 먼저 반응해야 할 목회자들이 제일 늦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북한이 공산화될 때 북한교회가 한 행동은 달랑 성명서 한 장 발표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공산화되었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그런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교회 지도자들이 일어나야겠다 결단할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늦은 때다. 사도 바울 같으면 이 시대의 목회자처럼 행동할까? 무신론적 인본주의요 우상종교인 공산사회주의에 동조하고, 교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침투한 ‘공산사회주의 이리’일 것이다. 지금은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때다. 이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다. 시대를 거스르는 쓴 소리를 해야 할 때다. 오늘도 ‘자유’와 ‘개인’의 소중함을 아는 홍콩의 젊은이들은 땀과 피를 흘리고 있다. 경찰에 구속된 젊은이들이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저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이들이 누구일까? 그들은 1997년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중국의 사탕발림에 박수친 지금의 50-60대 부모세대들이다. 그들의 오판에 의한 고통이 고스란히 후손들의 몫이 되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절대 공존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반드시 어느 한편으로 통일되게 되어 있다. 홍콩이 그 위기의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부모세대의 오판은 다음세대에게 지옥의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경제와 안보가 붕괴되고, 패스트트랙 3법에 의한 전체주의 독재사회가 되어감에도, 다음세대들이 왜곡된 역사와 사상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의 홍위병과 서구 PC의 좀비로 양육되고 있음에도, 나라꼴이 제2의 베네수엘라가 되어감에도 지금의 이 자리가 좋사오니 침묵하고 안주한다면 그 사람은 참된 목회자라기보다 사탄에게 영혼을 판 사악한 광대다. 좌파 정부의 거짓 평화쇼와 분배라는 이름의 몇 푼의 동전에 미소 짓고, 고려연방제의 찬양대가 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그동안 침묵하고 안주했던 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영적 지도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닫힌 문 앞에서 왜 우리에게 지옥을 가져다주었느냐는 후손들의 원망소리에 비겁자의 침통한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촛대도 불신앙이 역사하는 곳에서는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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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8
  • "총신대학교 성희롱 사건 무엇이 문제인가?"
        총신대학교 성희롱 사건 무엇이 문제인가?강의 중 표현을 모두 성희롱 몰아가야 하는가?              최근 총신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대자보를 붙여서, 자신들을 가르치던 교수 다수가 ‘성희롱’을 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학생들이 대자보 형식을 통하여 주장하는 바는, 당사자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사죄하고, 합당한 징계절차를 통해 책임질 것, 수업권 보장을 위하여 대책을 마련할 것, 처리과정을 대내외적으로 공개하고 매뉴얼을 구축할 것 등을 주장하고 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성 희롱’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면서, 상당히 사회적인 문제로 이슈가 되고 있다. ‘성 희롱’에 대하여 <시사상식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성에 관계된 말과 행동으로 상대방에게 불쾌감, 굴욕감 등을 주거나 고용상에서 불이익을 주는 등의 피해를 입히는 행위’라고 정하고 있다. 또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상대편의 의사에 관계없이 성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말이나 행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당연히 타인의 인격과 손상되기 쉬운 감정을 존중하고, 노골적으로 성적 수치심이 들도록 하는 언행은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뚜렷한 기준보다는 상대적인 감정에 의하여 ‘성희롱’으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서 그 시비가 좌우된다는 것이 아쉽다. 총신대에서 학생들이 자기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강의 중 표현들이 ‘성희롱’이라서 그 교수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징계를 요구하는 내용을 살펴보아도, ‘성희롱’을 위한 목적하에서 표현된 것이 아니라, 강의를 위해 생물학적, 과학적인 내용으로 표현된 것들도 ‘성희롱’으로 몰아간다면 학생들이 유효적절하게 강의를 듣게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당사자들 가운데 여러 번에 걸쳐서 학생들에게 ‘사과’했다는 보도를 보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도 상대편이 ‘성희롱’으로 받아들일 표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유일하게 반박하는 성명을 낸 이상원 교수의 해명을 살펴보면, 모든 강의 내용을 ‘성’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성희롱’으로 공격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총신대생들이 ‘피해자’이며, 동시에 권리를 쥐고(해당 교수들의 징계, 학교에 대한 요구 등) 있는 상황인 듯하다.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 첫째는 학생들이 자신들을 가르치는 스승인 교수들에 대하여 학교에 책임과 징계를 요구했다면,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먼저 언론에 공개하고 외부에서 신학대를 공격하는 것은 선지학교 공동체의 명예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본다. 두 번째는 강의를 위한 과학적인 근거와 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성희롱’으로 몰아, 스승의 교수권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성희롱’의 개념은 이런 것까지도 무제한적으로 제동을 걸고 있다고 본다. 학생들은 지식으로뿐 만이 아니라, 사회적 상황, 특히 성경적 기준에 의한 배움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세 번째는 총신대학교가 다시 한국교회에 근심을 끼치고, 이미지를 실추하는 행위를 자제해 주기를 바란다. 잘 알다시피 총신대 내부의 문제 때문에 한국교회에 입힌 상처는 컸다. 이제 총신대가 총장이 바뀌면서 회복 단계에 있어 지금은 그 과정과 결과가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본다. 그리고 총신대학교에서도, 이에 대한 시시비비를 가리되, 급진적 페미니즘 차원이 아닌, 가르침과 배움의 선을 분명히 하고, 성경적 가르침이 분명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서 세상의 빛이 되는 젊은 지성을 회복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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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8
  • (이창엽 선교사칼럼)생명의 근원 하나님
                                                   생명의 근원 하나님  물질세계의 근원은 물, 불, 흙, 공기이다. 고대에는 헬라의 철학자 탈레스는 물질의 근원을 물이라 했고, 헤라이클레이토스는 만물의 근원을 불로 봤고, 어떤 이는 흙이라고 주장을 했다. 오늘날은 물리학과 화학의 발달로 모든 물질의 구성요소가, 원자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생명의 근원과 물질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물질의 근원을 생명의 근원인 양 남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한옥건축 근원-땅, 생명 근원-통로 흙 vs 생명 근원-하나님, 축복, 은혜 통로-흙으로 빚은 인간  조선 후기(영조27)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복거총론(卜居總論)에 당시 조선사회의 마을과 거주지의 이상적인 조건으로 지리(地理)·생리(生利)·인심(人心)·산수(山水)를 제시하고 있다. 땅은 흙이다. 흙 속에는 수많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면서 흙냄새가 난다. 한국의 점토는 물이 스며들어도 중국이나 일본의 흙에 비해 부피가 별로 팽창하지 않는다. 달 표면의 흙에는 암석가루뿐인데, 지구의 표면인 흙에는 물과 공기와 유기물과 암석가루인 흙 알갱이가 합쳐서 있다. 보통생물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증식할 수 있는 데 비해 무생물은 그럴 능력이 없다. 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도 증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단 무생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미생물들이 살고 있기에 흙을 “생명의 근원”이라고 한다. 엄격히 말해 흙은 생명 근원의 통로이고 건축의 근원이다. 건축물은 모든 생명 근원의 통로인 땅(흙)에 뿌리를 둔다. 현행건축법에서도 건축물은 토지에 정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에 수상가옥이나 나뭇가지 위에 올려놓은 고상 주거는 현행건축법상 건축물로 인정받을 수 없다.   낙수장 (미국 펜실베이니아, 카우프라만 주택)  * 세계적인 건축물로 널리 알려졌는데 사람은 거주하지 않고 있으며 관광객들만 찾아오는 상황이다. 밖에서 쉼 없이 흐르는 물소리와 다습한 기류 때문에 그 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좀처럼 휴식을 취할 수 없으며, 대화 소리도 잘 들리지 않고, 실내습도까지 필요 이상으로 높아 피로를 쉽게 느끼게 된다. 물소리는 듣는 사람의 심리상태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화되어 들린다. 낮에는 시원한 폭포수 소리로 들리지만 혼자 있는 고적한 밤에는 마치 귀신 소리처럼 음산하게 들리기도 한다. 결코, 편안한 집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TIP) 생명의 근원과 근원의 통로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 지라(창 2:7)(대한성서공회,2019)          
    • 오피니언
    • 이창엽선교사
    2019-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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