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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2.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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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월교회2.png

 

 

올해는 한국전쟁 70주년이 되는 햅니다. 민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낸 기독교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GOODTV는 한국전쟁 70주년을 맞아 전국의 순교현장을 찾는 기획보도를 준비했습니다. 첫 순서로 국내 최대 순교지인 전라남도 영광에 다녀왔습니다. 특히 염산면에 위치한 야월교회는 전교인이 순교한 교회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차진환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77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빤짝이는 염전이 두 눈을 사로잡습니다. 일명 ‘소금밭 천지’ 영광군의 염산면 일댑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 알고 보면 한국전쟁 당시 이 지역 교인들의 피가 뿌려진 곳입니다.

(심재태 담임목사 / 염산교회)
“순교 형태를 보면 5명은 생수장을 당하고요. 나머지 60명은 생매장을 당합니다. 교회도 불타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야월도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안 남게 돼요.”

야월교회 성도들은 1950년 9월 말부터 2달여 동안 65명 전원이 순교하게 됩니다.

당시 10살 어린 나이였던 최종한 장로는 그때 끔찍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최종한 장로 / 야월교회)
“우리 가정은 유교사상이 투철해서 우리 아버님도 저 사람(인민군)에 끌려가가지고 죽지 않고 살아서 내가 산 거야. 인민재판. (맞아요 인민재판을 했어요) 인민재판에 끌려가가지고 우리 아버지 저놈이 살려줬어. 그래가지고 내가 산 거야. 아이고 6.25(전쟁) 생각만 해도...”

전교인이 목숨을 잃게 되자 ‘예수를 믿고 망한 동네’란 인식이 퍼지게 되고 교회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은 뚝 끊기게 됩니다. 살아남은 교인이 없기 때문에 당시 흔적을 더듬기 어려운 상황. 1988년 배길양 원로목사가 부임하고 나서야 38년 전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좇게 됐습니다.

(심재태 담임목사 / 염산교회)
“(순교자들의)명단을 확정하기 위해 (면사무소에) 확인하러 가는데 깜작 놀란 거예요. 1950년도에 순교했는데 90년도가 다 돼서 확인했을 때 아직도 사망신고가 안 된 순교자들이 있더라는 거죠.”

죽는 순간에도 가해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야월교회 순교자들. 이들의 피는 염산면에 뿌려져 사랑의 열매를 맺게 됐습니다. 당시 인민군 측에 섰던 주민들 중 일부 후손들이 회개하고 믿음의 길을 걷게 된 겁니다.

순교자들의 신앙과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독교인순교기념관에는 ‘맞잡은 손’이란 조형물이 있습니다. 순교의 아픈 상처를 담은 손과 하나님의 손이 만나 용서와 화해로 나아간단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70주년인 올해, 죽음 앞에서 믿음을 지켰던 이들의 순교정신을 기억하도록 교인들의 관심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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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의 발자취를 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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