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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천 번 망설이게 한 시청 앞 설교
    제주새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2014년 버스정류장에서 전도활동을 펼친 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개척을 하고 2년이 지난 2007년 5월이었다. 말씀을 읽는데 문득 ‘교회이름을 변경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당시 교회이름은 ‘제주교회’였다. 교단마다 제주교회가 하나씩은 있었는데, 심지어 이단도 제주교회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이사야서 60장을 묵상하는데 이 말씀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향한 예언이라는 감동이 있었다. ‘이거다.’ 그래서 교회명을 ‘새예루살렘’으로 하고 교단본부에 명칭변경 신청을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의견이 의외였다. “너무 이단스럽지 않습니까.”다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그것은 나의 이름이다’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고 보니 이긴자 베뢰아 다락방 하나님의교회 등 성경의 좋은 이름을 이단이 가져다가 제 것처럼 사용한다. 그래서 오히려 교회가 꺼리는 것이 됐다. 하나님의 것을 교회가 되찾아야 하지 않겠나.’교회 명칭을 변경하고 장소도 옮겨야겠다는 마음을 주셨다. 성도들에게 2008년 4월 교회를 옮기겠다고 선포했다. 건물주에게도 통지했다. 그러나 계약 만료 1주일 전까지 임차할 장소는 구해지지 않았다.벽에 붙여 놓은 제주도 지도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했다. “주님 이 넓은 제주에 이 작은 교회 하나 갈 곳이 없습니다. 다들 교회를 꺼립니다.”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음성이 들렸다. 마치 누가 내 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깜짝 놀라 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그때 아내도 사택에서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어떤 페이지의 하단을 보라는 감동을 주셨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차를 타고 지역정보지를 들여다보며 전화를 하고 다녔다. 결국, 제주시청이 내려다보이는 건물을 임차했다. 계약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무심코 전화해서 계약한 장소가 아내가 기도 때 보았던 정보지 하단에 있었던 것이다.2008년 4월 교회를 이전했다. ‘주님,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신다고 깨닫게 됐다. 먼저는 이 땅을 위한 중보기도, 그리고 시청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이었다.기도야 교회에서 하면 되지만, 제주시청 앞에서 전도가 아니라 설교하라는 것은 순종하기가 참 어려웠다. 주님은 이사야 62장 10절을 보여주시며 성문에서 이 땅의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올 길을 닦는 것을 말씀하셨다. 또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이 야외에서 많은 설교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 목사님도 야외에서 설교하지 않았던가.먼저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제주와 국가, 열방을 위한 중보기도를 시작했다. 그 시간은 계속 깊어졌고, 하나님께서 중보기도자들을 보내주셔서 10명 이상이 전심으로 기도했다.문제는 시청 앞 설교였다. 두려웠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주신 마음에 순종은 해야 하겠기에 주일 성도들에게 “2009년 9월부터 매주 토요일 1시에 시청 만남의 광장에서 설교하며 전도하겠다”고 선포했다.9월 첫째 토요일이 됐다. 새벽부터 수천 번 망설이고 고민하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시청으로 향했다. 따라와 중보기도 하겠다는 아내도 마다했다. ‘거참,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시외버스가 다니는 정거장 앞 벤치에서 30분을 망설이다가 신발을 벗고 올라섰다. 그다음부턴 기억이 나지 않는다. 30분 동안 목이 쉬도록 무엇인가 외쳤다. 사람들이 수군댔다. 여기저기 욕이 나왔다. 그래도 순종했다. 그날부터 꼬박 2년 동안 매주 토요일 그 벤치에 올랐다.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그날 이후 그렇게도 전도가 되지 않던 교회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순종할 때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그렇게 체험했다.             
    • 오피니언
    • 기고.연재
    2020-03-18
  • ‘거지 나사로’를 돌보다
      고웅영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목사가 2014년 4월 ‘24시간 연속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교회는 2012년부터 교회 절기 때마다 24시간 기도회를 진행했다.  제주 개척의 첫 3년 동안 어린이와 알코올 중독자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그룹은 육적·영적인 장애를 지닌 이들이었다.등이 굽고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자매가 있었다. 부모는 자매를 집에 가두어 키웠다. 학교도 보내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녀를 만났을 때는 40대의 나이로 시내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었다. 집에서 TV를 보며 한글을 배웠고, 홀로 집안일을 해내는 총명한 자매였다.그는 영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어둠이 엄습할 때면 숨을 쉬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나와 아내가 함께 기도하면 어둠 속에서 빠져 나왔다. 자매는 복음을 눈물로 받았고 말씀의 양육도 받았다. 예배 때마다 자매를 업고 교회를 오르내리는 것은 교회 형제들의 수고였지만,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기쁨이 더 컸다.버거씨병을 앓는 50대 형제도 있었다. 흡연으로 인해 혈관에 염증이 생겨 혈관이 막히고 괴사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우리가 만났을 때는 두 다리가 무릎 위까지 절단된 상태였다. 그는 형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수백 평에 달하는 대궐 같은 집이었지만, 다른 가족과 완전히 단절된 채 뒷방에 버려진 상태로 살고 있었다. 부잣집의 문에 거하는 ‘거지 나사로’ 같은 이였다.2006년 여름 육지에서 온 선교팀과 함께 방을 청소하고 벽지를 바르고 장판을 까는데 꼬박 3일이 걸렸다. 그런 난리 중에도 가족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 이 형제를 업어 옮기는 것도 우리의 사역이 됐다.전도하면서 30대의 범상치 않은 한 자매를 만났다. 눈 마주치기를 피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죽은 동물의 사체를 보면 그 동물의 혼이 저에게 달라붙어 온몸이 아파요.” 그야말로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당하는 자매였다.자매에게 복음을 전해 영접게 했다. 귀신을 쫓는 기도를 하자고 했는데 거절하는 게 아닌가. 한참을 설득하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자신에게 악한 영이 들어온 후 남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해 지금은 매춘을 통해 생활한다고 했다. 귀신이 떠나면 생계가 어려워지니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사는 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했다.성경책을 주고 이틀 후에 함께 기도할 날을 약속했다. 사단은 이 자매를 놓아주기를 싫어한 것일까. 이틀 만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듯 이사를 가 버린 뒤였다.전도로 만난 50대 후반의 알코올중독 형제는 술만 마시면 나를 불러 놓고 자살하겠다고 밤새 울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형제도 그렇지만 밤새도록 같은 이야기를 수백 번 듣는 나도 매우 괴로웠다.기도 중에 주님이 지혜를 주셨다. 형제를 찾아가 함께 바람을 쐬러 가자고 했다. 제주 애월읍 쪽의 한적한 해안도로로 갔다. 그는 “20년 만에 바닷가에 왔다”고 했다. 우리는 절벽이 아름다운 해안에 내렸다. 들뜬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오늘 제가 형제님 소원을 들어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시신은 잘 수습해 드리겠습니다.”형제는 화를 내면서 한참 욕설을 퍼부었다. “그거 보세요. 형제님은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은 겁니다.” 그날 이후 자살하겠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예배에 잘 나왔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한다. 누구나 잘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게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잘 사는 길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그것을 알려주고 함께 품으라고 말씀하신다.주님은 이 땅에 버려진 사람, 버려진 영혼이 많다고 하셨다. 주님은 이러한 영혼들에 관심이 있으시고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다. 아직 우리는 예수님께 배울 것이 많이 남아있다.         
    • 오피니언
    • 기고.연재
    2020-03-11
  • ‘조폭’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
    2011년 6월 제주 새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지하상가 예배당에서 열린 주일예배에서 뜨겁게 찬양하고 있다.  교회 문을 열고 실전이 시작됐다. 제주에서 3년간 전도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도시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이들이었다. 하나님은 제주의 영혼들을 품고 기도하게 하셨다.2005년 개척하고 처음 전도로 온 이들은 어린이였다. 여름이 지났을 때 20여명이 모였다.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깨진 가정에서 편부모나 조부모와 살고 있었다. 매일 오후 5시 이들과 예배를 드렸다. 찬양하고 성경 한 장을 가르쳤다. 사모는 매일 간식이나 저녁을 준비했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은 하교 후 교회에 와서 저녁 늦게까지 있다가 집에 갔다.그런 예배가 1년 넘게 지속했다. 그런데 2년 후 갑자기 모임이 멈췄다. 그것도 한날한시에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교회를 떠났다. 큰 충격을 받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어린이 대부분이 초등학교 5·6학년이었는데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제사에 참여할 나이가 된 것이다. 또 주일에 학원을 가야 한다고 했다. 모든 아이가 썰물처럼 갑자기 교회를 떠났다. 이 일로 주님 앞에 엎드렸다. 주님은 제주의 깨어진 가정의 아픔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뿌려진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기도할 때 그들에게 심어진 말씀의 씨앗이 열매 맺기를 기도하고 있다.두 번째 무리는 2005년 7월 전도된 3명의 성인이다. 동거 남녀와 60대 남자였는데 모두 알코올중독자였다. 주일에 승합차로 데리러 가면 이미 소주 두어 병을 마신 상태였다. 승합차와 예배당이 술 냄새로 진동했다. 60대 남자는 이혼하고 집에 방화했다가 교도소에 다녀온 상태였다. 술만 마시면 나를 불러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자살하겠다고 울었다. 함께 울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동거 남녀는 무연고로 간경화 말기 환자였다. 혼수상태가 오면 내가 보호자 신분으로 병원에 데려가곤 했다. 동거 남녀는 그해 11월과 12월에 각각 하나님 나라로 갔다. 교회 나온 지 4개월쯤 된 10월 주일이었다. 동거남녀 중 남자가 말끔하게 옷을 입고 술도 마시지 않은 채 승합차에 탔다.“목사님, 저 오늘부터 술 끊고 하나님 잘 믿어 볼랍니다.” “형제님, 정말 기적입니다. 오늘부터 세례교육을 합시다.” 그 날부터 4주간 세례 문답 공부를 했다. 거짓말처럼 그는 30년 이상 매일 네댓 병을 마시던 술을 끊었다.4주째 토요일 저녁이었다. “고 목사님이십니까. 잠깐 병원에 오셔야겠습니다.” 제주 한마음병원 중환자실이었다. 직감으로 주님이 남성을 부르고 계심을 알았다. 세례기와 가운을 챙겼다.중환자실에는 지인 몇 명이 있었다. 가운을 입고 세례식을 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세례 문답에 눈짓과 작은 고갯짓으로 응답했다. 떨리는 손으로 안수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고 선포했다. 기도하는 동안 그는 조용히 하나님 나라로 갔다.문제는 장례를 치를 비용이었다. 일단 빈소를 정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어떻게든 장례를 치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월요일 아침 장례식장에 갔는데 초입부터 화환이 줄지어 있었다. ‘대단한 인물이 죽었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그 화환은 성도의 빈소로 이어져 있었다. 정장 차림의 청년 수십명이 손님을 받고 있었다.임종한 성도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모두 어린 시절 집을 나갔고 큰아들은 조직폭력배였다. 과거 제주에 큰 폭력 사건이 있었는데, 큰아들이 모든 걸 뒤집어쓰고 수감 중이었다. 수감 중 부친의 부고가 전달되자 보스가 약속했다고 한다. “네 아버지 장례는 내가 치른다.” 그렇게 인원을 총동원했다 한다.이틀 동안 다섯 차례 장례예배를 드렸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 출관하는 날 17대의 검은색 세단이 장례행렬을 호위했다. 주님은 장례의 상주가 돼 주셨다. 무엇보다도 평생 술과 사단에 매여 있던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데 제주새예루살렘교회를 사용해 주셨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가장 존귀한 한 영혼을 구해내는 것이다.                     
    • 오피니언
    • 기고.연재
    2020-03-04
  • 성도·건물 없는 ‘서류상 교회’ 부임
    고웅영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목사(앞줄 오른쪽 세 번째)와 성도들이 지난해 9월 제주 서귀포항에서 제주 복음화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제주 목회는 하나님께서 여러 개의 관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5년 개척 때 일이다. 제주새예루살렘교회 개척의 문은 수월하게 열린 게 아니었다. 2002년과 2003년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를 둘러봤다. 2004년은 부교역자 시절 청년부와 전도여행을 하면서 제주를 찾았다. 청년 45명과 2004년 1월 제주 전도여행을 했다. 4개의 팀으로 나눠 미션을 주고 제주의 여러 곳에서 예배하고 전도했다. 그때 제주 감리교회 목회자들을 만나 제주 목회의 비전을 나눴다.목회자들은 부정적 반응을 내비쳤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뿐 아니라 제주 전체 교회의 절반 이상이 미자립 상태입니다. 또다시 미자립 개척교회를 세우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이런 반응이 나오자 두 가지 감사가 터져 나왔다. “주님, 제주의 교회와 영적 상황을 실제로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교사로 헌신했던 청년 시절 기도대로 선교지와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불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전도 여행을 다녀온 후 하나님은 제주를 향해 더 기도할 마음을 주셨다. 개척과 목회의 문이 열리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부터 영적 도전들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2004년 가을 목사고시가 있었는데, 한 달 전부터 아내에게 혈변과 진통이 찾아왔다. 병원에선 대장의 자가면역 관련 질환인데 평생 안고 가야 할 난치병이라 했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대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난감했다. 교회 사역은 계속해야 하고 목사고시는 다가오고 어린 두 자녀는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다. 첫째 아이는 할머니가, 둘째 아이는 교회 권사님께서 맡아 주셨다. 아내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낮에는 교회 사역을 하고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아내의 병상 옆에서 돌보며 목사고시를 준비하는 생활이 시작됐다.모두가 잠든 밤에도 아내는 수십 차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혈변을 봤다. 아내의 진통이 잦아들면 병원 로비의 수납창구 불빛 아래서 공부했다. 졸지에 아이들도 아내도 나도 어떤 시험 앞에 서 있었다.더 전심으로 하나님을 붙잡는 시간이었다. 목사고시를 보러 대전으로 내려가던 날 아내의 혈변이 멈췄다. 감사하게도 목사고시에 합격하고 돌아온 날 아내는 퇴원했다. 며칠 후 가족은 다시 모였다. 또 한 가지 도전은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교회 담임목사님이 갑작스럽게 임지를 옮긴 것이었다. 개척하면 힘이 돼주시겠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기대도 할 수 없게 됐다. 주님은 사람과 교회를 의지했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셨다. 제주 감리교회의 개척 불가 입장도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 제주지역 교단 관계자는 새로운 미자립교회가 또다시 세워지는 것이 당시 제주선교 상황에 맞지 않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2005년 4월에 목사안수식이 예정돼 있었다. 교단법에 따라 그 전에 담임할 교회가 결정되지 않으면 안수 자체가 무산되는 상황이었다.그해 1월 황급히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제주 지역 교단 관계자들을 만나 이러한 상황을 알리고 간청했지만, 답은 같았다. 그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목사님, 혹시 감리교 제주지방에 서류상으로는 있지만,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있습니까.” “아, 한 교회가 2년 전부터 목회자 미파송 상태에 있습니다. 전임 목회자가 경제적, 영적으로 타격을 받고 제주를 떠났습니다. 성도도 목회자도 교회 건물도 없는 서류상 교회죠. 한 달 후 지방회에서 영구 폐지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 교회를 맡으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제주에 오고 싶습니까.” “네.” “좋습니다.”하나님께선 새로운 방법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없어지는 것을 막으셨다. 그렇게 개척의 문이 열렸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도 나름대로 과정이 있고 도전이 있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 실로 주님은 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시다.                           
    • 오피니언
    • 기고.연재
    2020-02-19
  • 하나님의 창고 연 비결 ‘십의 3조’
      고웅영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목사가 2012년 10월 성도들과 함께 제주 상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포기함으로 얻는 방법 중 세 번째는 소유의 포기다. 그동안 소유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2000년 아버지가 소천하셨을 때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빚을 물려받지 않으려고 상속포기서까지 썼다. 1990년 대학 시절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신문 배달, 손세차장 세차, 일용직 등으로 일했고 우체국 택배센터와 어린이의류 물류센터에소 일했다. 2002년 감리교신학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시작한 일은 무보수 자비량 사역을 하는 선교단체 간사였다.당시 나는 가난하지 않았고 부요하지도 않았다. 많은 간사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기도하면서 섬기던 시절이었다. 기도해보고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을 찾아가 “내가 당신에게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기회를 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찾아간 분의 95%가 후원자와 중보자가 됐다. 하나님은 아굴의 잠언처럼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셨다. 1999년 전도사로 사역할 때 첫 월급이 40만원이었다. 당시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신대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도 가난하지 않았다. 개척 후 6년 차부터 교회에서 목회비를 받았다. 그 6년 동안 자녀가 셋이 됐고 하나님은 더 풍성하게 채워 주셨다. 비결은 나눠주는 훈련에 있었다. 간사로 섬기던 시절 하나님께서는 후원받은 헌금 일부를 다른 간사들을 위해 헌금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끄러울 정도로 아주 적은 금액을 매달 후원했다. 전도사 시절에도 다른 간사 가정과 선교사 가정을 후원했다. 그때 우리 가정이 세운 헌금원칙은 십의 3조였다. 십의 1조는 하나님께, 십의 1조는 선교사역에, 십의 1조는 구제가 필요한 이들에게 헌금했다.하나님의 비밀창고는 그때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월급이 80만원이었던 전도사 시절 400만원 가까운 대학원 등록금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들로부터 계속 채워졌다. 제주도에 교회를 개척할 때 임차계약금 300만원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신대로 기도의 후원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전화 한 통화로 20분 만에 계약금을 치렀다. 나머지 잔금 1700만원은 제주로 이삿짐을 싣고 내려오는 날 아침에 몇 분의 권사님들이 모아 주셨다.개척하고 사용하던 승합차가 2007년 도로 한가운데 멈췄다. 600만원을 주고 산 중고차였는데, 견적만 170만원이 나왔다. 그날 미국에서 제주도로 손님이 찾아왔다. 10년 전 간사 시절 2만원씩 딱 1년간 헌금했던 선배 간사 가정이었다. 사업차 한국에 왔다고 했다. 식사 후 봉투 하나를 놓고 갔다. 열어보니 170만원이었다.2008년 교회를 옮기고 강대상을 바꾸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강대상이 200만원이었다. 한두 번 뵀던 다른 교단 장로님이 찾아오셨다. “교회를 옮기고 무엇이 필요합니까.” “강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얼마 후 베트남 선교사로 나가신다며 봉투를 두고 가셨다. 200만원이었다. 육지의 대형교회에서 제주도로 청년수련회를 왔다. 제주공항에서 수련회 장소로 안내하는 일을 했다. 버스 안에서 제주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제주도에서 개척목회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을 30분 정도 나눴다. 그 교회는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가며 모든 헌금을 놓고 갔다. 개척 때부터 필요한 목회 서적이 있으면 목록을 적어 놓고 “주님 매달 책을 사주는 후원자를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청년부 제자 중 한 형제가 직장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15년간 매달 필요한 책을 보내주고 있다.제주새예루살렘교회는 아직도 임차 교회다. 하지만 지난해 8월 하나님께서 4436㎡(1341평) 예배당 부지를 주셨다. 대출이자만 내고 있는데, 건축의 나머지 과정은 주님의 때에 풍성하게 이뤄주실 것을 알고 기쁘게 기다리고 있다. 현재 6개의 지역교회와 국내 선교기관 4곳, 해외 선교지 8곳을 후원하고 있다. ‘포기함으로 얻는 법’을 배우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최고의 보상이고 상급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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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연재
    2020-02-12
  • 섬들이 주를 앙망하리라
    고웅영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목사(두 번째 줄 왼쪽 첫 번째)가 2016년 4월 제주 한경면 차귀도 포구에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인생이든 목회든 어느 시점에서 보면 많은 조각 모음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무의미한 파편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시간과 일상의 연속 선상에서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다. 많은 성도는 특별한 사건만 하나님의 역사와 개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그렇지 않다. 삶의 연속성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에 따른 결과로 삶과 목회가 이뤄진다.2005년 맨손으로 시작한 제주 목회에서 하신 하나님의 일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렇다고 주목할 만한 사역의 열매나 업적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는 성도들과 사역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은혜의 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나는 어린 시절 전통적인 장로교회에서 자라났다. 서울 신림동 미개발 지역에 있던 성림교회는 놀이터였고 모임 장소였다. 주변에 산이 있고 개울이 있고 과수원이 있고 밭이 그득했다. 교회는 미끄럼틀이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자연스럽게 보수적인 신앙을 형성하게 됐는데, 서울 미림중학교 3학년 때 했던 성령체험은 내 인생길을 바꿔놓았다.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한 내게 고입 연합고사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주님, 제발 고입 시험을 잘 치게 해주세요.’ 마음의 불안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동기가 됐다.매일 교회 종탑 아래 창고로 쓰던 방이나 계단에 앉아 기도했다. 수줍어서 넓은 기도실에서 기도할 용기는 없었다. 시계추처럼 집으로 가기 전 나만의 기도 처소를 들러야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봄이었던 것 같다. 종탑 아랫방이 잠겨 있었다. 계단 끝자락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다. “울랄라라 알랄라랄.” 기도하는데 갑자기 내 의지와 다르게 혀가 꼬이며 방언이 터져나왔다. ‘아, 이렇게 크게 기도하다가는 계단을 타고 소리가 퍼져서 누군가 올라오지 않을까.’ 걱정이 스쳤지만 혀와 입술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었다. 기도하는 동안 마음의 기쁨과 평안이 임하는 것을 느꼈다.10분쯤 지났을까 했는데 기도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1시간이 훌쩍 넘었다. 그날 이후 종탑 아래 계단기도실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됐다. 주님의 은혜로 200점 만점의 연합고사에서 180점을 맞았다. 성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셨다. 작은 믿음으로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을 맛보게 해 주셨다.고등부 시절 또 한 번의 은혜를 경험했다. 중증 축농증으로 고생하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교회 다음으로 많이 간 곳이 이비인후과 병원이었다. 심하면 이틀에 한 번 막힌 코를 뚫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코에 가득 찬 고름을 뽑아내려고 젓가락 길이의 기구를 코 안쪽까지 집어넣던 기억이 생생하다.그 시절은 거의 입으로 숨을 쉬었다. 병원에선 코 안쪽 뼈가 휘어서 수술해야 좋아질 수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교회 학생회장을 맡았다. 3일 동안 금식하며 수련회를 인도했다. 수련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에 이런 감동이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치료해 주셨다. 이제 축농증은 끝이다.’ 훗날 어머니는 내가 수련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하나님이 제 코를 치료해 주셨어요.”나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축농증으로 이비인후과를 간 적이 없다. 축농증의 치유를 위해 금식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금식에 선하신 하나님은 치유로 보상하셨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목적이 아닌 금식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배웠다.청년 시절 하나님은 나를 두 번 살려주셨다. 1990년 주일 청년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였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인도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다. “끼이익.” “쿵!” 갑자기 자동차의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오른편에 승용차가 서 있었다. 운전자가 놀란 눈으로 뛰쳐 나왔다. “학생, 괜찮아?”나중에 알고 보니 차도와 인도 사이를 걷던 나를 승용차가 쳤다. 이후 자동차의 보닛 위로 굴렀고 운전자의 옆에 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생명이 위험에 처한 줄도 모르게 천사의 보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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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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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천 번 망설이게 한 시청 앞 설교
    제주새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2014년 버스정류장에서 전도활동을 펼친 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개척을 하고 2년이 지난 2007년 5월이었다. 말씀을 읽는데 문득 ‘교회이름을 변경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당시 교회이름은 ‘제주교회’였다. 교단마다 제주교회가 하나씩은 있었는데, 심지어 이단도 제주교회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이사야서 60장을 묵상하는데 이 말씀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향한 예언이라는 감동이 있었다. ‘이거다.’ 그래서 교회명을 ‘새예루살렘’으로 하고 교단본부에 명칭변경 신청을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의견이 의외였다. “너무 이단스럽지 않습니까.”다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그것은 나의 이름이다’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고 보니 이긴자 베뢰아 다락방 하나님의교회 등 성경의 좋은 이름을 이단이 가져다가 제 것처럼 사용한다. 그래서 오히려 교회가 꺼리는 것이 됐다. 하나님의 것을 교회가 되찾아야 하지 않겠나.’교회 명칭을 변경하고 장소도 옮겨야겠다는 마음을 주셨다. 성도들에게 2008년 4월 교회를 옮기겠다고 선포했다. 건물주에게도 통지했다. 그러나 계약 만료 1주일 전까지 임차할 장소는 구해지지 않았다.벽에 붙여 놓은 제주도 지도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했다. “주님 이 넓은 제주에 이 작은 교회 하나 갈 곳이 없습니다. 다들 교회를 꺼립니다.”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음성이 들렸다. 마치 누가 내 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깜짝 놀라 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그때 아내도 사택에서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어떤 페이지의 하단을 보라는 감동을 주셨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차를 타고 지역정보지를 들여다보며 전화를 하고 다녔다. 결국, 제주시청이 내려다보이는 건물을 임차했다. 계약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무심코 전화해서 계약한 장소가 아내가 기도 때 보았던 정보지 하단에 있었던 것이다.2008년 4월 교회를 이전했다. ‘주님,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신다고 깨닫게 됐다. 먼저는 이 땅을 위한 중보기도, 그리고 시청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이었다.기도야 교회에서 하면 되지만, 제주시청 앞에서 전도가 아니라 설교하라는 것은 순종하기가 참 어려웠다. 주님은 이사야 62장 10절을 보여주시며 성문에서 이 땅의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올 길을 닦는 것을 말씀하셨다. 또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이 야외에서 많은 설교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 목사님도 야외에서 설교하지 않았던가.먼저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제주와 국가, 열방을 위한 중보기도를 시작했다. 그 시간은 계속 깊어졌고, 하나님께서 중보기도자들을 보내주셔서 10명 이상이 전심으로 기도했다.문제는 시청 앞 설교였다. 두려웠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주신 마음에 순종은 해야 하겠기에 주일 성도들에게 “2009년 9월부터 매주 토요일 1시에 시청 만남의 광장에서 설교하며 전도하겠다”고 선포했다.9월 첫째 토요일이 됐다. 새벽부터 수천 번 망설이고 고민하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시청으로 향했다. 따라와 중보기도 하겠다는 아내도 마다했다. ‘거참,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시외버스가 다니는 정거장 앞 벤치에서 30분을 망설이다가 신발을 벗고 올라섰다. 그다음부턴 기억이 나지 않는다. 30분 동안 목이 쉬도록 무엇인가 외쳤다. 사람들이 수군댔다. 여기저기 욕이 나왔다. 그래도 순종했다. 그날부터 꼬박 2년 동안 매주 토요일 그 벤치에 올랐다.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그날 이후 그렇게도 전도가 되지 않던 교회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순종할 때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그렇게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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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8
  • ‘거지 나사로’를 돌보다
      고웅영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목사가 2014년 4월 ‘24시간 연속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교회는 2012년부터 교회 절기 때마다 24시간 기도회를 진행했다.  제주 개척의 첫 3년 동안 어린이와 알코올 중독자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그룹은 육적·영적인 장애를 지닌 이들이었다.등이 굽고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자매가 있었다. 부모는 자매를 집에 가두어 키웠다. 학교도 보내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녀를 만났을 때는 40대의 나이로 시내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었다. 집에서 TV를 보며 한글을 배웠고, 홀로 집안일을 해내는 총명한 자매였다.그는 영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어둠이 엄습할 때면 숨을 쉬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나와 아내가 함께 기도하면 어둠 속에서 빠져 나왔다. 자매는 복음을 눈물로 받았고 말씀의 양육도 받았다. 예배 때마다 자매를 업고 교회를 오르내리는 것은 교회 형제들의 수고였지만,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기쁨이 더 컸다.버거씨병을 앓는 50대 형제도 있었다. 흡연으로 인해 혈관에 염증이 생겨 혈관이 막히고 괴사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우리가 만났을 때는 두 다리가 무릎 위까지 절단된 상태였다. 그는 형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수백 평에 달하는 대궐 같은 집이었지만, 다른 가족과 완전히 단절된 채 뒷방에 버려진 상태로 살고 있었다. 부잣집의 문에 거하는 ‘거지 나사로’ 같은 이였다.2006년 여름 육지에서 온 선교팀과 함께 방을 청소하고 벽지를 바르고 장판을 까는데 꼬박 3일이 걸렸다. 그런 난리 중에도 가족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 이 형제를 업어 옮기는 것도 우리의 사역이 됐다.전도하면서 30대의 범상치 않은 한 자매를 만났다. 눈 마주치기를 피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죽은 동물의 사체를 보면 그 동물의 혼이 저에게 달라붙어 온몸이 아파요.” 그야말로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당하는 자매였다.자매에게 복음을 전해 영접게 했다. 귀신을 쫓는 기도를 하자고 했는데 거절하는 게 아닌가. 한참을 설득하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자신에게 악한 영이 들어온 후 남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해 지금은 매춘을 통해 생활한다고 했다. 귀신이 떠나면 생계가 어려워지니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사는 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했다.성경책을 주고 이틀 후에 함께 기도할 날을 약속했다. 사단은 이 자매를 놓아주기를 싫어한 것일까. 이틀 만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듯 이사를 가 버린 뒤였다.전도로 만난 50대 후반의 알코올중독 형제는 술만 마시면 나를 불러 놓고 자살하겠다고 밤새 울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형제도 그렇지만 밤새도록 같은 이야기를 수백 번 듣는 나도 매우 괴로웠다.기도 중에 주님이 지혜를 주셨다. 형제를 찾아가 함께 바람을 쐬러 가자고 했다. 제주 애월읍 쪽의 한적한 해안도로로 갔다. 그는 “20년 만에 바닷가에 왔다”고 했다. 우리는 절벽이 아름다운 해안에 내렸다. 들뜬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오늘 제가 형제님 소원을 들어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시신은 잘 수습해 드리겠습니다.”형제는 화를 내면서 한참 욕설을 퍼부었다. “그거 보세요. 형제님은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은 겁니다.” 그날 이후 자살하겠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예배에 잘 나왔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한다. 누구나 잘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게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잘 사는 길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그것을 알려주고 함께 품으라고 말씀하신다.주님은 이 땅에 버려진 사람, 버려진 영혼이 많다고 하셨다. 주님은 이러한 영혼들에 관심이 있으시고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다. 아직 우리는 예수님께 배울 것이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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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1
  • ‘조폭’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
    2011년 6월 제주 새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지하상가 예배당에서 열린 주일예배에서 뜨겁게 찬양하고 있다.  교회 문을 열고 실전이 시작됐다. 제주에서 3년간 전도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도시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이들이었다. 하나님은 제주의 영혼들을 품고 기도하게 하셨다.2005년 개척하고 처음 전도로 온 이들은 어린이였다. 여름이 지났을 때 20여명이 모였다.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깨진 가정에서 편부모나 조부모와 살고 있었다. 매일 오후 5시 이들과 예배를 드렸다. 찬양하고 성경 한 장을 가르쳤다. 사모는 매일 간식이나 저녁을 준비했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은 하교 후 교회에 와서 저녁 늦게까지 있다가 집에 갔다.그런 예배가 1년 넘게 지속했다. 그런데 2년 후 갑자기 모임이 멈췄다. 그것도 한날한시에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교회를 떠났다. 큰 충격을 받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어린이 대부분이 초등학교 5·6학년이었는데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제사에 참여할 나이가 된 것이다. 또 주일에 학원을 가야 한다고 했다. 모든 아이가 썰물처럼 갑자기 교회를 떠났다. 이 일로 주님 앞에 엎드렸다. 주님은 제주의 깨어진 가정의 아픔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뿌려진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기도할 때 그들에게 심어진 말씀의 씨앗이 열매 맺기를 기도하고 있다.두 번째 무리는 2005년 7월 전도된 3명의 성인이다. 동거 남녀와 60대 남자였는데 모두 알코올중독자였다. 주일에 승합차로 데리러 가면 이미 소주 두어 병을 마신 상태였다. 승합차와 예배당이 술 냄새로 진동했다. 60대 남자는 이혼하고 집에 방화했다가 교도소에 다녀온 상태였다. 술만 마시면 나를 불러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자살하겠다고 울었다. 함께 울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동거 남녀는 무연고로 간경화 말기 환자였다. 혼수상태가 오면 내가 보호자 신분으로 병원에 데려가곤 했다. 동거 남녀는 그해 11월과 12월에 각각 하나님 나라로 갔다. 교회 나온 지 4개월쯤 된 10월 주일이었다. 동거남녀 중 남자가 말끔하게 옷을 입고 술도 마시지 않은 채 승합차에 탔다.“목사님, 저 오늘부터 술 끊고 하나님 잘 믿어 볼랍니다.” “형제님, 정말 기적입니다. 오늘부터 세례교육을 합시다.” 그 날부터 4주간 세례 문답 공부를 했다. 거짓말처럼 그는 30년 이상 매일 네댓 병을 마시던 술을 끊었다.4주째 토요일 저녁이었다. “고 목사님이십니까. 잠깐 병원에 오셔야겠습니다.” 제주 한마음병원 중환자실이었다. 직감으로 주님이 남성을 부르고 계심을 알았다. 세례기와 가운을 챙겼다.중환자실에는 지인 몇 명이 있었다. 가운을 입고 세례식을 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세례 문답에 눈짓과 작은 고갯짓으로 응답했다. 떨리는 손으로 안수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고 선포했다. 기도하는 동안 그는 조용히 하나님 나라로 갔다.문제는 장례를 치를 비용이었다. 일단 빈소를 정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어떻게든 장례를 치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월요일 아침 장례식장에 갔는데 초입부터 화환이 줄지어 있었다. ‘대단한 인물이 죽었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그 화환은 성도의 빈소로 이어져 있었다. 정장 차림의 청년 수십명이 손님을 받고 있었다.임종한 성도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모두 어린 시절 집을 나갔고 큰아들은 조직폭력배였다. 과거 제주에 큰 폭력 사건이 있었는데, 큰아들이 모든 걸 뒤집어쓰고 수감 중이었다. 수감 중 부친의 부고가 전달되자 보스가 약속했다고 한다. “네 아버지 장례는 내가 치른다.” 그렇게 인원을 총동원했다 한다.이틀 동안 다섯 차례 장례예배를 드렸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 출관하는 날 17대의 검은색 세단이 장례행렬을 호위했다. 주님은 장례의 상주가 돼 주셨다. 무엇보다도 평생 술과 사단에 매여 있던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데 제주새예루살렘교회를 사용해 주셨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가장 존귀한 한 영혼을 구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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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4
  • 성도·건물 없는 ‘서류상 교회’ 부임
    고웅영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목사(앞줄 오른쪽 세 번째)와 성도들이 지난해 9월 제주 서귀포항에서 제주 복음화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제주 목회는 하나님께서 여러 개의 관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5년 개척 때 일이다. 제주새예루살렘교회 개척의 문은 수월하게 열린 게 아니었다. 2002년과 2003년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를 둘러봤다. 2004년은 부교역자 시절 청년부와 전도여행을 하면서 제주를 찾았다. 청년 45명과 2004년 1월 제주 전도여행을 했다. 4개의 팀으로 나눠 미션을 주고 제주의 여러 곳에서 예배하고 전도했다. 그때 제주 감리교회 목회자들을 만나 제주 목회의 비전을 나눴다.목회자들은 부정적 반응을 내비쳤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뿐 아니라 제주 전체 교회의 절반 이상이 미자립 상태입니다. 또다시 미자립 개척교회를 세우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이런 반응이 나오자 두 가지 감사가 터져 나왔다. “주님, 제주의 교회와 영적 상황을 실제로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교사로 헌신했던 청년 시절 기도대로 선교지와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불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전도 여행을 다녀온 후 하나님은 제주를 향해 더 기도할 마음을 주셨다. 개척과 목회의 문이 열리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부터 영적 도전들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2004년 가을 목사고시가 있었는데, 한 달 전부터 아내에게 혈변과 진통이 찾아왔다. 병원에선 대장의 자가면역 관련 질환인데 평생 안고 가야 할 난치병이라 했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대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난감했다. 교회 사역은 계속해야 하고 목사고시는 다가오고 어린 두 자녀는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다. 첫째 아이는 할머니가, 둘째 아이는 교회 권사님께서 맡아 주셨다. 아내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낮에는 교회 사역을 하고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아내의 병상 옆에서 돌보며 목사고시를 준비하는 생활이 시작됐다.모두가 잠든 밤에도 아내는 수십 차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혈변을 봤다. 아내의 진통이 잦아들면 병원 로비의 수납창구 불빛 아래서 공부했다. 졸지에 아이들도 아내도 나도 어떤 시험 앞에 서 있었다.더 전심으로 하나님을 붙잡는 시간이었다. 목사고시를 보러 대전으로 내려가던 날 아내의 혈변이 멈췄다. 감사하게도 목사고시에 합격하고 돌아온 날 아내는 퇴원했다. 며칠 후 가족은 다시 모였다. 또 한 가지 도전은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교회 담임목사님이 갑작스럽게 임지를 옮긴 것이었다. 개척하면 힘이 돼주시겠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기대도 할 수 없게 됐다. 주님은 사람과 교회를 의지했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셨다. 제주 감리교회의 개척 불가 입장도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 제주지역 교단 관계자는 새로운 미자립교회가 또다시 세워지는 것이 당시 제주선교 상황에 맞지 않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2005년 4월에 목사안수식이 예정돼 있었다. 교단법에 따라 그 전에 담임할 교회가 결정되지 않으면 안수 자체가 무산되는 상황이었다.그해 1월 황급히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제주 지역 교단 관계자들을 만나 이러한 상황을 알리고 간청했지만, 답은 같았다. 그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목사님, 혹시 감리교 제주지방에 서류상으로는 있지만,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있습니까.” “아, 한 교회가 2년 전부터 목회자 미파송 상태에 있습니다. 전임 목회자가 경제적, 영적으로 타격을 받고 제주를 떠났습니다. 성도도 목회자도 교회 건물도 없는 서류상 교회죠. 한 달 후 지방회에서 영구 폐지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 교회를 맡으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제주에 오고 싶습니까.” “네.” “좋습니다.”하나님께선 새로운 방법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없어지는 것을 막으셨다. 그렇게 개척의 문이 열렸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도 나름대로 과정이 있고 도전이 있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 실로 주님은 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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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하나님의 창고 연 비결 ‘십의 3조’
      고웅영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목사가 2012년 10월 성도들과 함께 제주 상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포기함으로 얻는 방법 중 세 번째는 소유의 포기다. 그동안 소유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2000년 아버지가 소천하셨을 때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빚을 물려받지 않으려고 상속포기서까지 썼다. 1990년 대학 시절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신문 배달, 손세차장 세차, 일용직 등으로 일했고 우체국 택배센터와 어린이의류 물류센터에소 일했다. 2002년 감리교신학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시작한 일은 무보수 자비량 사역을 하는 선교단체 간사였다.당시 나는 가난하지 않았고 부요하지도 않았다. 많은 간사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기도하면서 섬기던 시절이었다. 기도해보고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을 찾아가 “내가 당신에게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기회를 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찾아간 분의 95%가 후원자와 중보자가 됐다. 하나님은 아굴의 잠언처럼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셨다. 1999년 전도사로 사역할 때 첫 월급이 40만원이었다. 당시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신대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도 가난하지 않았다. 개척 후 6년 차부터 교회에서 목회비를 받았다. 그 6년 동안 자녀가 셋이 됐고 하나님은 더 풍성하게 채워 주셨다. 비결은 나눠주는 훈련에 있었다. 간사로 섬기던 시절 하나님께서는 후원받은 헌금 일부를 다른 간사들을 위해 헌금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끄러울 정도로 아주 적은 금액을 매달 후원했다. 전도사 시절에도 다른 간사 가정과 선교사 가정을 후원했다. 그때 우리 가정이 세운 헌금원칙은 십의 3조였다. 십의 1조는 하나님께, 십의 1조는 선교사역에, 십의 1조는 구제가 필요한 이들에게 헌금했다.하나님의 비밀창고는 그때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월급이 80만원이었던 전도사 시절 400만원 가까운 대학원 등록금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들로부터 계속 채워졌다. 제주도에 교회를 개척할 때 임차계약금 300만원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신대로 기도의 후원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전화 한 통화로 20분 만에 계약금을 치렀다. 나머지 잔금 1700만원은 제주로 이삿짐을 싣고 내려오는 날 아침에 몇 분의 권사님들이 모아 주셨다.개척하고 사용하던 승합차가 2007년 도로 한가운데 멈췄다. 600만원을 주고 산 중고차였는데, 견적만 170만원이 나왔다. 그날 미국에서 제주도로 손님이 찾아왔다. 10년 전 간사 시절 2만원씩 딱 1년간 헌금했던 선배 간사 가정이었다. 사업차 한국에 왔다고 했다. 식사 후 봉투 하나를 놓고 갔다. 열어보니 170만원이었다.2008년 교회를 옮기고 강대상을 바꾸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강대상이 200만원이었다. 한두 번 뵀던 다른 교단 장로님이 찾아오셨다. “교회를 옮기고 무엇이 필요합니까.” “강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얼마 후 베트남 선교사로 나가신다며 봉투를 두고 가셨다. 200만원이었다. 육지의 대형교회에서 제주도로 청년수련회를 왔다. 제주공항에서 수련회 장소로 안내하는 일을 했다. 버스 안에서 제주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제주도에서 개척목회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을 30분 정도 나눴다. 그 교회는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가며 모든 헌금을 놓고 갔다. 개척 때부터 필요한 목회 서적이 있으면 목록을 적어 놓고 “주님 매달 책을 사주는 후원자를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청년부 제자 중 한 형제가 직장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15년간 매달 필요한 책을 보내주고 있다.제주새예루살렘교회는 아직도 임차 교회다. 하지만 지난해 8월 하나님께서 4436㎡(1341평) 예배당 부지를 주셨다. 대출이자만 내고 있는데, 건축의 나머지 과정은 주님의 때에 풍성하게 이뤄주실 것을 알고 기쁘게 기다리고 있다. 현재 6개의 지역교회와 국내 선교기관 4곳, 해외 선교지 8곳을 후원하고 있다. ‘포기함으로 얻는 법’을 배우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최고의 보상이고 상급이라고 믿는다.               
    • 오피니언
    • 기고.연재
    2020-02-12
  • 섬들이 주를 앙망하리라
    고웅영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목사(두 번째 줄 왼쪽 첫 번째)가 2016년 4월 제주 한경면 차귀도 포구에서 성도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인생이든 목회든 어느 시점에서 보면 많은 조각 모음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무의미한 파편으로 이뤄진 게 아니라 시간과 일상의 연속 선상에서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다. 많은 성도는 특별한 사건만 하나님의 역사와 개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그렇지 않다. 삶의 연속성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그에 따른 결과로 삶과 목회가 이뤄진다.2005년 맨손으로 시작한 제주 목회에서 하신 하나님의 일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렇다고 주목할 만한 사역의 열매나 업적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는 성도들과 사역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은혜의 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나는 어린 시절 전통적인 장로교회에서 자라났다. 서울 신림동 미개발 지역에 있던 성림교회는 놀이터였고 모임 장소였다. 주변에 산이 있고 개울이 있고 과수원이 있고 밭이 그득했다. 교회는 미끄럼틀이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자연스럽게 보수적인 신앙을 형성하게 됐는데, 서울 미림중학교 3학년 때 했던 성령체험은 내 인생길을 바꿔놓았다.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한 내게 고입 연합고사는 넘어야 할 산이었다. ‘주님, 제발 고입 시험을 잘 치게 해주세요.’ 마음의 불안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동기가 됐다.매일 교회 종탑 아래 창고로 쓰던 방이나 계단에 앉아 기도했다. 수줍어서 넓은 기도실에서 기도할 용기는 없었다. 시계추처럼 집으로 가기 전 나만의 기도 처소를 들러야 마음의 평안을 느꼈다.봄이었던 것 같다. 종탑 아랫방이 잠겨 있었다. 계단 끝자락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다. “울랄라라 알랄라랄.” 기도하는데 갑자기 내 의지와 다르게 혀가 꼬이며 방언이 터져나왔다. ‘아, 이렇게 크게 기도하다가는 계단을 타고 소리가 퍼져서 누군가 올라오지 않을까.’ 걱정이 스쳤지만 혀와 입술을 마음대로 제어할 수 없었다. 기도하는 동안 마음의 기쁨과 평안이 임하는 것을 느꼈다.10분쯤 지났을까 했는데 기도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1시간이 훌쩍 넘었다. 그날 이후 종탑 아래 계단기도실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됐다. 주님의 은혜로 200점 만점의 연합고사에서 180점을 맞았다. 성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하나님은 나를 긍휼히 여기셨다. 작은 믿음으로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을 맛보게 해 주셨다.고등부 시절 또 한 번의 은혜를 경험했다. 중증 축농증으로 고생하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교회 다음으로 많이 간 곳이 이비인후과 병원이었다. 심하면 이틀에 한 번 막힌 코를 뚫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코에 가득 찬 고름을 뽑아내려고 젓가락 길이의 기구를 코 안쪽까지 집어넣던 기억이 생생하다.그 시절은 거의 입으로 숨을 쉬었다. 병원에선 코 안쪽 뼈가 휘어서 수술해야 좋아질 수 있다고 했다. 고등학교 2학년부터 교회 학생회장을 맡았다. 3일 동안 금식하며 수련회를 인도했다. 수련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에 이런 감동이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치료해 주셨다. 이제 축농증은 끝이다.’ 훗날 어머니는 내가 수련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하나님이 제 코를 치료해 주셨어요.”나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축농증으로 이비인후과를 간 적이 없다. 축농증의 치유를 위해 금식한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금식에 선하신 하나님은 치유로 보상하셨다. 하나님은 이기적인 목적이 아닌 금식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배웠다.청년 시절 하나님은 나를 두 번 살려주셨다. 1990년 주일 청년부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였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인도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다. “끼이익.” “쿵!” 갑자기 자동차의 브레이크 소리가 들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오른편에 승용차가 서 있었다. 운전자가 놀란 눈으로 뛰쳐 나왔다. “학생, 괜찮아?”나중에 알고 보니 차도와 인도 사이를 걷던 나를 승용차가 쳤다. 이후 자동차의 보닛 위로 굴렀고 운전자의 옆에 떨어진 것이었다. 나는 생명이 위험에 처한 줄도 모르게 천사의 보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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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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