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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사렛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압바’ 호칭
      김영한 박사 역사적 예수의 독특성 가운데 하나가 유대인이 감히 부르지 못했던 하나님을 "압바"(Aββα,  abba, 아버지)라는 가장 친근한 호칭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아버지 호칭은 복음서에서는 150회 이상이나 기록되어 있다. 12세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 축제에 부모와 같이 와서 없어져 버렸는데 부모가 근심하여 찾다가 성전에 있는 그를 발견하였다. 어머니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눅 2:48)라고 질책한다. 이에 대하여 소년 예수는 독특한 문장으로 대답한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눅 2:49). 소년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압바"(abba)라는 호칭은 독특하다. "내 아버지 집"이란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집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인 하나님의 전을 말한다.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을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른 것이다. 예수는 그의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하여 지칭할 때 어느 누구도 부를 수 없는 친근한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십자가 상에서 숨을 거두시면서 하신 예수의 마지막 말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이었다. 유대교 문헌에 정통한 독일의 신약학자 여호야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압바"(abba)라는 단어는 역사적 예수가 친히 쓴 아람어라고 밝히고 있다.   I. 구약에서의 하나님 아버지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 토기장이와 진흙, 주관자와 복종자의 관계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부르지도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집단적인 내지 비유적인 의미에서 구약성경에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은 민족적인 처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묘사된다: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출 4:22).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시편 저자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에 비유하였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 103:13).  유대인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하여 호칭으로 부르기를 꺼려하였고, 다른 편으로는 아버지 호칭을 집단적인 의미 내지 비유로 사용해왔다. 이러한 유대교의 하나님 "아버지" 호칭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는 새로운 의미, 즉 신약적인 독특성을 부여하였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족관계로 표시하였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이다. 부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의 부성을 강조한 것은 바로 유대의 전통적 사상이 의미하는 바를 보다 분명히 설명해 준다. 예수의 아버지 호칭은 유대교가 의미하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를 부자(父子)관계로 끌어 올리는 혁명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호칭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것은 아들로서 아버지에 대한 인격적인 관계와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이 호칭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더 이상 주인과 종 사이의 비인격적 관계가 아니라. 자녀에 대해 베푸는 아버지의 무한한 긍휼과 인자에 대한 신뢰가 담겨져 있다. 예수는 자기와 우리의 관계를 친구 관계로 격상시킨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예수는 우리의 친구요, 우리는 예수의 친구로서 예수를 통하여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예수는 맏형이여 우리의 그의 형제로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II. 호칭 "압바"(Abba)의 함축성 나사렛 예수가 사용한 하나님에 대한 "압바"(아람어로는 abba, 아버지)라는 호칭은 유대교적인 하나님 상(像)의 틀을 깨뜨리고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격적인 관계를 제시하고 있다.  예레미아스는 당대의 유대교 문헌을 연구한 후에 "유대교 기도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압바'라고 언급한 유비를 전혀 찾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구약 전체는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성을 강조하고 야웨와의 친밀성을 두려워하고 피하고자 한데 반해서 예수는 일상적으로 하나님을 아주 친근한 용어로 불렀다. "아버지" 호칭은 다음의 함축성을 지닌다. 1.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깊으신 관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와 같이 보살피신다. 우리에게 의식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부모가 자녀들의 의식주를 돌보아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기본을 돌보아 주신다. 예수는 어떤 조건을 제시하며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 하나님에 대하여 근본적인 신뢰를 가지라는 것이다. 그것은 순수하고 소박한 믿음을 말한다. 예수는 마치 자녀에 대한 부모의 심정을 지니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르치시고 계신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 예수는 하나님이 무섭고 벌을 주시는 재판관이 아니라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시고 마련해주시는 부모보다 더 사랑과 자비로써 우리를 보살피시는 분이라고 가르치신다. 2. 자녀 하나 하나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하나 하나를 눈동자 같이 머리털까지 세고 계시는 세밀한 사랑이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30).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아흔 아홉 마리 양을 우리에 두고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심정과 같다고 예수는 설교하신다. 그 양을 찾으면 목자가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집에 돌아와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눅 15:6)라고 말하듯이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신다. 누가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3.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관계: 직접성과 단순성을 나타낸다. 신자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이다. 단지 형식이나 의식(儀式)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직도 종교적 차원이다. 하나님은 자유스러운 마음, 자발적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배와 찬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애원하는 심령에서 나오는 자녀의 소박한 기도를 들어 주신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하나님께 기도하고 요구하는 데는 형식적인 절차가 아니라 직접성과 단순성이 요구된다. 마치 자식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다.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주저한다면 그것은 참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신앙의 자연스러운 관계로 나타내고 계신다.     4. 자녀의 고통에 함께 하시는 분, 하나님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시고 참여하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고통은 율법적인 인과응보로만 오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징계로만 생각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당하는 고통에는 우리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는 겸손해지고 우리의 인생은 더욱 깊어진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묻는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유대인들에 의하면 질병은 죄의 결과이다(요 5:14). 맹인의 경우는 그 부모의 죄의 결과로 보아야 했다. 예수는 대답하신다: "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맹인은 "실로암에 가서 씻어라"는 예수의 말씀에 따라 씻고 밝은 눈을 가지게 되었다(요 9:7). 맹인은 보게 됨을 통하여 그를 치유한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맹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되돌아간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자녀인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우리를 그 분의 원하시는 그릇으로 만드신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당하는 이 세상의 고통과 박해에는 하나님의 의미와 목적이 들어 있다.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시고 좋은 것으로 갚아주신다. 우리의 고통은 우리 자신의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통이다. 이 하나님의 고통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장 잘 드러나 있다. 5. 아버지로서 자녀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신다. 하나님은 구약의 율법학자들이 생각했듯이 그의 자녀에게 단지 준엄한 재판관이나 율법 집행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인격적으로 다가오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서해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녀에게 어느 계명을 지켰는지 보시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를 가졌는지에 대해 우선적으로 보신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예수의 설교는 잃어버린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탕자의 비유)(눅 15장)에서 나타난다. 탕자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라고 아버지에게 참회의 고백을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게의치 않고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온 사실 자체를 기뻐하신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 15:22-24). 아버지의 아들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품꾼의 하나로 받아들라고 돌아온 아들을 즐겨 맞이해주시고 잔치상을 베풀어주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비유는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교훈해 주고 있다.     6. 하나님 앞에 모든 인간은 한 형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한 형제가 된다. 여기에는 백인, 황인, 흑인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동양인과 서양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 노인과 아이의 차이가 있을 수 없고,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가 없으며, 지식인과 비지식인의 차이가 없으며, 권력자와 서민의 차이가 없다.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 아니고 인종이란 진화가 빚어낸 적자생존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형상에 따라서 지음을 받은 창조의 작품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아바지 되심 앞에서 모든 인종 계층의 구별이 사라진다. 인간의 존엄성이란 하나님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다. 진화론적 인간관은 인간을 자연과정이나 만물과 다름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그러나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았다고 보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동등하며 자연보다 존귀하다고 본다. 형제 자매가 아버지 앞에서 하나인 것처럼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하나의 형제 자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계 21:26). III. 예수의 영 안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부성(父性)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부성)이란 나사렛 예수에 대한 믿음 안에서만 계시되고 그 안에서 호칭되어진다. 혈과 육이라는 자연적인 관계로는 정립되지 않는다. 요한은 다음같이 증언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가능하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오늘도 예수를 믿고 그의 자녀가 될 때 우리에게 아들의 영인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음같이 증언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압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을 "압바"(abba,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5-16). 오늘날에도 신자인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친히 "압바!"라고 불렀던 예수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압바"라고 불렀던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대한 연속성을 체험하게 된다. (끝)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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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6
  • “신학자의 혀가 맵다고 뽑으려 하면 안돼”
          성산생명윤리연구소가 총신대 이상원 교수(조직신학)에 대한 이 학교 법인이사회의 바른 판단을 촉구하는 입장문을 16일 발표했다. 이날 이사회도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연구소는 "현재의 상황을 보면 성정치 이론에 매몰된 그룹의 주장만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는 것 같아 개탄을 금치 못한다"며 "신학교가 바로 서야 바른 목사가 나오고, 바른 목사가 바른 설교로 바른 신앙인을 세운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총신대 당국자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길 바란다"고 했다.   이어 "오늘 열리는 이사회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로 핀단 할 수밖에 없다"면서 "차별금지법이 아직 제정만 안 되어있지 실제적으로는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학술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 하고 있는 현상"이라고 했다. 또 "신학자의 혀가 맵다고 혀를 뽑으려 하면 안 된다. 진정한 신앙인은 비록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이 교수와 같이 제2, 제3의 이상원 교수가 되어 총신대를 무너뜨리려는 세력과 맞설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지키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했다. 아래는 입장 전문.   지난해 12월 5일 총신대 정문 앞에서 열렸던 총신대 이상원 교수 관련 기자회견 모습   총신대학교는 선지동산의 정체성을 회복하라.   대학 지도자의 영적 분별력이 떨어질 때 사탄은 여지없이 침투해 들어온다. 바른 교리를 추구해야 할 신학교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할 때, 작은 누룩에 점령당해 버린다. 바른 교리와 윤리기준을 가르치는 교수를 징계하려고 달려드는 지금의 행태는 신학대학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상이다. 신실한 장로교인들의 눈물과 신앙으로 세워진 총신대학교가 다시 깨어나야 나야한다. 영적 장님이 되어 말씀으로 바로 서지 못하고 혼합된 신학과 세상시조에 밀려 맥없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라.  사람의 눈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총신이 되기 바란다.   현재의 상황을 보면 성정치 이론에 매몰된 그룹의 주장만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는 것 같아 개탄을 금치 못한다. 세상은 성(性)을 무기로 성도와 가정과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다가온다. 제일 먼저 공격하는 대상은 목사와 신학교다. 신학교가 바로 서야 바른 목사가 나오고, 바른 목사가 바른 설교로 바른 신앙인을 세운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총신대 당국자들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신학과 신앙을 지키지 못하는 총장은 한국교회와 총신의 미래를 위해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 열리는 이사회는 바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시도로 핀단 할수 밖에 없다. 차별금지법이 아직 제정만 안 되어있지 실제적으로는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학술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 하고 있는 현상이다. 신앙의 자유와 예배를 자유롭게 드릴 수 있는 자유는 신앙의 선배들이 피 흘리기까지 싸운 결과인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학자의 혀가 맵다고 혀를 뽑으려 하면 안 된다. 진정한 신앙인은 비록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 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특별히 이상원 교수의 경우를 볼 때 다른 영역에서 이런 방법이 통했을지 모르지만 상대를 잘못 집었음을 분명히 경고하고 밝혀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상원 교수는 비록 향후 어떤 결론이 날지 모르지만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과 불명예를 감수하며 주님과 함께 치욕의 영문 밖으로 나갈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교수와 같이 제2, 제3의 이상원 교수가 되어 총신대를 무너뜨리려는 세력과 맞설 것이다. 우리는 진리를 지키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각오가 되어 있다. 진리를 지키고 학교를 지키려는 이상원 교수의 명예회복과 총신대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모든 단체들은 이상원 교수 징계철회를 주장하는 56개 합동측 노회장들과 함께 거룩한 분노에 참여할 교수, 학생, 졸업생 등 모든 분들과 연대하여, 법적대응을 포함한 모든 방법을 다해 맞서갈 것임을 분명히 밝혀둔다.   진리를 지키는 자리라면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이사회와 총신대  당국에 엄중히 경고한다. "존 낙스의 기도는 100만 명의 군대보다 더 두렵다."고 고백한 영국 메리 여왕의 고백을 기억하기 바란다. 이런 말을 남겼다. 지금도 이교수를 위해, 진리를 지키고 총신대를 지키기 위해 세상에 무릎 꿇지 않은 성도들의 눈물의 기도가 끊임없이 주님의 보좌로 올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이제 깨어있는 총신대 교수들와 학생들에게 다시금 신앙의 양심과 학자의 양심에 호소합니다. 신앙의 양심에 따라 두려워하지 말고 같은 목소리를 내어 주십시오. 개혁주의 신학의 선지동산의 상징인 이상원교수님을 지켜 주십시오  총신대를 지켜 주십시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게 행동합시다. 성산생명윤리연구소(소장 이명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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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6
  • 갈등을 치유하는 교회가 되려면
      갈등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   ▲정재영 교수 작년 한 해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갈등 속에서 보내왔다. 법무부 장관 임명으로 촉발된 정치 갈등이 온 나라를 뒤덮었고, 이는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그 이면에는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아 온 진영 논리와 이념 갈등이 있고, 이러한 입장 차이에 따라 서로의 주장에 대해서 근거 없는 비난을 일삼기도 했다.이에 따라 우리 국민 10명 중 7명은 과거보다 갈등이 심해졌다고 느낀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이 조사에서는 빈자와 부자, 진보와 보수, 노동자와 사용자, 청년과 중장년층 사이의 대립이 한층 깊어졌다고 보는 사람이 많았다.특히 조국 전 법무장관의 임명을 둘러싼 혼란으로 사회 갈등이 더 커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70%에 육박했다. 2016년 국정농단 때는 촛불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탄핵을 외쳤는데, 지금은 탄핵으로 집권한 정부에 대한 성토가 한창이다.이 조사에서는 여러 사회 갈등 중에서 빈부 갈등이 심각하다고 본 의견이 77.3%로 가장 컸다. 최근 부동산 가격 상승, 최저임금 인상, 세금 문제 등이 이슈가 되면서 이해관계가 엇갈렸다. 이에 따라 빈부 갈등이 더 심화됐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젊은 층에서는 성별 갈등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20대에서는 74.9%가 성별 갈등을 사회 주요 문제로 꼽았다. 20대는 성 차별에 대해서 더 예민하게 느끼고 있고 여성에 대한 차별을 줄이려는 노력에 대해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면서 오히려 남성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이 되고 있다.세대 갈등도 격화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고령 사회가 되면서 노인 인구가 급증하고 있는데 그동안 뒷방 노인네 취급당하며 소외감을 느꼈던 노인들이 힘을 모아 당당히 의사 표현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세력을 이뤄 사회단체를 결성하기도 한다.이들은 단순히 정보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서 디지털의 힘을 빌려 유튜브 방송을 하면서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기도 할 정도로 매우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넘쳐나는 정보들 중에는 근거 없는 가짜 뉴스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이러한 노인 세대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와의 사이에 갈등은 더 심화되고 있다.특히 일부에서는 자신과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종북좌파’라는 딱지를 붙여서 매도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서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단순히 북한을 도운 경험이 있다든지 북한에 다녀 온 경험만으로도 ‘종북’이라고 매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일부 교계 인사들도 이러한 일로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한동안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갈등 문제로 여겨졌던 지역 갈등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고 이러한 이념 갈등이 더 부각되고 있는 게 요즘의 현실이다.갈등에 빠진 한국 교회 교회도 예외가 아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교회는 정교분리를 주장해 왔고,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여겨왔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정권에 대해서조차 모든 권세는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생각으로 집권 세력에 대한 비판을 자제해 왔을 정도이다.그런데 오랫동안 집권했던 보수 정당이 힘을 잃고 진보 성향의 정당이 들어서면서 교회의 입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당을 만들기도 하고 시청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진보 성향의 목회자들이 민주화와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 정치 활동을 벌였는데 최근에는 보수 성향의 목회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양상이다.이러한 모습은 개교회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예배 후에 교회당 곳곳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정치 발언을 하는 성도들이 적지 않다. 시국과 관련해서 광화문 집회에 나갔다 온 사람들과 서초동에 나갔다 온 사람들이 제각기 집회 현장의 모습을 전달하며 자신의 입장에 동조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일부 교회에서는 대표 기도를 하는 중에 현 정부를 비판하는 표현을 하는 경우가 있어서 젊은이들이 크게 반발하기도 하고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그런 기도 내용이 교회의 공식 입장인지 묻는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빈부 갈등과 세대 갈등, 그리고 성별 갈등 등의 사회 갈등도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연되며 성도들끼리 부딪히고 있다.교회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매우 금기시해왔던 기존의 풍토와는 매우 다른 모습이다. 물론 교회에서 정치 토론 자체를 금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인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부합하지 않는 사회 모습을 변혁시키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의 노력은 자연히 정치성을 띨 수밖에 없다.그러나 지금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은 건전한 대화와 토론이 아니라 상대방을 굴복시켜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강한 의지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갈등을 치유하는 교회가 되려면 교회는 갈등의 치유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함으로써 죄악 많은 세상을 바꿔나가야 한다.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셨지만 세상의 왕으로 군림하지 않으셨고 정치적인 선동가가 되지 않으셨다. 세속의 가치를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보여주셨고 세상에서 무시당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안겨 주셨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빠져서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오히려 성경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기 바쁜 모습이다.기독교인이라면 자신의 이념을 넘어 신앙을 바라보아야 하고 신념을 주장하기 전에 성경의 가르침을 되새겨봐야 한다. 토론을 할 때에는 자기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도 경청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억눌림을 토로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기보다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이웃들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어야 하고 그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기보다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을 구원하셨지만 자기 몸을 제물로 내어주셔서 철저하게 자신을 희생하신 방법으로 화평케 하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 새해에는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를 화평케 하는 도구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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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6
  • 악의 영들이 다음세대를 실족케 하는 도구 ‘성혁명’
      김지연 대표(한국가족보건협회,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 특임교수)     인류의 역사 속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건전한 성가치관은 주류로 인식돼왔다. 성 문제에서 선악을 구별하는 기준에 있어 성경이 다림줄 역할을 해 준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 말씀대로 성별은 남자와 여자 두 가지며, 마태복음 말씀대로 결혼은 1남과 1녀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는 것, 십계명에 따라 간음은 죄라는 인식 등이다. 성매매하는 것은 죄다, 성관계는 부부끼리만 하는 것이다, 동성애는 죄다, 근친상간해서는 안 된다 등의 인식도 성경적 성가치관의 한 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질서가 흔들리고 있다. "성별은 남녀 두 개만 있는 게 아니라 여자, 남자, 트랜스젠더, 중성, 양성동체 등 수십 가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급진적 페미니스트, 동성애 옹호론자, 인권활동가, 정치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동성결혼을 통과시킨 나라가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30개에 육박하고 있다. 간통죄 처벌법을 폐지하고 간통을 성적 결정권으로 인정하는 나라도 증가하고 있다. 돈으로 얼마든지 성을 사고팔아도 된다며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도 생겨나고 있다. 심지어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 동성애를 비판하는 행위가 오히려 죄라는 법을 만들어 버린 나라가 50개가 넘는다. 심지어 소아성애도 성적지향으로 인정해달라고 당당히 요구하는 인권단체가 북미에 등장했다. 기존에 성적인 타락이나 죄악으로 여겨지던 것이 이제는 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권리'이자 '선택권'이라며 법을 통해 강제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타락한 성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흐름이 거세다. 성윤리와 성도덕을 파괴하는 법을 반대하는 선량한 시민을 오히려 소송하고 매장하는 성읍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고도로 성애화(sexualization)된 사람들이 그 성읍들을 채우고 있다.   대책 없는 관용주의(tolerance policy)와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은 진리에 따라 올바름을 외치는 이들의 호소를 낡은 가치를 붙든 꽉 막힌 보수주의자인 것처럼 치부해 버린다. 그리고 다음세대에게 '괜찮아, 아무 일도 없을 테니 네가 원하는 모든 방식의 성적 만족을 취하라'며 독약을 주고 있다. 마치 이런 흐름에 편승하는 게 아주 훌륭한 처세술처럼 보인다.   거룩이란 무엇인가. 찬양을 들으며 눈물 흘리면서 감정의 요동을 느끼는 과정만으로 거룩이 입증된다면 얼마나 간편하고 좋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현상만으로는 우리의 거룩이나 성화가 입증되진 못한다. 그 눈물이 정말 거룩해지는 과정에서 나온 눈물인지 아니면 그저 단순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로 나온 눈물이었는지 당장 그 현장에서는 바로 알기가 어렵다. 오히려 그 찬양의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간 나, 즉 삶의 현장으로 돌아간 내가 나의 이웃, 가족, 원수를 대하는 태도, 내가 어둠속에서 즐기는 스마트폰 노트북 컴퓨터 앞에서 우리는 그 눈물이 어떤 눈물이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어두운 방, 아무도 없을 때 스마트폰, 노트북 앞에서 나는 무엇을 보고 즐기는 자인가가 낮의 찬양 예배 시간에 흘린 눈물의 실체를 말해준다.   정치적 올바름주의(pc)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성경적 성가치관을 엎어버리고 구조와 질서, 윤리를 무너뜨리며 신권을 짓밟는 허황된 인권 만능주의 세상을 향해 맹렬히 돌격하고 있다. 동성애는 죄가 아니며 인권과 다양성, 자기 성적 결정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성별은 얼마든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으며, 간통도 성매매도 죄가 아니며 오로지 개인의 성적 결정권이라며 항변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성경적 악행을 얼마든지 할수있도록 보장받기 위해 법과 제도를 뜯어고치는 위험한 행위를 서슴없이 하고 있다.   신앙적 양심을 마비시키는 법과 제도, 문화의 확산은 끔찍한 젠더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광명한 천사로 가장해 대중적 인기를 끌며 가짜 인권을 정상으로 정착시키고자 꿈꾸는 인권 감성팔이들이 득세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혼전 순결을 지지하면 율법주의자나 강박증 환자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성관계는 부부간에만 해야 한다"고 말하면 조선시대 꼰대 취급을 받는다. 동성 간 성행위를 반대했다간 사회적으로 생매장당할 것을 감수해야 할 정도다. 그렇다 보니 '호모파시즘'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호모파시즘이란 동성애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가는 불이익, 왕따,소송 배척 등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하는 동성애 독재적 사회분위기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렇게 밑바닥 모르고 처절하게 성경적 성 가치관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교회는 아무런 악영향을 받지 않고 꼿꼿하게 서서 영적 부흥을 누릴 것이라는 건 착각이다.   우리는 다음세대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 보여줘야 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성경에 근거해서 가르쳐야 한다. 특히 성경적 성가치관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마지막 때 악의 영들이 다음세대를 실족하게 하려고 사용하는 도구가 성 혁명이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며 연약하다. 고린도 전서 13장이 말하듯 우리는 아직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온전하신 주님의 지혜만을 의지해 가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더 이상 공중에 붕 떠 있지 말고 착지해야 한다. "은혜로운 청소년 캠프를 잘 마쳤습니다. 거기서 찬양을 드리며 눈물 콧물 다 쏟고 주를 위해 죽겠노라 맹세까지 했다"라는 캠프 후기를 쓴 청년들이 막상 "동성애는 죄이며 동성애 차별금지법 막자"라는 목사님들 설교에는 "왜 동성애가 죄냐, 설마 성경대로 동성애가 죄라고 그대로 믿느냐? 나는 인권 혐오적인 기독교인은 아니다."라며 승냥이로 변하는 청년들 태도에 충격을 받은 목사님의 제보를 받기도 한다. 다행히 그런 청년들도 동성애에 대한 구체적인 통계 및 성경에 관련된 강의를 듣고 나면 태도는 바뀌고 회개한다.   우리는 더욱 성경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며 죄와 싸우며 진리 안에서 거하며 감사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또한 성경적 성교육강사라고 타이틀을 스스로 붙인 자들도 프리섹스를 인정하거나 동성애를 옹호하거나 외부성기위주의 외설적인 성교육을 일삼는 자들을 주의해야 한다. 세상은 '불륜, 동성애, 성매매, 수간 등이 불의한지 의로운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니 구별하지 말자'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부도덕한 행위조차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퉁치고 원하는 대로 다 누리자고 한다. 하지만 세상의 불법 앞에서 성경은 단호하게 그와는 정반대의 메시지를 주고 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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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6
  • '보석이 아닌,'원석'인 나와 당신'
      세종대 트루스포럼 황선우 대표   사랑할 사람을 만나고 싶다며 보석을 찾는 사람들, 그러나 보석은 없다. 울퉁불퉁하고 못난 원석만 있을 뿐이다. 우리 모두는 보석이 되기 위해 빚어져야 할 방향성이 있을 뿐이다. 한 없이 부족한 원석일 뿐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람의 완벽함 때문이어선 안 된다. 단지 그 사람과 함께 걷고 싶기 때문이어야 한다. 그 걸음이 남들보다 뒤에서 걷더라도, 혹은 천천히 걷더라도 말이다. 그 걸음의 방향 또한 중요하다. 어떠한 일시적이고 헛된 것이 아닌, 참보석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이상형을 그리며 계산 요소만 늘어나는 사람들의 머릿속, 이제는 여기서 벗어나 나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 역시 원석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겸손이 필요하다. 그리고 계산이 아닌 '분별'을 통해, 무엇이 하나님 말씀에 기초하여 옳고 그른지를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무엇이 자신의 계산에 들어맞는가만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아닌, 진정한 아름다움을 분별하여 볼 줄 아는 지혜 말이다.   지금 부족한 것? 괜찮다. 아니, 나와 당신은 영원히 부족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또 그 방향을 향해 어떻게 걷고 있는가 하는 것은 영원히 놓치지 말아야 할 요소이다. 틀어질 때마다 바로잡고 또 걷고, 넘어지고 또 바로잡고 걷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원석인 나와 당신은 조금씩 빚어져 보석에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보석으로 빚어져 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즐거운 일이 된다. 한 없이 부족한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성숙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 두 울퉁불퉁한 원석이 만나 함께 보석으로 빚어져가는 과정,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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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사회통합을 위한 기독교의 역할은 무엇인가"
    경동교회 원로 박종화 목사     한 창조주와 여러 피조물 사회통합의 시급성 배후에는 사회갈등과 분열의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혹자는 현재의 상황을 전례가 없는 “초 갈등 사회”로 진단하기도 한다.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기 위한 방안은 갈등이 야기되고 있는 상황과 갈등의 성격과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전문적이고 공감되는 처방을 내어 놓고, 나아가 이를 구체적으로 사회의 통합으로 이끌어 가는 작업을 해내야 한다. 여기서 특별히 기독교적 역할을 묻고 답하려면 신학적, 신앙 고백적 전제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갈등과 통합의 현장은 인간사회이며, 그 주인공은 인간이며, 사회와 인간은 모두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세 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하나는 창조주는 창조된 인간과 세계를 보시고 “참 좋다”고 하셨고, 이 참 좋은 인간세계의 모습을 “샬롬”(Shalom)이라고 성서는 증언한다. 샬롬은 “인간세계의 평화와 정의 및 자연세계의 보전, 이 둘이 합쳐진 조화로운 삶의 모습”을 뜻한다. 우리가 말하는 사회적 갈등은 샬롬을 깨뜨리는 잘못이거나 심지어 파괴시키는 죄악일 수 있다. 이것은 창조주의 저주를 몰고 온다. 동시에 기독교가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작업에 나서고 동참하는 것은 창조주가 선물로 주신 샬롬을 회복하라는 사명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창조주의 축복을 동반한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 앞에서 “책임지는” 결단의 행동이 기독교적 사명이다. 둘째로는 피조물인 인간과 세계가 창조주의 똑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났으며, 인간사회는 이 형상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중심이 되게 해야 한다. 피조물끼리의 갈등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요 통합은 그 형상의 회복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명하신 이중의 사랑의 계명과 구조가 동일하다. “하나님 사랑”은 항상 “이웃 사랑”을 척도로 하며,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을 지향한다. 사회적 삶 속에서 이웃에 대한 책임은 공동체적 인간의 필수요인일 뿐만 아니라 “나 - 이웃”이 함께 담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공동으로 기쁨으로 누리는 축복이다. 셋째로는 갈등과 통합의 상관관계에 있어서 명심해야할 것은 십계명 제1계명이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마라.” 우리가 반드시 극복하려는 파괴적 갈등은 거개가 갈등의 당사자 개개인이나 집단이 상대방을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보고 매도하거나 적대화로 몰고 가는 과정에서 생긴다. 다양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자기중심의 획일성을 주장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절대화요, 나아가 자신의 신격화이다. 기독교 신앙고백은 말한다.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어느 이념이나 체제나 제도도 신일 수 없고 신격화될 수도 없다. 절대적인 한 분이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신의 형상을 지닌 다양한 인격체이다. 십계명 제1계명은 근본적으로 모든 인간을 위한 인권선언이고, 진정한 민주사회의 성서적 근간이다.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마라 – “중심”이 되라 기독교 세계가 갈등을 극복하며 통합을 추구하면서 내세우는 원칙이 있다 (잠언 2:27): “우편으로나 좌편으로나 치우치지 말라”(개혁판), “좌로든 우로든 빗나가지 말라”(표준 새 번역판). 상식적이지만 몇 가지 주석이 필요할 것이다. 가는 방향은 좌나 우가 아니다. 방향은 앞이다. 역사의 방향은 뒤도 좌도 우도 아닌 “앞”이다. 지금도 우리에게 오고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앞”에 계시다. 좌와 우는 방향이 아니라 앞으로 가기위한 두 날개이다. 인간의 몸은 좌우의 두 팔, 두 다리, 두 눈, 두 귀로 움직인다. 둘이 서로 협력하고 연대해야 건강한 몸으로 산다. 어느 한 쪽이라도 실족하면 장애자가 된다. 중풍환자가 된다. 그러면 미래의 진로를 막는다. 갈등을 통합으로 이끌 수 있는 대안은 좌우를 통합하되 “앞으로”, “미래로”를 공동의 방향으로 수용케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방안이다. 예컨대 “선진 자유 민주사회, 선진 공정 복지사회, 선진 문화예술시대, 민족 통일과 평화시대”라는 우리 사회 미래의 비전을 공유케 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래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샬롬”을 보다 더 깊고 넓고 높게 실현할 수 있는 터전이라고 확신하며 실질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 하나 현재 우리사회의 “초 갈등” 현상은 건강한 몸을 지탱하는 건강한 두 팔과 다리의 경쟁이나 생산적 갈등이 아니라, 극좌와 극우의 극단주의가 대결하는 파괴적 갈등이다. 그것은 잠언이 경고하는 “빗나감”과 “치우침”의 전형이다. 두 팔과 다리 중 한쪽으로 빗나거나 치우치면 중풍환자가 된다. 그런 사회는 장애사회요 중풍환자 사회이다. 극단주의는 그것이 극좌이든 극우이든 사회를 경직시킨다. 좀먹는다. 파괴한다. 빈부 간에 극단으로 치닫는 격차가 그러하고, 노사 간의 처절한 극단적 갈등이 그러하고, 힘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가 갑과 을의 관계로 극단화되어 가는 모습이 그러하고, 잠정적으로 수그러진 모습이나 여전히 극단적 폭발성을 지닌 지역차별과 갈등이 그러하고, 때 늦고 낡은 구시대적 이념갈등이 그러하다. 특히 이념갈등은 일부 기독교인들의 경우 신앙화로 치달아 신의 이미지도 이념화 시키는 과오를 즐겨 범하고 있기도 하다. 극단주의로 치닫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생긴다. 자기편이 아니면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하고 적대적 진영논리를 생성해 낸다. 편 가르기에 몰두하고 증오를 신념화 한다. 또 하나 극단주의는 절대적 “자기 의”에 빠지고 나아가서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우를 범한다. 그것은 십계명이 경고하는 정치적 우상화 내지는 우상체제로의 일탈을 몰고 온다. 기독교 신앙의 공헌은 종교적 우상화만이 아니라 특정 정치세력의 우상화, 특정 이념이나 체제의 우상화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십계명 정신에 따라 모든 피조물의 “평등한 자유 민주체제”를 강조하며 그 모범적 실체로 살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셋째로 사회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공동의 바탕은 “중심”을 확고하게 잡아주는 일이다. 통합은 좌우갈등의 적당한 미봉책도 아니고 이편도 저편도 아닌 무색무취한 “중립”도 아니다. 쌍방이 생사를 걸고 싸우는 현장에서의 중립이란 결과적으로는 패자를 버리고 승자에 기생하는 편파적 태도일 뿐이다. 진실을 알면서도 무관심으로 거부하거나 비겁함으로 도피하는 것은 “무작위 범죄”에 속하는 잘못이다. 중심에 서서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리고 정당한 자의 편을 들어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성서가 증언하는 “예언자적 사명”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해서 갈등에 시시비비를 가려주지 않으면서 적당히 꾀를 부려 갈등에 개입도 안하고 무감각한 구경꾼이 취하는 “중간”도 아니다. 중간은 빈 공간이 아니라 갈등의 쌍방이 너 죽고 나죽는 공멸이 아니라 너 살고 나 사는 상생의 광장으로 이끌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상생의 광장을 제공하고 화해로 이끄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제사장적 사명”이다. 편의상 진보적인 예언자적 사명과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제사장적 사명은 갈등을 정당하게 해소하거나 또는 상생의 통합으로 이끌어 주는 상호보완적 사명이다. 건강한 몸의 양 팔 내지 양 다리의 상보적 역할과 같다. 이 상보적 사명과 역할의 핵심은 몸이라는 중심이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바탕을 두고 있는 중심은 국민이 채택하고 의지하는 “헌법”이다. 헌법은 국민의 삶의 기본가치를 담은 중심이요 규범이다. 이 사실을 갈등의 현장에서 분명히 진실과 상생의 잣대로 밝혀주어야 한다. 헌법의 규범을 두고 해석과 적용에 갈등이 있으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의 빛에서” 이를 밝혀줌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기독교 신앙인은 한 손에 헌법규범을 다른 한 손에 성서를 들고 사회 갈등 해소와 통합노력을 경주하되, 헌법을 성서의 눈으로 해석하고 갈 길을 제시함이 옳을 것이다. 사회통합은 사회의 심포니 내지 오케스트라 연주이다 앞에서 언급한 “중심잡기”는 중신에 연결되어 살아가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조화로운 공동체적 결속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몸을 비유로 들어 말하자면 몸통은 하나이나 양 팔과 다리를 비롯한 몸에 연결되어 사는 모든 지체는 다양하다. 몸통을 건강하게 구성하는 살아있는 지체들은 부피나 크기도 다르다. 심장과 콩팥과 신장이 각기 다양하고 다르듯이 서로 성격도 다르다. 기능도 다양하다. 어느 하나가 아프면 온 몸이 아픈 연대성에 산다. 어느 하나가 병에서 나으면 옴 몸이 기뻐하는 연대성으로 산다. 지체들이 다양하나 몸을 중심으로 서로 엮기며 통합된 모습으로 살기에 이를 “유기체적 통합”이라 말하기도 한다. 이는 다양한 은사가 만드는 아름다운 조화, 성서의 말씀대로 하면 “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롬 8:28)과 같다. 건강한 유기체들의 조화와 화음을 음악의 용어를 빌어 필자는 몸의 “심포니”라 이름 하고 싶다. 심포니는 다양한 소리가 협력하여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화성 음악이다. 모든 소리가 각자 지닌 특유의 소리를 자유롭게 발성하되 화음을 이루는 발성이어야 한다. 발성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는 그래서 공동체적 자유이고, 자유로운 발성은 공공선을 이루는 화음의 발성이다. 이를 관현악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오케스트라”라고 할 것이다. 다양한 악기가 자기만의 독특한 음을 자유롭게 낼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려면 모든 악기의 음은 화음을 이루게 내야한다. 화음이 아니면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소음은 다름 아닌 바로 갈등이다. 사회의 현상을 오케스트라에 비유하여 보면 소음으로 뒤범벅이 된 오케스트라는 갈등으로 점철된 사회이고, 아름다운 화음을 내는 오케스트라는 다양성 속에 하나로 통합된 사회이다. 시끄러운 소음이 아닌 아름다운 화음을 추구하는 오케스트라처럼, 우리는 불안하고 시끄러운 갈등을 딛고 평안하고 아름다운 사회적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내야 한다. 사회적 심포니 내지 사회적 오케스트라의 원형은 그리스도 신앙의 공동체인 교회라고 자부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몸통”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통에 붙어 사는 “지체”인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공동체 만큼 다양한 인간집단이 어울려 사는 사회공동체는 없다. 출신성분도, 고향출신도, 학력이나 지위나 역할도, 성별 세대별 차이도, 타고난 은사도, 실로 다양한 구성원이 “그리스도 신앙”을 공동의 바탕으로 공동체를 이룬다. 신앙의 화음 공동체이다. 이런 화음을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또는 반대로 “일치를 이루는 다양성”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모범적인 신앙의 심포니요 신앙의 오케스트라이다. 문제는 오늘날 일반 사회가 교회를 염려할 정도로 교회가 사회의 비판과 분노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아름다운 심포니가 아닌 시끄러운 소음의 집단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다시 화음을 배우고 실행해야 한다. 모든 지체가 다시 붙어 있어야 할 몸통으로 돌아와야 한다. 몸통에 붙어 있는 한 각 지체의 기능을 아름다운 다양성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신앙의 심포니를 연주하면 된다. 사회통합의 틀도 바로 이러한 일치와 다양성의 조화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민주사회의 기본 원리일 것이다. 이러한 민주적 사회통합은 개인의 자유가 배제된 전체주의 독재사회가 아니다. 다양성을 배제한 전제적 획일주의 사회도 아니다. 몸통인 헌법에 보장된 “자유, 인권, 정의, 복지, 평화”라는 기본 가치가 우리 사회 심포니의 대본이다. 그것은 다행이도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샬롬”의 내용과도 일치한다. 사회갈등을 해소하는 일에 있어서 명심해야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먼저 갈등하는 당사자나 집단이 이런 헌법적 가치를 사고와 실천에 있어서 명실 공히 기본으로 삼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여기에 바로 “예언자적” 비판적 통찰과 비판이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인정하고 존중할 다양성은 기본 내지 기본을 공유한 전제하에서의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사회집단이 정당한 바탕위에서 나름의 심포니나 오케스트라를 연주한다고 판단되면, 연주의 질과 뉴앙스와 표출방식 등에 다양성이 있는 것은 한국사회를 보다 넓고 높고 깊은 민주적 선진사회의 모습으로 보고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회의 화해와 상생을 이루는 “제사장적” 사명인 것이다. 통합의 방식은 사랑이고 최고치는 원수 사랑이다 사회통합의 기초로 삼는 기본가치를 갈등의 당사자들이 공유하고 실천에 옮기는 힘과 동기는 “사랑”이라 믿는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면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여 갈등의 극복과 통합에 나서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는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1 4:8,16). 그리스도를 보내심도 그의 사랑 때문이고(요 3:16), 그리스도가 말씀하신 가장 큰 계명도 사랑의 계명(마 22:34-40)이다. 더 심도 있는 사랑의 계명은 “원수사랑”의 계명(마 5:43-48)이다. 어쨌든 사랑의 부재가 갈등이요 사랑의 회복이 통합이다. 개인도 사회도 그렇다. 앞서서 헌법의 기본가치 또는 샬롬의 기본가치를 설명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런 기본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은 사랑이라는 점이다. 이미 알고 있는 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한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님 사랑의 척도가 이웃사랑에 있고 이웃 사랑의 목표가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이다. 동시에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 역시 한 동전의 양면이다.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의 확산이고 자기 사랑은 이웃 사랑에서 들어난다는 말이다. 예컨대 이웃 사랑이 없는 자유는노예사회의 경우처럼 주인의 독재적 자유와 부림 받는 노예의 무자비한 속박을 낳는다. 정치적 권력의 체제에서 사랑 없는 자유는 우리 인류의 역사상 권력자의 극우적 파쇼주의 지배를 낳곤 했다. 자유는 항상 상대방 앞에서의 자유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인 때문이다. 동시에 사랑이 없는 정의는 항상 자신만이 옳다는 “자기 의”의 함정에 빠져서 적대관계의 괴물을 낳고, 우리의 역사에서는 무자비한 극좌적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함께 적대적 냉전의 어두운 시대를 만들어 내었다. 사실 우리시대의 사회적 갈등 현상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갈등이 상호 표용할 수 있는 생산적 내지 상호 교정의 상태가 아니라 적대화되고 진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념갈등이 온갖 사회갈등의 블랙홀처럼 역기능의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고 통합의 길로 들어서려면 하나의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사랑”의 계명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좀먹는 소위 남남 갈등 및 남북 갈등의 정상이 마로 이것이다. 속칭 “예수 믿고 천당!”의 구호대로 한다면 “원수 사랑해야 천당!!”이라 말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웃사랑을 자기사랑처럼 실천하기도 힘든데, 원수 사랑을 형식적으로 또는 외교적으로 말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자기 사랑처럼 베풀 수 있나? 여기서 두 가지 처방을 살펴보겠다. 하나는 적대관계에 있는 당사자나 당사국 사이에서 평화적 공존을 위해서는 “지성적 원수사랑”(intelligente Feindesliebe)이 필요하다는 서구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의 제안이 있다. 요지는 대충 이러하다. 원수관계의 핵심은 증오인데 원수관계의 현실을 먼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원수를 우리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듯이 원수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증오한다면서, 두려움과 증오의 현실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면밀히 알자는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 상대간의 두려움과 증오가 증폭되면 전쟁의 위협으로 기승하기 때문에, 우리 편이 먼저 두려움과 증오의 강도를 줄이면서 전쟁가능성을 막고 오히려 평화를 향한 선제적 조치 곧 단계적인 원수 사랑의 발걸음을 떼자는 전략적 방식이다. 이런 방식이 남남 갈등의 현장에서 적용됨으로 폭력과 파멸을 단계적으로나마 막을 수 있고, 동시에 남북 갈등에 있어서 이 방식을 적용함으로 전쟁발발로 인한 참혹한 비극을 차단할 수 있다면 기꺼이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평화적 선제조치일 것인데, 필자의 견해로는 갈등의 당사자 가운데서 앞서 말한 삶의 기본가치에 내공이 상대적으로 크게 쌓인 측이 우선권을 쥐고 실행할 수 있다고 본다. 남북관계에 있어서 북과는 가치관 경쟁에서 비교도 못할 정도로 성공한 남한이 선제적 평화공세를 제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남북 간에 평화공존이 이루어 질 경우, 그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공존이 아니다. 전쟁과 폭력이 수반되지 않는 실질적인 삶의 영역에서 기본가치관을 중심으로 남북 간에 선의의 경쟁과 생산적인 갈등은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본다. 여기서 승리하는 쪽으로 통일의 길이 수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원수 사랑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이러하다. 상대방을 원수로 설정하고 사는 한 자기 자신의 뇌리와 가슴 속에 항상 원수가 꼿꼿이 서있으며, 자기 자신의 판단과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자기 자신이 종이고, 원수가 원치 않는 주인 행세를 하게 된다. 자유가 아닌 속박의 틀이다. 여기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자기 사랑과 자기의 진정한 삶을 위해서는 먼저 원수관계에서 해방을 받아 자유인이 되고, 나아가 원수에게 지지 말고 원수를 사랑으로 이기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로마서의 해법을 인용해본다(롬 12:17-21). 요지는 이것이다: “여러분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그 일은 하나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적대관계라는 갈등은 처참하다. 파멸의 블랙홀이다. 적대관계에 편승하면 적대관계의 노예가 된다. 이념적 적대관계는 이념의 노예를 만든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적대관계는 증오의 노예를 만든다. 신과의 관계가 적대관계이면 스스로 우상이 되어 파멸로 간다. 교리적으로 적대관계를 만들면 이단사설로 파멸의 길로 간다. 자기 스스로와의 적대관계는 자살을 낳는다. 이웃과 적대관계를 맺고 살면 살인과 사형으로 치달린다. 우리 사회에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나, 갈등이 악종이 아니라 선종일 경우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 민주사회에서 상보적 생산성으로 승화시켜 오히려 사회의 폭과 깊이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갈등이 심각하여 쉽게 “해소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최소한 그 갈등이 불치의 적대관계의 틀로 심화되지 않도록 갈등의 “평화적 관리”가 바람직하며, 이 일을 위해 특히 기독교 사회가 심혈을 기울일 것을 제안한다.                      
    • 오피니언
    • 기고.연재
    2020-01-13
  •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하자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상을 수상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하였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병들었거나 죽은 양심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았기에 세계가 인정하고 노벨 평화상을 수여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신동식 목사 양심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주신 선물입니다. 양심은 법조문이 없을 때 법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법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법이 무질서하게 되면 사회가 무질서해집니다. 법은 인간이 만든 최후의 보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의 정신이 무너지면 그 사회는 소망이 없습니다.그런데 법이 없을 때는 어떻게 사회가 유지 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양심이 법의 역할을 감당합니다. 그래서 법전이 없어도 양심이 법전이 되어서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합니다. 하지만 양심이 부패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심이 병들거나 죽어 버리면 사회는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양심을 지키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사람이 범죄 함으로 양심이 병들게 되었습니다. 양심이 병들자 나타나는 것은 브레이크가 없는 탐욕이 생겨났습니다. 이제 탐욕이 양심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피를 나눈 자신의 형제도 죽이는 잔인한 일을 합니다. 형제도 죽일 수 있다면 친척과 이웃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죽고 죽이는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양심이 굳어진 세상은 참으로 처참합니다.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세밀하게 주어지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양심이 죽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끔찍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양심이 바르게 작동할 수 있도록 말씀을 기록으로 남겨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손에 있는 성경은 양심이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표지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오직 고장 난 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나마 양심의 흔적이 있기에 세상은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하지만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양심이 회복되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임을 압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양심은 온전히 작동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양심이 부패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양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인 된 몸을 입고 있기에 늘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잠시 망각하기도 합니다.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나님은 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에 따라 양심이 작동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입니다. 여기서 성경대로 죽으셨음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성경대로의 죽음입니다. 이것은 언약 가운데 말씀하셨던 죽음입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죽음입니다. 그리고 삶의 새로운 빛을 주신 죽음입니다. 그 열매는 성경대로 부활하심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복음에 사로잡혀서 작동합니다. 복음에 사로잡힌 양심은 반드시 그에 걸 맞는 행동을 합니다.복음에 합당한 행동은 거듭난 양심의 증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동하지 않는 신앙은 바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행동하는 신앙은 복음에 사로잡힌 성도에게만 나타납니다. 복음에 이끌림을 받는 신앙은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입술만의 신앙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의 행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머리에서 시작하여 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손과 발로 나타나고 자신의 주머니에서 열매를 맺습니다.사람이 보고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알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합당하게 신앙 생활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진동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행동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실천으로 나타내고 교회를 건강하게 세웁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무너지는 것도 다 내부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나부터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할 때 교회가 세워지고, 가정이 행복하고, 나라가 건강해집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도 복음에 합당한 행동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시작하고 끝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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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연재
    2020-01-13
  • "본다고 하나 맹인 된 자들" (요9:1-12)
      대림다문화센터 대표, 대림중국교포교회 이선규 목사   사람은 누구나 두 눈이 있다고 해서 본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눈 뜬 소경이란 말이 있는데 그것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글을 터득하지 못한 사람에게 책을 갖다주면 하면 종이와 활자는 보지만 의미는 모르니 보나 마나 보아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악보를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악보를 주며 노래를 부르라 해도 악보는 보아도 노래는 나올 수 없으니 눈뜬 소경이다. 아무리 눈이 좋아도 먼 하늘의 성좌와 무궁한 공간의 천체를 보지 못하고 아무리 가까워도 공간과 물체 속에 꽉 차 있는 미생물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시간적으로도 먼 미래를 보지 못 할 뿐 아니라 다음 순간에 될 일도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다.먼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가까운 사람도 가까이 마주 대하고 대화를 하고 사귀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기에 사람의 가슴속 머릿속은 들어가 볼 수 없는 신비의 세계이다.   쉐익스피어의 햄릿에 보면 햄릿의 비밀을 캐러 온 두 사람에게 그는 피리를 내밀며 불라고 한다. 그러나 그 중 길레스탄은 “저는 불 줄을 모릅니다. 손이 움직이지 않아서 좋은 소리를 못 냅니다”라고 말한다. 그때 햄릿은 격한 어조로 “그럼 너는 나를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너는 내게 여러 가지 소리를 불게 하라고 하는데 마치 내 악보를 아는 체 하고 내 마음의 비밀을 다 캐내려고 최저음으로 최고음까지 불게 하려고 하지 않느냐. 보라. 이 작은 피리 속에 온갖 아름다운 음색 묘한 소리가 꽉 차 있다. 이것조차 불지 못하는 주제에 이 작자야, 나를 피리보다 쉽게 다룰 수 있다고 알아보았느냐? 멋대로 사람을 악기 취급하는 것은 네 자유지만, 나를 노하게는 할 수 있어도 내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오늘날 글 못 보는 소경은 많지 않고 악보를 못 보는 소경은 많지 않을지 몰라도 사람 못 보는 소경은 많을 것이다. 하물며 정신의 세계 영계를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은 얼마나 많을까? 주님은 스스로 잘났다고 하고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바리새인을 눈뜬 소경이라고 책망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나면서부터 눈먼 맹인은 인간들이고 바로 우리들 아닐까? 사람을 보면서 사람을 모르고 세상을 보면서 세상을 모르고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면서도 진리를 모르고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제자들은 눈먼 맹인의 눈을 뜨게는 못 하면서 그 이유를 캐묻고 아는 체 하고 이론을 따지기만 했던 것처럼 오늘의 종교, 철학, 윤리, 예술, 과학 정치, 경제가 인생과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암중모색하면서 마치 모든 문제를 자신들이 해결할 것처럼 우쭐대고 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행렬은 역사에서도 현대에 또한 미래에서도 보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이 소경이 된 원인이 자기 아비의 죄인가? 자기의 죄 인가를 따지고 묻기에 바쁘다. 그것이 제자들의 질문이었다. 이 소경이 나면서 눈먼 것이 자기 아비의 죄 때문입니까? 혹은 자기가 지은 죄 때문입니까?   스탠리 존스 박사는 인간은 고통과 불행의 책임을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첫째 유전, 둘째 환경, 셋째 운명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당하는 환경을 부모와 기성세대에게 돌리는 것이 첫째 경우이고 사회와 환경의 탓이라면서 이웃과 사회에 책임을 돌리는 것이 둘째이고 셋째는 알지 못하는 운명의 탓이라면서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아담과 이브의 후예로 그럴듯한 핑계이다. 이러한 것들은 어둠 속에서 사물을 보는 소경들의 공론일 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의 문제 불행과 불행의 문제를 조상 탓으로 돌리지 말라. 남의 탓으로 하지 말라 현재의 자기 탓이라고 한탄하지도 말라. 내일도 일반이라고 절망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 즉, 창조의 능력 사랑의 섭리, 구속의 은총, 재창조의 역사가 그에게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바로 나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것, 바로 우리에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인생은 눈먼 존재로 세상에 태어났다. 우리는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해야 한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나는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다. 흙을 이겨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니 그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눈을 뜨므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예배하게 되었다. 예수를 보게 되므로 빛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보게 되었다. 사람을 보게 되고 세상을 보게 되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알게 되었다. 나면서 소경인 사람은 자기 눈을 띄워 보게 해 준 예수를 보게 됨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무식한 소년도 보면서 믿게 된 예수를 꼭 같이 만나고 보면서 왜 유식하고 경건한 바리새인은 보지 못하는 눈뜬 소경이 되었나? 그들은 겉만 보고 속은 못 보고 소리만 듣고 의미는 모르고 형태만 보고 가치는 모르는 자들이다.   그릇된 선입견으로 하나님도 세상도 사람도 그릇 보고 있었다. 병 고친 날이 안식일이었는데 안식일에 일했으니 예수가 곧 죄인이라는 것이다. 안식일 때문에 안식일의 주인을 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모세의 율법을 잘 아니까 믿지만 저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고 모르니까 못 믿겠다는 것이다. 안다는 것을 잘못 알아 참 진리를 믿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가 누구였는지 내 눈을 뜨게 한 분이 사실인데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한데 왜 믿지 못하느냐는 소경의 증거를 듣고 네가 죄인으로 우리를 가르칠 작정이냐고 책망을 한다. 자기가 의인이라는 선입 주관 때문에 타인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된다. 바른 증거를 듣는 귀가 가리워 지고 말았다. 안식일과 율법과 자기가 우상이 되어 눈을 가리워 져서 예수님도 사람도 바로 보지 못한 것이다. 본다는 말은 의미를 알고 가치를 안다는 말이다.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구라파 상인들은 아프리카 소녀들이 공기돌을 갖고 노는 아이를 조그만 거울 하나씩에 막 바꾸었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모르고 자기의 생의 의의를 모르면 사람이 동물도 되고 기계도 되고 물질도 되고 악마도 된다.마구 값없이 인생을 처분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상속권을 팔았던 에서처럼 자기를 팔아 진주를 돼지에게 던져 버리고 자아를 상실하게 된다. 그 반대로 아무 가치 없는 것을 우상화하고 그 앞에 굴복하고 그것을 믿게도 된다. 부귀와 권세와 향락으로 썩어질 피조물의 종노릇을 하면서 묘지까지 걸어가게 된다.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고 부분을 전부라고 우기며 다투는 희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아래서 부각 된 인간은 “보라 새로운 피조물이 됐다”고 했다.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자신을 보게 된 것이다. 천하보다 귀한 인격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기를 찾는 것이다. 왕 같은 제사장, 택한 백성, 거룩한 나라가 된 인간의 존엄을 보게 된다.   자기의 가치를 발견하고 자기 생의 의미와 사명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와 교회를 사랑하는 자가 된다. 주께서 보시는 눈으로 이웃과 사회를 보게 될 때 사랑의 빛 아래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갖게 된다.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 세리와 창기, 탕자와 죄수, 강도와 원수까지 구속의 대상 사랑의 대상으로 보게 된다. 빛 속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내가 보니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는데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아름다웠다고 사도 요한은 땅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환란과 핍박이 있는데 밧모섬 이란 무인도에서 새 세계의 비전을 보게 된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맹인처럼 살던 신도들은 그리스도가 전 우주를 통치하는 영원무궁한 세계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영원을 보는 자는 하나님의 은총과 구속의 사랑을 입은 자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 중 “네가 본다 하나 실상은 눈이 멀었다” 하시고 스스로 다 아는 체 하는 바리새인에게 “차라리 보지 못하는 자인 줄 알았더라면 죄가 없을 뻔하였다”고 하셨다. 본다고 하니 아직 죄인이라고 하신다. 소경 된 사람은 구원하고 의인인 척하는 자들은 책망하신다. 나면서 눈먼 소경은 보게 되나 스스로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은 소경이 이라고 하신다.   지금도 구원받는 자는 보고 심판받는 자는 보지 못한다. 보는 자는 구원받은 자요. 보지 못하는 자는 아직도 구원받지 못하고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자들이다. 우리 눈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음은 헬렌 켈러의 기도이다. 그가 쓴 글에 “내가 만일 사흘만이라도 눈을 떠서 보게 된다면”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하루는 하늘에 해와 달과 그 뭇 별들을 보고, 땅에 피는 온갖 화초와 새소리 개울 물소리를 듣고만 알고 느낌으로만 알고 만져만 보던 그 아름다운 것들을 볼 것이요, 둘째 날은 뉴욕 박물관을 찾아 인류 역사상 인류가 남겨 놓은 모든 유물들과 그 유명한 모든 미술품들을 구경하겠고, 셋째 날은 나의 사랑하는 가족 친구 그리고 손으로 악수만 해오던 모든 친구들의 얼굴을 친히 볼 것이다.” 사흘만이라도 보았으면 하는 이 눈을 아니 일 년 아니 평생을 뜨고 볼 수 있는 분들은 아무 감각이 없을지 모르나, 나면서 소경 된 사람으로는 그 눈으로 보는 것이 실로 일각을 천금보다 더 귀하게 보았을 것이다.   우리 눈을 열어 보게 하옵소서. 주님과 세상과 이웃을 그리고 나 자신을 보게 하옵소서. 시간의 세계를 살아가지만, 영원을 보며 소원했던 헬렌 켈러의 간절한 기도가 떠오른다. 주여 보게 하옵소서. 새해의 나의 기도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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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0
  • 경단녀서 CEO로…’맘스라디오’ 김태은 대표
    ▲김태은 대표가 유튜브를 촬영하고 있다.   최근 육아를 콘텐츠로 한 스타트업을 설립해 경력단절을 극복한 맘스라디오 김태은 대표가 주목 받고 있다. 유튜버와 책 출간으로 엄마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된 그녀를 만나봤다.경단녀 엄마들과 함께 제작하는 콘텐츠 최근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기혼여성 중 상당수가 경력단절을 경험한다. 경력단절의 가장 큰 원인은 단연 ‘육아’ 문제다. 출산 이후 돌아갈 곳이 없는 엄마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맘스라디오’ 김태은 대표도 14년 경력의 베테랑 방송작가였지만 출산 후 경력단절을 경험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육아를 콘텐츠로 한 유튜브를 시작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방 한 켠에서 ‘왜 엄마를 위한 라디오는 없을까?’ 라는 짧은 질문으로 유튜브를 시작한 그녀는 모든 이들의 삶이 콘텐츠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업에서 실패한 것도, 하나님을 만난 것도, 특별히 내가 어떤 요리를 잘 하는 것도, 아이를 잘 키우는 것도, 글을 잘 쓰는 것도 다 콘텐츠거든요. 내 삶에 힌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두를 이유가 있게, 목적이 있게 지으셨기 때문에 그것이 공유될 때, 콘텐츠로 만들었을 때 누군가의 삶에는 도움이 되더라고요.”   ▲유튜브 '맘스라디오' 채널 캡처   맘스라디오는 구독자 4만 명을 훌쩍 넘기면서 많은 엄마들에게 호응을 얻고 있다. 육아하면서 생긴 불면증, 부부 간 부딪히는 육아법 등 엄마라면 모두 공감할 내용을 나누며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변호사를 게스트로 초대해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엄마들이 궁금해하는 법률적 고민을 해결해 주기도 한다.  다양한 콘텐츠에 김태은 대표 뿐 아니라 전문가 엄마들이 마이크를 잡았다. 엄마들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함께 방송을 꾸려 나가는 것이다.  공연 만드는 엄마들의 수다 ‘에미제라블’, 책 읽는 엄마 김보영 아나운서의 ‘우아한 Booking’, 후회 없는 육아를 위한 ‘박재연의 공감톡’ 등의 프로그램이 있다.  김 대표는 최근 유튜브를 하면서 나눈 다양한 경험들을 다룬 책, ‘엄마는 유튜브로 연봉 번다’도 출간했다. 자신처럼 유튜브를 하고 싶어하는 경력단절 엄마들을 위한 실제적인 팁을 기록했다.  맘스라디오는 시작한 지 2년 만에 매출 2억원을 달성했다. 김 대표는 수익금으로 미혼모와 아동학대 당한 아이들을 후원하는 등 선행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녀는 앞으로 힘들어하는 엄마들에게 손을 내밀어서 같이 성장하고 자기만의 콘텐츠를 가지고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은 소망을 밝혔다.  “하나님이 주신 엄마라는 사명은 한 생명을 날 믿고 맡겨주신 것이기 때문에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잖아요. 엄마들이 그 사명을 기쁘게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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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0
  • 하나님의 비전을 쫓는 삶 3
      ▲여주봉 목사 나는 지난번에 비전과 관련하여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 비전과 관련한 네 종류의 사람을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전은 그 단어(vision)가 의미하는 바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보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비유 또한 그 핵심은 결국 ‘보는 것’이다(마 13:10-17).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에서 씨앗은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가리킨다(19절).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함께 하나님의 통치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선포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한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고 계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그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라고 강력하게 촉구하셨다. 따라서 여기의 씨앗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예수님을 통해 행하고 계셨던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모든 일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 ‘씨앗’이 예수님을 통해서 사방으로 뿌려지고 있었다.이 비유에서 네 종류의 밭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메시지를 듣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놀라운 표적과 기사를 본 사람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예수님을 통해 행하고 계셨던 그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의 일들을 듣고 본 네 종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 당시 그 ‘씨앗’이 사방으로 뿌려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고, 그 결과 또한 하늘과 땅처럼 달랐다.비전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비유에서 길 가에 해당하는 자들이 바로 방랑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전혀 보지 못했다. 당연히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통한 그 놀라운 기적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말씀과 성령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듣지 못했고,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전혀 보지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비전을 전혀 보지 못했다.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기서 길 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누구보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13-15절 참조). 길 가는 굳은 마음을 상징한다. 즉,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과 지혜와 경험과 전통을 고집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행하심을 이리저리 판단하는, 배우고자 하는 자세가 전혀 없는 교만한 마음, 강퍅한 마음을 상징한다.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정확하게 그런 사람들이었고, 그 결과 그들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그 놀라운 역사들을 행하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러 곳에서 그들을 소경이라고 부르셨다.그 많은 성경적인 지식과 그 뛰어난 종교적인 헌신과 의식(儀式)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방랑자였다는 사실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보이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핵심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에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그들의 성경적인 지식이 정통적이었을지 모르지만(마 23:1-3 참조), 그들은 하나님과의 어떠한 인격적인 교제나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요 5:37), 당연히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전혀 알지 못했다(마 16:3). 그 결과 그들은 나름대로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고, 소위 신앙생활 열심히 하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았다. 심지어 그들은 앞장서서 하나님을 대적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그렇게 대적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개인 뿐 아니라, 교회도 방랑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는 복음 전파와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소명을 받았지만, 각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마치 큰 그림의 각 퍼즐 조각처럼 그리고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이 각기 달랐듯이, 다를 수 있다. 조지 바나는 같은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 할지라도 각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각기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만약 같은 지역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동일하다면, 그것은 서로 경쟁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교회가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면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기뻐하시는 대로 세워질 수 없다. 그저 벽돌만 많이 쌓아 놓는다고 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벽돌들이 설계도를 따라 각기 제자리에 놓여야 방과 부엌과 거실이 되고, 더 나아가 집이 된다. 그리고 건물이 그렇게 세워질 때, 어떤 건물은 가정집이 되고, 어떤 건물은 상가가 되고, 어떤 건물은 학교가 될 것이다.마찬가지로 사람만 많이 모인다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그 일에 성도들과 교회의 사역이 맞추어질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될 것이다. 또한 거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뒷받침이 있을 것이다.어떤 사람이 태평양에서 부지런히 그리고 사력을 다해 노를 저어 가는데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그런 사람이 바로 방랑자다. 그런데 조지 바나의 인터뷰 결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개인이건 교회건 혹은 기독교 단체건, 방랑자가 매우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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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0
  • 사람들이 기독교를 거부하는 세 가지 이유
        기독교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복음주의 기독교 변증가인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는 이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1. 응답받지 않는 기도 "신은 죽지 않았다(God's Not Dead)"는 영화의 끝 부분에 영화 내내 학생의 기독교 신앙을 공격하고 비꼬고 조롱하던 무신론자 대학 교수는 어린 시절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과 그녀를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던 자신의 응답받지 않은 기도가 자신을 결국 무신론자로 만들었다고 인정한다. 자신을 위로해주려고 애쓰던 목사님을 찾아가 나눈 대화에서, 그 목사님은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노(No)"라고 말씀하신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교수는 고뇌하면서 이 영화에서 가장 신랄한 말 중 하나를 말한다. "하나님은 노(No)라고 하실 때가 너무 많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실 때가 너무 많아.) 그 기도가 그저 차를 갖게 해달라는 것이나, 시험에서 A학점을 맞는 것이나,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하게 해달라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도가 당신의 친구나 당신의 자녀가 암으로 투병하거나, 오랜 실직으로 고통당하는 가정이거나, 약물 남용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한 사람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반복적으로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그 터널의 끝에서 빛은 나타나지 않았다. 성경의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는 사랑의 아버지라고 성경이 약속하지만 않았다면, 자녀들의 요청에 속히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약속하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고 약속하지만 않았다면 달랐을 것이다. 성경은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29),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6-8)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 비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기독교인들조차도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어렵고 고통스러운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과 다른 듯한 현실을 놓고 하나님의 약속과 퍼즐을 맞추기 위해 사투한다. 2. 악은 왜 존재하는가? 찰스 다윈, 테드 터너(CNN 설립자), 바트 어만(자유주의 신학자)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이들은 다른 분야의 전문가이지만, 모두 매우 강한 지성을 가지고 있고, 그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하게 되거나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불가지론자가 된 이유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그리고 이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악을 보면서 절대자 신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터너는 자신의 어린 여동생이 죽는 걸 봐야 했고, 다윈은 자신의 어린 딸 애니의 죽음을 겪었다. 어만은 신정론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인생에서 발생하는 악과 비극과 전능하고 선한 신을 화해시키는 문제는 불신자들과 신자들 사이에 끝없는 토론을 일으킨다. 자신의 자녀가 갑작스럽게 죽거나 퇴행성 질환으로 고통 당하다 천천히 죽어갈 때, 정치적 폭군에 의해 살해되거나 대학살을 당할 때, 전능하고 선한 신에 대해 혼란을 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악이 그들을 찾아올 때,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하고, 리차드 도킨스가 말하는 악의 존재에 대한 이유를 믿기 시작한다. 그는 말한다. "전자와 이기적 유전자, 통제 불능의 물리적 힘, 유전자 복제의 우주에서, 어떤 사람들은 상처 받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행운이 찾아온다. 거기에서 당신은 어떤 라임이나 이유도, 정의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관찰하는 우주에는 아무런 설계도, 목적도, 악도, 선도 존재하지 않는다. 통제 불능의 무자비한 무관심만 있을 뿐이며 그것만을 기대할 수 있다." 3. 말과 삶이 다른 그리스도인 바나 그룹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성인의 30%만이 복음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간디의 유명한 말과 일치하는데,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예수님의 행동을 반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명한 기독교 변증가인 래비 재커라이어스(Ravi Zacharias)는 자신에게 수 천 개의 기독교에 대해 도전하는 질문들이 쏟아지는데, 자신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한 힌두교 친구가 물은 질문이라고 했다. "너는 회심이 초자연적이지만 정말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아는 그렇게 많은 기독교인들의 삶에서는 왜 그것이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이 정말 삶에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못하는가?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교회 전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선행의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병원, 고아원, 학교, 재난 및 구호 단체, 노숙자 보호소, 의복 및 생필품 제공 등에 이르기까지. 이런 곳들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사랑의 증인이 되기 위해,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에 의해 설립되거나 운영되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말했다.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벧전 2:15) 여전히 잘못된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도 들려오지만, 그것은 일탈한 기독교인들의 개인적인 행동일 뿐이다. 4.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슈마허는 "기독교에 대한 이 세 가지 장애물에 대해, 나는 이 문제들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제기하지 않는 것들을 좀 생각해보라고 제안하고 싶다"면서 "이러한 장애물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과 모순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삶과 성경이 본질적으로 일치하지 않는 것을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성경에서 선인이 악인에 의해 살해 당하고(가인의 아벨 살해, 창 4:8), 기근이 일어나고(창 41:27), 라헬처럼 사랑하는 아내가 출산 중 죽고(창 35:19), 훨씬 더 악한 나라에 의해 나라들이 정복 당하고(단 1:1-2), 원수에 의해 생계와 가족, 건강이 파괴되었고(욥 1-2장),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태어난 자 중에서 이 사람보다 더 큰 자가 없다 했던 사람이 악한 여인에 의해 감옥에서 부당하게 살해당했고(마 11:11, 14:1-12, 세례 요한의 죽음), 의로운 사람의 진실한 설교가 거부 당하고 심지해 살해까지 당했으며(행 7장, 스데반의 순교), 생명의 구원을 놓고 기도한 위대한 기독교인들의 기도가 응답되기도 했지만 응답되지 않기도 했다(행 12:2,5,12, 기도로 감옥에서 풀려난 사도 베드로와 감옥에서 순교한 사도 야고보)고 지적했다. 그는 무고하고 죄 없은 한 사람의 기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죽음을 피해가게 해달라고 했던 기도는 거부되고(마 26:42), 원래 사형이 선고된 사람과 운명이 뒤바뀌어 십자가에서 처형 당했다(마 27:21)는 것. 하나님/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도, 성경에서는 이들의 영웅적인 면모와 함께 죄의 모습도 보여준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내 사라에 대해 두 번이나 아내가 아니라고 거짓말을 했고(창 12:13, 20:2), 야곱은 에서에게 임할 축복을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를 속였으며(창 27장), 다윗은 간음을 저지르고 그 여인의 남편을 죽였고(삼하 11장), 예수님의 제자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으며(26:47-50), 예수님의 제자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고(마 26:56, 마 26:69-75), 요한 마가는 바울의 선교 여행 도중 이탈했으며(행 13:13), 더마는 사도 바울을 떠났다(딤후 4:10)는 것. 슈마허는 "요즘은 악은 존재하고 기도는 응답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고, 믿는 자들의 성품의 결함은 성경 어디에서나 발견된다"며 "성경은 우리가 매일 매일 걸어나디는 불공정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것과 인생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나의 대답은 성경과 우리의 현실은 조화를 이루어 희망을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성경에서 우리는 무고하고 죄없는 사람의 구원을 위한 기도가 응답되지 않고, 친한 친구에 의해 배반까지 당하고, 악의 비극적 희생자가 본 것처럼 된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악으로부터 위대한 선을 보시는 것을 보게 된다. 성경은 왜 이 모든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사흘 후에 보여준다"고 말했다. 성경에서 우리는 왜 악이 존재하는지(사단에 의해 악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해 언젠가 어떻게 하실 것인지, 왜 기도가 자판기처럼 응답되지 않는지, 왜 신실한 신앙인들이 그것이 가짜인 것처럼 행동하는지에 대해 발견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이러한 대답을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이 길의 끝이 무엇인지 하나님처럼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음으로 걸어갈 뿐"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때로는 이것이 어렵다"면서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키는 이 세 가지 중요한 이슈를 자신의 삶에서 직접 당하시고 견뎌내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시선을 고정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신뢰함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그 문제들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글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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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9
  • 2020년, 교회는 세상에 무엇을 줄 것인가?
      ▲이효상 목사ㅣ교회건강연구원장   2020년 새해, 새날이 밝았다. 섬기는 교회와 가정, 그리고 이 민족과 겨레의 가슴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하며, 이 땅에 평화가 가득한 한해가 되기를 기도한다. 2020년, 새로운 10년을 준비해야 할 대전환의 때이다. 금년은 역사적으로 유관순열사 순국100주년이자, 6.25전쟁 발발 70주년을 맞는 동시에 4.19혁명 60주년이다. 근대사의 굴곡진 역사를 되돌아보게 된다. 4월에는 총선이 있다. 국내정치는 포플리즘의 극치를 넘어 날마다 발표되는 선심정책으로 경제는 기력을 잃어가고 있다. 나라 경제가 거덜나며 빚은 쌓여만 간다. 우리 외교는 고립되고 안보는 불안하다. 자유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해 과거에 매몰된 무능한 운동권에 의한 탈이념화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다. 이를 둘러싼 국론분열은 이미 위험 수위에 달했고 심화된 사회갈등은 적대적 진영간 갈등과 대립으로 고착화되어가고 있다.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론 안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어 어떤 식으로든 선거에서 민심에 표출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일련의 정치적 갈등을 미래의 희망으로 치환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차분함과 시대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진중함이 요청되어 진다. 2020년 분열된 지금의 초갈등사회에 교회는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교회와 크리스천은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한다. 선명한 복음의 본질과 십자가의 영성 회복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2020년, 한국교회는 십자가 정신과 그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크리스천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삶을 보여야 한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돌려대는 삶’ ‘고발하여 속옷을 빼앗으려고 하면 겉옷까지도 내어주는 삶’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까지 라도 동행해 주는 삶’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삶’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삶’이 그것이다.   지금 교회가 할 일이 많다. 교회는 아무리 힘들고 바뻐도 10년후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3.1운동의 일으킨 주류종교로서 민족이 사는 길,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며 그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의 자립을 모색해야 한다. 지금과 같은 모습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것인가. 다음세대에게 어떤 모습을 남겨주고 싶은가. 그래서 과거의 민족주의 대신 미래와 글로벌 시민으로 시선을 돌려 국제적으로 당당하고 자부심 넘치는 나라가 되도록 하는 캠페인을 교회가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교회는 한강의 기적을 만든 국민적 역량을 다음세대와 함께 미래세대가 희망을 갖는 나라를 만들어 가는데 시간이 걸리더라도 관심과 역량을 쏟아야 한다. 다음세대가 우리와는 다른 세대가 되지 않도록 믿음을 전승하고 역사를 전승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다음세대를 생각하고 더 많은 고민과 관심을 기울여야 하겠다.   상처받고 병든 심령, 초갈등의 병든 사회를 치유하고 회복케 하는 유일한 길은 '건강한 교회운동'이 대안이자 해답이다. 교회는 ‘건강한 교회’ 운동을 통해 세상 속에 교회의 교회다움을 회복하며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건강한 교회운동‘은 막힌 시대의 물꼬를 터주고 대안을 만들며 사회와 소통하고 역사를 품는 공교회 운동이다. 새해에는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교회가 연합하고 협력하여 ‘건강한 한국교회’를 세우겠다는 결심과 함께 3.1운동하는 심정으로 우리 사회의 품격을 한 단계 더 올려놓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새해에는 점점 더 커지는 양극화로 내몰리는 서민들의 삶에 관심과 손길을 펴야 한다. 교회가 다시 사는 길은 가슴을 넓혀 갈등과 분열의 시대에 보수든 진보든 함께 품어야 한다. 집안에는 여러 자녀가 있는 것처럼 교회에도 마찬가지이다. 하물며 나라에도 다양한 세력이 존재한다. 궁극적 목표는 그것을 넘어 십자가의 길을 가야 살 수 있다. 그 길이 민족이 사는 길이자 제2의 안창호, 유관순의 길이고. 자주 독립국가의 길이다.   2020년, 새로운 꿈과 도전, 변화를 위한 열정으로 새 출발하자.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의 나침반이다.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어디서 멈춰야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스펙트럼의 빛이다. 그래서 늘 눈부시다. 교회는 이 사회의 파숫군이다. 어디쯤 새아침이 밝아오는지, 어떻게 어둠을 떨치고 일어서야 하는지를 알리는 나팔 소리이다. 그래서 늘 깨어있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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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연재
    2020-01-08
  • “생물은 결코 우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눈에도 보이지 않는 이 작은 미생물은 어떻게 그렇게 정교한 단백질을 만들 수 있을까? 정말로 오랜 시간에 걸쳐 우연히 진화하여 그렇게 된 것일까? 오늘날 과학이 발달하였다고 하나, 이 작은 미생물이 만드는 단백질 하나도 생물학자들은 실험실에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하찮은 대장균이 만들어내는 단백질 한 개쯤은 가장 진화된 생명체라는 인간이 쉽게 만들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대장균이 만드는 단백질 하나도 만들 수 없는 것일까? 우리 사람의 몸 안에는 자그마치 5만 종류가 넘는 다양한 단백질들이 있는데 이것은 또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100조 개에 달하는 인간의 각 세포는 매초마다 2천 개의 단백질을 만들어낸다. 모든 세포는 잠시도 졸지도 않고 쉬지도 않으며 어떤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일하고 있음에도 너무도 조용히 일하고 있기에 우리 사람들은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이 모든 생체 컴퓨터를 설계하고 가능하게 하신 분은 누구일까?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편 136편 5절). 파스퇴르는 이 말씀과 그 사실을 잘 아는 과학자였다. 다만 부정되는듯하던 생명의 자연 발생설이 20세기에 들어와서, 그래도 생물은 우연히 자연 발생되었다고 생각한 소련의 유물론 생화학자 오파린의 화학 진화설에 의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때 생명이 어디로부터 왔는가 생각해낼 수 있는 이론이 우연주의 진화론뿐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렇게 생명은 생명으로부터만 가능하다는 유명한 생물 속생설을 증명한 파스퇴르이지만, 그의 업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마 또는 두창이라고도 부르는 천연두는 천연두바이러스에 의해 일어나는 무서운 전염병이다. 수년전 세계의 의학자들은 이 병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 질병이라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에드워드 제너(1749-1823, 그는 목사의 아들이었다)라는 영국의 한 크리스천 의사가 발견한 예방접종에 의해 우리 몸에 이 질병을 이길 수 있는 면역이라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예방주사를 맞으면 가벼운 병에 먼저 걸리게 되어 우리 몸에 그 병에 대한 저항력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천연두뿐 아니라 다른 전염병에도 이와 같은 예방접종을 하면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이 바로 파스퇴르다. 먼저 가벼운 병을 일으켜 면역을 얻게 하려면 특별한 배양균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것을 백신이라고 부른다. 백신이나 예방접종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파스퇴르였다. 예방주사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우리 인류는 여러 가지 전염병으로 커다란 고통을 당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파스퇴르의 이와 같은 명성은 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가축들 사이에 유행하던 무서운 탄저병에 대한 백신을 개발하였을 때 그 당시 많은 의사들과 수의사들은 그가 만든 백신을 믿지 않았다. "의사도 아닌 파스퇴르가 조금 유명해졌다고 마치 예방주사로 모든 전염병을 물리칠 수 있는 것처럼 고집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주로 면양과 소 말 등의 초식 동물들에게 많이 발생한 탄저병은 다리가 몹시 약해져서 무리를 따라다니지 못하게 되고 비틀거리다가 갑자기 죽어버리는 병이었다. "탄저병은 이 병에 걸려 죽은 동물에게서 살던 세균이, 벌레 등을 통하여 주위의 풀들을 오염시켜서 이 풀을 먹은 다른 동물들이 전염되는 것입니다. 내가 개발한 백신을 맞으면 탄저병을 막을 수 있습니다." "파스퇴르의 주장은 엉터리야. 이번에야말로 우리들이 파스퇴르의 코를 납작하게 만듭시다." 파스퇴르의 업적을 시기하던 많은 과학자들은 그가 개발했다는 백신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 기회야말로 파스퇴르의 명성에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당시 의학 협회에서는 그가 무엇을 발표하면 의사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줄 개랭이라는 의사는 그와 주먹다툼 일보직전까지 가고 결투를 신청할 정도로 의사들은 그의 연구 성과들을 불신하였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업적에 대해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일부 있다. 그런 오해를 품은 사람들 대부분은 그의 성격과 인격을 들먹거리곤 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는 그가 한 분야의 개척자로서 얼마나 많은 오해와 불신을 이겨내고 위대한 과학적 성취를 했는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공개적인 예방접종 실험의 성공 1881년 5월 5일, 파스퇴르는 연구와 실험뿐 아니라 오해와 시기 그리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삼중고의 상황 하에서 마침내 과학사에 있어 유명한 공개실험을 시작하였다. 실험 장소는 프랑스 물랑의 근처 마을인 푸이르포르란 곳의 어느 수의사 목장이었는데, 그도 파스퇴르의 입장에 반대하던 사람이었다. 프랑스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영국 런던에 있는 《더 타임스》지에서는 특파원을 보낼 정도였다. 의사와 수의사 그리고 농학자들과 여러 과학자들이 이 흥미 있는 실험을 보기 위하여 모여들었다. 그들은 파스퇴르의 실험이 실패하고 말 것이라고 공공연히 떠들어댔다. 참으로 이 실험은 파스퇴르 개인의 자존심과 명예가 걸린 실험이었다. "하나님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도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건강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예방접종이야말로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 25:40). 그는 이미 실험실에서 확인하였던 이 실험이 반드시 성공해서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풀고, 큰 경제적 부담이 없이 사람과 동물들에게 이 방법이 널리 보급되기를 기대하였다. 실험에 사용된 면양은 모두 60마리였다. 이중에서 10마리는 그대로 두고, 나머지 50마리의 면양을 각각 25마리씩 나누어 두 무리로 분류하였다. 파스퇴르와 그의 조수들은 25마리를 다른 무리와 구별하기 위해 한쪽 귀에 구멍을 뚫고 이들 면양에게만 탄저병 백신을 주사하였다. 그런 다음 50마리의 면양을 함께 목장에 풀어주었다. 2주일 후에 보니 접종을 받은 면양들은 가벼운 병을 앓았지만 모두 회복되어 있었다. 5월 17일, 파스퇴르와 조수들은 백신을 한 번 더 접종하였다. 그리고는 면양들이 또 한 번 가벼운 병에 걸린 다음 회복되는 그달 말까지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2주일 후인 5월 31일, 파스퇴르 일행은 다시 목장으로 나갔다. 이번에는 50마리의 면양들 모두에게 탄저병을 일으키는 맹독의 배양균을 오른쪽 넓적다리에 주사하였다. "이제 6월 2일이 되면 아무런 접종을 받지 않았던 면양들은 모두 죽을 것이지만, 먼저 예방접종을 받았던 면양들은 한 마리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파스퇴르는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장담하였다. 이것은 자신의 명예를 건 엄청난 도박이었을까? 아니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그의 확신이었을까? 드디어 역사적인 6월 2일이 되어 많은 구경꾼들이 목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물랑 농업회의 회장인 프랑스 농림성의 고관도 있었다. 그밖에도 의사와 수의사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의 신문사 기자들이 지켜보았다. 그들이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그날의 결과는 파스퇴르가 예언한 바로 그대로였다. 목장에는 22마리의 면양들이 나란히 죽어 있었으며, 그 옆에는 2마리의 면양들이 괴로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도 한 시간이 채 가기 전에 숨을 거두었고, 나머지 한 마리도 결국 그날을 못 넘기고 죽고 말았다. 그러나 접종을 받은 면양들은 모두 살아서 유유히 풀을 뜯고 있었다. 실험은 이렇게 끝났다. 이 실험의 결과에 대해 당시 영국 《더 타임스》지의 특파원은 이렇게 기사를 썼다. "이제 농업계는 전염병에 대하여 의심할 여지없이 예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예방법은 비싸지도 않으며 어렵지도 않다. 단 한사람이 하루 1000마리의 면양을 접종 시킬 수 있다." 그 후 2년 동안 약 10만 마리의 동물들이 접종을 받게 되었다. 이 중 탄저병으로 죽은 동물은 단지 650마리에 불과 하였는데, 이것은 접종이 있기 이전에 10만 마리당 약 9000마리가 이 병으로 죽었던 것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이 실험을 통하여 예방접종의 효험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사람과 동물을 전염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백신의 개발이 점점 더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여러 업적은 차치하고, 오직 이 한 가지 사실 만으로도 파스퇴르는 분명 인류에게 크게 기여한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러나 파스퇴르에 대하여 우리들이 지나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사실이 또 한 가지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겸손한 믿음이다. 곤충학자 파브르와의 인연 파스퇴르는 한때 『곤충기』를 써서 유명한 파브르와 사귐을 가진 적이 있다. 당시 프랑스 남부 지방에서는 누에에서 실을 얻는 양잠업이 성행하였는데, 그 누에에 병이 크게 번져 양잠업자들이 큰 타격을 받고 있었다. 누에의 몸에 반점이 생기는 이 병을 연구하던 파스퇴르가 당시 유명한 곤충학자였던 파브르를 찾아간 것이었다. 파스퇴르는 파브르보다 꼭 한살이 위였다. "파브르 선생, 누에에 생기는 이 반점은 원인이 무엇일까요? 곤충에 대해 누구보다 애정이 많으신 파브르 선생께 조언을 구합니다." "질병의 치료에 관해 파스퇴르 박사만큼 유명하신 분이 누가 또 있습니까? 큰 도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 두 사람이 작디작은 미생물과 곤충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랑하고 관심을 갖게 돠었다는 것이 참으로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요즈음 교회에서 과학 강좌를 열고 있지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창조 세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듣고는 큰 은혜를 받곤 한답니다." 파스퇴르는 비록 파브르에게서 누에의 질병치료에 대한 큰 도움을 얻지는 못했지만, 같은 신앙인으로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프랑스가 낳은 두 유명한 생물학자가 동시대인으로서 모두 생명의 우연발생을 부정하고 진화론을 반대한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은 우리들의 흥미를 끈다. "자연 발생이 일어난다는 것은 생식 인자가 나온다는 것이요 생명이 우연히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생명부여자로서의 창조주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물질이 하나님을 대신하게 되며 하나님은 단지 우주 운동의 부여자로서만 가끔 기억될 것이다." 이렇게 파스퇴르는 우연주의 진화론을 부정하였다. 파스퇴르는 결국 6년 만에 혼자의 힘으로 누에의 질병을 일으키는 두 가지 형태의 박테리아를 찾아내고 치료하는 방법도 알아내어 프랑스의 양잠업을 되살렸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끈기를 이어받은 파스퇴르는 정말로 집념의 과학자였다. "의지, 일하는 것 그리고 기다림은 사전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이다. 이 세 단어야말로 내게 성공의 금자탑을 줄 세 개의 초석이다." 10대 초반 그가 썼다는 이 말은 그가 지닌 끈기가 어떠하였는가를 상징적으로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1881년 탄저병 실험이 있은 후 어느 유명한 신문은 그를 가리켜 "프랑스 과학의 영광"이라고까지 칭송한 적이 있다. 이만큼 그의 업적은 프랑스를 뛰어넘어 모든 인류에게 커다란 은인이었다. 이런 그가 매우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를 더욱 감동시킨다. "나는 내가 무엇을 알면 알수록, 내 믿음이 겨우 시골 농부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고 느끼곤 합니다." 파스퇴르는 이렇게 나이가 들면서 믿음이 점점 깊어갔다고 알려지고 있다. "아마 황태자께서 도착하신 것 같군요. 제가 좀 더 일찍 입장했어야 했는데------ 참으로 죄송합니다." 런던서 개최된 국제 의학 회의에 프랑스 대표로 참가하여 회의장인 세인트 제임스 홀에 그가 들어섰을 때,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듣고 그가 멋쩍어하며 했다는 이 유명한 이야기도 그의 성격의 일단을 보여주는 일화다. 파스퇴르의 노년 1888년 파스퇴르는 개의 질병인 광견병의 예방과 치료법을 개발한 공로로 프랑스 정부에서 마련해준 '파스퇴르 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되었다. 연구소 낙성식에서 파스퇴르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후 디프테리아의 연구에 마지막 온 힘을 쏟던 그는, 지병인 중풍(뇌출혈)이 악화 되어 1895년 9월 28일, 73세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갔다. 파스퇴르가 숨을 거둘 때 그는 한손으로는 아내의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십자가를 쥐고 있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의 건강과 병 없는 사회를 위하여, 집념과 끈기로 온몸을 바친 이 경건한 믿음의 과학자 파스퇴르를 사용하신 것이다. 파스퇴르가 세상을 떠나자,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이름으로 장례를 치러 국가와 인류에게 공헌한 그의 업적을 기렸다. 국민들 모두가 그를 칭송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리고 이제 파스퇴르가 프랑스 최고의 위인들이 묻힌 파테온 묘지에 묻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그만 문제가 생겼다. 파스퇴르의 일평생 훌륭한 내조자였던 그의 부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묻힌 팡테온 묘지에는 남편 파스퇴르의 시신을 절대로 보낼 수 없다고 고집스럽게 버틴 것이다. 결국 그의 시신은 파스퇴르 연구소 지하에 묻히게 되었다.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었을까? 그의 묘지 천장에는 4명의 천사가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과학이라고 새겨진 명패를 각각 하나씩 들고 오늘날도 그의 믿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한 사람의 고집스런(?) 믿음이 하나님을 믿은 한 과학자의 생애를 생생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꾸준히 알리게 된 것이다. 얼마나 멋진 고집(?)인가! 이런 일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안타깝기만 하다. 아무튼 파스퇴르가 근대 의학 연구의 진정한 창시자라는데 대해 오늘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더불어 그는 병리학과 면역학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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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7
  • 선교사들의 새해맞이
                                                                                                          ▲정용구 선교사   2020년이 시작됐다. 선교사들도 선교지에서 새해를 맞이한다. 필자가 사역하던 선교지에서는 한국의 ‘송구영신예배’를기억하면서 한인들이 한인교회에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면 치안도 불안하고, 현지인들도 새해를 맞이한다는 기쁨에 마음이 들떠서 술을 마시고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많다. 특별히 늦은 시간에 외국인들이 모임을 하거나, 이동을 할 경우 쉽게 주목받기 때문에 신변에 위험을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이 많다. 따라서 자정 가까운 시간에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것은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런 만큼 송구영신예배 시간만큼은 고국에 있는 성도들과 같이 예배를 드린다는 설정 아래, 한국시간으로 새해가 되는 시간을 계산해 예배를 드렸다. 한국시간으로 자정은 선교지 현지시간으로 오후 8시 30분이다. 이 시간대는 별 무리 없이 안전하게 송구영신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송구영신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이제 선교현지 시간으로 자정이 되기에 한 번 더 새해를 맞이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선교사들도 신정(1월 1일)이나 구정을 맞이하면 한인마트를 통해 비싸지만 어렵게 떡을 구해서 떡국을 끓여 먹는다. 선교지에서 감히 떡국을 먹을 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를 드리고, 특별히 한국음식이 몇 가지 더 곁들여지면 감사가 이어진다. 많은 선교사들이 이런 특별한 날을 기억하고, 한국에서 올때 가지고 오는 대표적인 식자재 중에 하나는 잡채를 만들기 위한 ‘당면’이다. 부피는 크지만 무게가 가벼워서 항공기로 오는 편에 넣어도 크게 무리가 되지 않고 ‘한국의 잔치음식’으로 내놓기에도 가장 적절한 음식이기에 이런 특별한 날에는 잡채 요리를 많이 접하게 된다.식사 후에는 선교사 자녀들의 세배가 이어진다. 현지 학교 교복과 편안한 옷에 익숙한 선교사 자녀들이 갑자기 등장한 ‘한복’을 입는다. 어색하고 낯설어서 그런지 행동이 부자연스러워진다. 한국에 왔을 때에는 주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세배를 했던 기억이 있었던 그들이 마주 대하는 것은 선임 선교사나, 나이가 좀 있으신 선교사님께 세배를 하게 된다. 선교사자녀들은 한복도 어색하고, 세배도 어색하다. 세배를 받는 분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지만 이 모습을 지켜보는 동료 선교사들은 너무나 즐거워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선교사 자녀들이 ‘자신들의 진짜 부모들께 세배를 드리면, 부모들이얼마나 좋아하실까?’라는 생각과 함께 고국에 계신 부모를 생각하면서 조용히 눈물을 훔친다.이어지는 순서는 ‘윷놀이’다. 한국에서야 볼 것이나 할 것도 많지만, 선교지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래서 가장 많이 하는 것중 하나가 ‘윷놀이’다. 선교지에서 윷놀이는 묘한 감정을 불러오기도 한다. 오랜만에 승부욕을 발휘해 열기가 더해진다. 그럴 때면 늘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선교지에서 일하는 선교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에 서로 놀라기도 한다.선교사들은 짧지만 이를 통해 잠시 고국을 생각하며 새해를 맞이한다. 한국을 그리워하며, 잠시나마 한국 음식과 놀이로 그리움을 달랜다. 또 이러한 시간이 되면 잊지 않고 고국을 위해 기도한다. 특별히 한국교회의 영적인부흥과 선교를 향한 열심이 일어나기를 위해 기도한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선교사들의 기도가 응답이 되도록, 하나님이주신 2020년 하루 하루를 귀하고 소중하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경험하는 은혜가 이어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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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06
  • 성탄절, 9명에게 새 생명 선물하고 떠나
    ▲ 성탄절 40대 뇌사자가 9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고 떠나 감동을 전했다.   40대 남성이 성탄절에 장기기증으로 9명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고 떠나 감동을 전했다. 24일 보건복지부 장기이식등록기관인 사단법인 생명을나누는사람들에 따르면 경기도 수원시 아주대학교병원에 뇌사상태로 입원 중이던 송모(43) 씨가 이날 오후 5시께부터 장기기증을 위한 적출 수술에 들어갔다. 수술은 성탄절인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질 전망이다.화물운송기사이던 송 씨는 지난 15일 자정께 경기도의 한 고속도로에서 트럭을 운전하다가 사고로 머리 등을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뇌사상태에 빠졌다.생명을나누는사람들의 상임이사 조정진 목사는 송 씨의 지인에게서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가 송 씨의 베트남인 아내와 모친에게 장기기증을 설득했고, 가족들은 그의 장기와 조직을 기증하기로 결정했다.적출 수술을 진행한 아주대병원은 송 씨의 심장과 간, 췌장 등 장기 9개와 안구, 연골과 피부 등 조직을 이날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KONOS)로 보내 필요한 환자들에게 제공되도록 할 예정이다. 아울러 생명을나누는사람들 측은 송 씨의 남은 가족들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 송 씨는 한국말이 서툰 아내와 18개월 된 아들, 암 투병 중인 모친과 함께 살다가 사고를 당했다.조 목사는 "송 씨의 장기로 9명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고 그의 조직으로는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혜를 보게 된다"며 "세상에 큰 선물을 주고 떠난 송 씨의 남은 가족을 위한 후원계획을 기독교대한감리회 측과 함께 세우고 있다"고 밝혔다.송 씨의 모친은 "아들이 죽음을 맞게 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하니 장기기증에 동의했다"며 "나도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인데 아들의 장기가 다른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장기기증과 송 씨에 대한 후원 문의는 생명을나누는사람들(☎ 1588-0692)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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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6
  • "겸손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성탄에 널리 퍼지길"
    한교연 대표회장 권태진 목사   한교연(한국교회연합, 회장 권태진 목사)은 2019 성탄절 메시지를 전했다. 이들은 “전쟁의 소식, 군중의 아우성, 미움, 분열뿐만 아니라 창조 원리를 역행하는 일이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이들은 “죄와 사망으로 결박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다”며 “환영하며, 찬양하며, 영접 한다”고 전했다. 또 이들은 “겸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친구가 되셨다”며 “이처럼 천하보다 귀한 생명들 각자가 존중받는 나라가 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와 섬김과 빛의 정신이 이번 성탄에 온누리에 회복이 돼야한다”며 “ 겸손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이 땅에 이뤄지는 성탄이 되길 바란다”고 역설했다. 다음은 논평 전문이다.   한교연 2019 성탄절 메시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임마누엘!죄인 되어 사망에 결박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이 땅에오신 것을 환영하며 찬양하며 영접합니다.어둠에 속한 백성에게 참 빛으로, 사망에 잡힌 자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셨습니다.분열이 있는 곳에 화합을,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사망이 있는 곳에 생명으로, 짐승만큼 낮아진 자리인 말구유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눈 어두워 보고도 알지 못하고 대적하며, 사망의 길을 스스로 선택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성탄의 정신이 너무나 필요한 때입니다. 전쟁의 소식과 군중의 아우성 소리가 정치, 경제, 안보, 문화 곳곳에서 들리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의 중심에도 빛이 없어서 창조의 원리를 역행하는 인명 경시 풍조가 만연해 있습니다.이 모든 것을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온 인류가 이번 성탄에 평화와 화해를 통해 서로 사랑으로 질서를 잡아가기를 소망합니다.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피조물이며 그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함으로 모두는 자유와 평화, 인권을 보장받으며 행복한 나라에 살 수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정신이 바로 주님의 정신입니다.오늘날 사회 뿐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곳도 세속적 물질주의와 물량주의에 붙잡혀 가진 자와 힘 있는 자가 지배하는 원리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공의와 섬김과 빛의 정신이 이번 성탄에 온누리에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탄생하신 예수님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소외된 자들의 친구로 그들을 돌아보는 삶을 사셨습니다. 겸손한 그리스도의 정신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성탄이 되길 소원합니다.특별히 지금 한국교회는 바울 사도가 탄 로마로 향하던 배가 유라굴로 풍랑을 만난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해와 달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때이지만 희망은 있습니다.우리 한국사회와 교회는 빛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기와 6.25의 환난 때도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민족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선조들의 신앙을 계승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어나가는 큰 능력과 기쁨을 얻는 성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할렐루야!! 2019. 12. 25 한국교회연합 대표회장 권태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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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6
  • 성육신의 은혜
    ▲이학박사(물리학)·밝은빛명광교회 교육목사   성탄의 계절이다. 성탄절이 되면 동정녀(童貞女) 탄생의 신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동정녀 잉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생물학적으로 동정녀 탄생의 가능성 여부를 질문할 일이 아니다. 이런 질문은 하나님의 관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무지의 소치다.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면서 동시에 창조에 참여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사람과 같은 방법으로 오실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일한 대책이신 주님이 친히 이 땅에 오신 이 신비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들어 있다.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희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자비가 있다. 예수님은 구속주로 오시면서도 선민의 혈통만을 고집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배려는 예수님을 유다와 그 며느리 가나안 여인 다말의 후손으로, 모압 여인 룻(룻 4:17-22)과 보아스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시도록 하셨다.대개 인간이 지어낸 여러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을 다스리려고 이 땅에 출현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 땅에 다스리기 위해 오시지 않으셨다. 왕께서 자기 백성을 섬기려고 오셨다.인생을 구원하기 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바치기 위해서 오신다. 이것이 무슨 과학으로 이해돼야 할 일인가?세상에 많은 종교가 있고 그 교조(敎祖)가 있다. 그러나 그 교조들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구주 예수님을 제외하고, 다른 종교의 교조는 아무도 절대 주권을 가진 창조주가 아니다.또한 다른 종교의 교조들은 정상적인 잉태과정을 거쳐 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100% 인성만을 가지고 있다. 신성(神性)이 수도(修道)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반면에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은 독특한 방법으로 잉태되셨다. 동정녀 잉태이다. 죄성 없는 잉태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100% 사람이시면서 동시에 100% 신이시다. 세상을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의 이 땅에 오시는 방법이다. 아무도 이 사실을 흉내 낼 수 없다. 동시에 부인할 수도 없다.그러면 과연 이 일은 과학적으로 가능할까? 한마디로 전혀 불가능하다. 이 동정녀 잉태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사실을 설명해 보려고 몇몇 과학자들이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창조의법칙을 만드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특별한 방법, 즉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초과학적 섭리로 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천지를 창조하시고 물리 세계의 법칙마저 창조하신 창조주 그 분만이 초과학적으로 이런 일을 하실 수 있다. 이것도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다. 그것을 우리 과학으로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저 ‘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그러나 기적의 법칙도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대한 독특한 섭리 사역이다. 주님이 그렇게 오신 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부른다.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할 뿐이다.“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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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24
  • 하나님의 비전을 쫓는 삶 2
    ▲여주봉 목사   지난번에 나는 개인 뿐 아니라, 교회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서, 특히 하나님의 행하심에 동참하는 삶을 사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비전이라는 사실과 비전의 성격에 대해서 나누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비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비전과 관련하여 네 종류의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이다.존 맥스웰 목사는 비전의 4단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참고로 존 맥스웰 목사는 비전의 성격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나나 조지 바나나 헨리 블랙가비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방랑자. 비전을 전혀 볼 줄 모른다.졸병. 비전을 볼 줄 알지만, 자신의 것으로 추구하지 않는다.성취자. 비전을 보고 그것을 추구한다.리더. 비전을 보고 추구하며 다른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나는 그 부분을 약간 변형하여 비전과 관련하여 사람들을 다음과 같이 네 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비전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해서, 그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방랑자.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는 사람.겁쟁이.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만 대가 지불이 두려워서 가지 못하는 사람.성취자.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온 삶으로 달려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룬 사람.리더.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온 삶으로 달려가 하나님의 비전이 그를 통해 성취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그 자리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방랑자. 방랑자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가 말하는 방랑자는 자기가 세운 비전이나 목표 혹은 꿈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삶과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없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심각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 방랑자가 매우 많다는 것이다. 조지 바나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어른들, 십대들, 목회자들, 교회 스텝들, 정계와 재계 리더들, 비영리 단체와 선교단체의 장들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무려 20만 건의 넘는 인터뷰를 가진 후에 내린 몇 가지 결론을 그의 책 『The Power of Vision』에 기록하고 있다. 그 중 몇 개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비록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고 사역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대부분의 담임목사들은 그들이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에 대해 이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들의 회중들의 삶과 지역사회의 삶에 거의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비전의 개념에 대해서 안다. 그러나 그들의 삶과 사역에서 하나님의 비전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역 교회에 내에서 당회나 청빙위원회가 담임목사를 청빙하면서 그를 검증하는 핵심적인 기준으로서 교회의 비전을 의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비슷하게 모든 개신교 교회 20개 중 한 교회보다 더 적은 수의 교회만이 그들의 평가 과정에 대한 열쇠로서 그들의 비전 진술서(vision statement)를 사용한다.”이것을 보면, 오늘날 안 믿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방랑자인 것을 볼 수 있다.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다.비전과 소명은 다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혼동하는 이유가 소명과 비전의 차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개인이건 단체건 그것은 소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전은 소명과 다르다. 비전은 소명 그 이상이다.한 예를 들어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복음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 그 중에서도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다. 나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 삶을 드렸고, 그것을 위해 준비했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신학교에 다닐 때 나는 공부가 그렇게 재미있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사람들은 종종 나에게 신학교 교수가 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신학교 교수가 될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목회자로서의 나의 소명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1991년 이전에는 방랑자였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나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을 전혀 보지 못했다.하나님의 교회도 마찬가지다. 모든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고, 구제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다. 그리고 각 교회는 그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여러 목표를 가지고 그 일에 헌신하며 섬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 교회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은 아니다. 조지 바나도 그런 점에서 교회의 mission(소명)과 비전을 분명하게 구분하면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mission을 비전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한다.하나님의 비전과 하나님의 소명은 각기 서로 다르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우선, 우리의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더 명확하게 해준다. 예를 들어서, 내가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나의 목회를 위한 하나님의 비전이 내가 목회 중에서도 어떤 종류의 목회를 해야 할지를 명확하게 해준다. 또한, 우리의 사역을 위한 비전이 하나님의 소명을 위한 일 중에서도 어떤 일에 우리의 시간과 정력과 물질을 투자해야 할지, 하나님을 위한 일들 중 어떤 일을 거절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등 우리의 사역을 위한 방향을 설정해 준다. 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행할 때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뒷받침을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목적과 뜻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뒷받침하신다. 이것은 개인과 단체 모두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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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17
  • 포스트 비전트립
    ▲정용구 선교사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로 당시 121만 명에 불과했던 연간 대한민국의 출국자 수는 2019년 올 한해 2,890만 명에 달했다. 엄청난 숫자가 해외로 나간다. TV에서도 드라마와 요리 방송 못지않게 많이 방영되는 것이 ‘여행’ 프로그램이다.교회의 비전트립(‘단기선교’, 이하 ‘비전트립’)도 옛날에는 주로 여름에 많이 진행됐지만 요즘에는 겨울에도 적지 않은 팀들이 사역을 진행한다. 비전트립에 대한 책을 쓰고,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팀을 만들어 인솔도 한다.특히 선교현지에서 선교사로서 팀을 받아 본 입장에서는 비전트립팀이야 말로 너무 귀한 하나님의 선교자원이다. 비전트립을 위해 적지 않은 훈련과 팀워크, 선교지를 방문해서 선교사와 선교지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경험하고 본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선교를 위해 가장 근접하게 준비된 일꾼’들이다. 모두가 선교사로 나가지 않아도 ‘선교를 위한 동역’으로 ‘가장 큰 선교동력’이 될 가능성이 많은 집단이다. 그러기에 이들이 비전트립 후에 구체적인 선교동력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들이 선교현장에서 보고 배운 귀한 것을 자신의 교회에서 더 구체적인 선교사역으로 이어지도록 사명을 가지고 ‘선교동력’으로 자신의 교회에 녹아져야 한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다음과정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비전트립을 다녀 온 뒤에 많은 선교학교나 훈련들이 이어지지만 그 중간단계에서 더 구체적이고, 선명한 연결고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언젠가 문화공연 기획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를 통해 기획자는 관객들을 위해서 사전에 공연에 대한 역사적 흐름이나 등장인물들에 대한 사전 지식을 제공한다. 또 공연 후에는 관객들과 함께 다시 공연 후 이해되지 않거나, 자신의 느낌을 나누는 과정을 거쳐 공연을 더 깊게 이해하도록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 과정을 비전트립에도 좀 적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비전트립을 위해 선교현지도 미리 공부하고, 사전준비와 훈련도 한다. 또 현장에 가서 많은 경험을 한다. 그럼에도 비전트립을 마친 후에 더 진지하게 공부하고 훈련하는 팀을 잘 보지 못했다. 비전트립의 현장사역 기간 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는 짧은 일정에서 놓친 부분이나, 함께 나누지 못한 마음을 같이 나누고, 어렵게 만든 선교동력을 계속 이어나가면 좋겠다. 하지만 이를 위한 구체적인 모임에는 에너지를 많이 쏟지 않는 것 같다. 귀국하는 공항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비전트립 선교보고예배와 영상과 회계결산으로만 마무리하면 안 된다. ‘선교동력을 향한 연결 사역’이 구체적으로 만들어져야 한다.예를 들면 다녀 온 사역에 대한 ‘심화연구, 발전된 후속사역 준비, 다음 팀을 위한 훈련, 6개월, 혹은 1년 사역 이어가기, 비전트립팀의 선교동력을 통한 우리교회 선교활성화’ 등으로 이어가기를 기대한다. 한 번의 비전트립에는 많은 수고와 인력과 재정이 들어간다. 이 귀한 선교동력을 한 번의 이벤트 행사로 그치기보다 교회의 제대로 된 선교동력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그 동안의 비전트립이 ‘가는 것’에 많은 비중을 뒀다면 이제는 ‘갔다 와서’에 비중을 둔 ‘포스트 비전트립(Post Vision Trip)’을 통해 더욱 성장하고, 내실 있는 비전트립이 되기를 기대한다.이를 위해 비전트립을 한 번이라도 다녀온 사람이라면 어떻게 비전트립이 ‘다음세대 한국교회 선교동력’이 되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지금의 자리에서 함께 했던 비전트립을 함께 갔던 지체들과 이 과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제안해 주기를 기대한다.                          
    • 오피니언
    • 기고.연재
    2019-12-17
  • 청소년들의 눈으로 본 교회
    ▲정재영 교수 교회학교의 쇠퇴   최근 한국 교회에서 주일학교가 점차 사라지고 있어 비상 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것이 어제 오늘의 현상은 아니지만 주일학교는 감소를 넘어 해체로 치닫고 있다.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규모는 더욱 확산되고 있다. 2010년부터 주요 교단이 총회에 보고하는 교세 현황은 주일학교 해체의 심각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교단에서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8년 기준 중고등부가 없는 교회 48%, 중등부가 없는 교회 47%, 초등부가 없는 교회 47%, 유년부가 없는 교회 47%, 유치부가 없는 교회 57%, 유아부가 없는 교회 97.4%, 영아부가 없는 교회가 78.5%에 이른다.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교회에 중고등부와 유초등부가 없는 형편이다. 다른 교단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2015년 인구센서스에서 우리나라 10대의 종교 구성비에서 개신교가 22.1%가 나온 것을 보면 비율 면에서 개신교 청소년 수가 적은 것이 아니라 저출산으로 인해 청소년 인구 자체가 줄어든 것이 큰 원인이라 여겨진다. 10년 전에 비해 10대 개신교 인구가 7.1%, 10세 미만이 17.3% 줄어든 것이 이를 말해준다. 또한 교회 규모가 교인 수 50명 이하의 작은 교회의 경우에 주일학교를 따로 운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교인 수 100명 이하의 소형 교회가 전체 교회에서 대략 70% 정도를 차지하고 그 중에서 50명 이하의 교회가 또한 70% 정도를 차지한다고 추정한다면 전체 교회에서 약 절반 정도의 교회에 주일학교가 없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측되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주일학교를 늘리는 것은 출산율 증가와 같은 외부 요인이 작용하고 있으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이 직접적인 대책이 되지는 않겠으나 교회마다 교회 학교 교사 지원도 줄고 있고 그나마 운영되고 있는 주일학교도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청소년들의 신앙생활에 큰 유익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따라서 현재 교회 중고등부를 활성화할 뿐만 아니라 기독 청소년들이 신앙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교회연구소>와 <한국교회탐구센터>가 공동으로 기독 청소년들의 인식 조사를 실시하였다. 기독 청소년에 대한 실증 조사가 거의 없는 데다가 기존의 조사가 실태 파악 위주로 이루어져서 교회나 교회 중고등부에 대한 이들의 인식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 조사에서는 어른들의 관점이 아니라 청소년의 관점에서 교회와 중고등부에 대한 평가를 하도록 함으로써 교회 학교 운영에 기초 자료로 삼고자 하였고, 중고등부 예배가 없어서 어른 예배를 드리는 경우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청소년들의 인식도 파악하여 기독 청소년들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갖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청소년 사역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가족 종교화 되는 기독교 이 조사 결과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모태신앙 50.8%를 포함하여 초등학교 이전에 교회에 출석하는 비율이 70%에 이른다는 결과는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해서 정착한다는 면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중고등학생 때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뜻이다. 특히 교회에 출석한 계기는 70% 정도가 부모를 따라서 왔다고 응답하여 비기독교인 가정에서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는 매우 적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현재 교회에 다니는 이유에 대해서도 예배나 설교가 아니라 가족을 따라서 다닌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는 점에서 가족 종교화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기독교가 끼리끼리의 종교로 전락할 우려도 나타내고 있다.그리고 여러 항목에서 부모가 모두 교회 출석할 경우에 신앙의 영향이 크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부모 모두 비기독교인인 경우에는 교회에 계속 다닐 의향도 상대적으로 낮게 나와서 기독교 가정이 아닌 학생들에 대해 보다 큰 관심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부모 중 한분만 교회에 다니는 경우에 가정 안에서 교회에 나가고 신앙 안에서 양육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신앙생활에 대해 더 강요받는다는 느낌을 받고 있고 교회에 대한 이미지도 더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가나안 성도들에 대한 기존 연구에서 신앙의 강요가 교회를 떠나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자녀의 신앙 교육에서 보다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기독 청소년들이 신앙성장에 가장 도움을 받는 것은 예배/설교라고 했지만, 학생예배에 대한 만족도는 51.2%로 높지 않았다. 어른 예배에 드리는 경우보다 오히려 낮게 나왔다는 점에서 학생 예배에 대한 재조정이 필요해 보인다. 특히 공과공부에는 70% 정도만 참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만족한다는 응답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여 학생 예배를 드리는 청소년들 중에 3분의 1 정도만 공과공부를 의미 있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공과공부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또한 지도 목회자에 만족도가 비교적 낮게 나온 것에 대해서도 검토가 필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가장 모범이 되고 영향을 받는 인물은 부모였고, 특히 어머니의 영향이 큰 것으로 나타나서 부모에 대한 교육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진다.다음으로, 경제 수준이 높을수록 아버지가 기독교이 비율과 부모 모두 기독교인 비율이 많아진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것은 경제 수준이 낮을 경우에는 아버지가 신앙생활을 하기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경제 수준이 낮을수록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는 시간이 많고 특히 자영업자들의 경우 휴식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영업에 매달려야 하는 실정이므로 종교 활동에 시간을 할애하기 매우 어려운 형편이다.또한 경제 수준이 상층인 학생들과 기독교인 부모를 둔 학생이 상대적으로 삶의 만족도가 높게 나타난 결과로 볼 때 경제 수준이 낮고 그래서 부모 모두 교회에 나오기 어려운 경우에 자녀가 교회에 나오기도 쉽지 않고 삶의 만족도 낮은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경제 수준이 낮은 경우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낮게 인식하여 경제 수준이 낮은 청소년들이 신앙적으로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회 밖 청소년에 관심 가져야 이 조사에서는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이른바 가나안 청소년들의 대해서도 조사했는데, 이 경우 역시 부모의 신앙 여부가 중요한 요인으로 나타났다. 부모가 모두 비기독교인이거나 모두 교회 출석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본격적인 관심이 생길 시기인 중학교 때 교회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으며 교회를 떠난 이유도 교회 출석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 가장 큰 것으로 나와서 이 시기에 신앙이 잘 정립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 중에 절반은 여전히 분명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4명 중 3명은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 싶다고 했으며 10명 중 6명은 교회에 다시 출석하고자 하는 의향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와서 이들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여기서 우리는 본래 주일학교가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들을 위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산업혁명기의 영국에서 서민 자제, 특히 노동하는 아동을 대상으로, 일요일에 학교를 개설하여 무상교육을 실시했던 자선교육 기관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제도화가 되어서 교회 안에 있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신앙 교육을 하고 이들을 관리하는 기관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이번 조사 결과처럼 교회 청소년들이 대부분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인 상황에서 교회 밖 청소년들에 대해서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구체적인 사역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특히 경제 수준이 높고 안정된 부모를 둔 자녀들이 교회에 더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교회가 저소득층의 청소년들, 이른바 위기 청소년들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소년들에 대한 교회의 사역이 교회 안 청소년들을 관리하는 수준을 넘어서 교회 밖 청소년들에 대한 선교적 차원의 다양한 사역들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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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연재
    2019-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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