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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말의 때’ 오직 하나님만 알아… 정확히 안다고 하는 사람은 짝퉁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바티칸 궁전 시스티나 성당에 1534년부터 7년 동안 그린 ‘최후의 심판’.  요한계시록 20장에는 천년왕국과 마지막 때에 관한 놀라운 기록이 남아 있다. 1000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건 무의미하다.1000이란 숫자는 유대문화에서 축복의 완전성을 상징한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한없는 축복을 ‘천 배의 축복’(신 1:11)과 ‘천대의 은혜’(신 5:10)로 표현했다. 베드로는 주의 날을 준비하라 권하면서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고 했다. 성경의 1000년은 문자적 1000년이 아니다. 하나님 이외의 누구도 정확한 기간, 시점의 길이와 양을 알 수 없다.이런 배경 지식으로 사도 요한이 봤던 요한계시록 20장의 환상을 다시 보자.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옛 뱀이요 마귀이자 사탄인 용을 잡아 1000년 동안 결박해 무저갱에 던져 넣는다. 이는 1000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계 20:1~3)요한계시록 12장에 등장한 천사장 미가엘과의 영적 전쟁에 패해 하늘로부터 내쫓긴 옛 뱀이요 마귀, 사탄인 큰 용이 1000년 동안 무저갱에 던져진 것이다. 이 사건이 이미 예수의 초림 시 일어난 사건인지, 아니면 재림 시 일어날 사건인지 복음주의 학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이 다양하다.개인적으로 이중적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사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 사역으로 주님 앞에 철저히 굴복했다. 그러나 아직 우리 가운데 남아있다. 주님 재림 때 완전히 굴복할 것이다.결국 ‘이미’와 ‘아직’의 긴장 사이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선취됐지만, 아직 우리 역사 속에서 성취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이미 승리한 천상교회와 아직 전투 중인 지상교회 이야기가 함께 전개된다.천년왕국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1000년 동안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고 했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계 20:4)천년왕국도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신실한 성도들은 이 땅에서부터 왕 노릇 하고 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라.”(계 5:9~10)천년왕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천상과 지상교회에서 이미 시작됐다. 다만 우리 역사 속에서 아직 그 나라가 완성되지 않았다. 그 날과 그 시는 알 수 없으나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복음 전파를 위해 순교한 영혼과 짐승이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이 1000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한다는 것이다.천년왕국에 대해 ‘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 등 다양한 신학적 주장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와 아직의 긴장 관계, 천상교회와 지상교회의 관점에서 천년왕국을 해석할 경우 모든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이 재림 주인 자신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한다. 신천지 집단의 실상이다. 이들은 신천지가 세워진 1984년 3월 14일 천년왕국이 시작됐다고 본다. 신천지가 인정해야만 천년왕국에 들어갈 자격도 얻는다고 말한다. 허무맹랑하다.종말도 이미 실현된 종말과 아직 실현되지 않은 종말로 나눌 수 있다. 요한계시록의 종말은 악인에게는 재앙과 심판, 두려움의 사건이다. 반대로 신실한 지상교회 성도들에게는 새 창조의 역사로 구원과 회복, 기쁨과 환희를 상징하는 축복의 사건이다.우리는 매 순간 삶 속에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을 맞이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제 마지막 시간을 허락하실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 날이 온다는 점이다. 이를 신학적으로 개인적 종말이라 한다.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다.개인의 차원을 넘어 역사 전체가 마지막 때를 맞이하는 역사적 종말도 있다. 역사적 종말의 때 역시 오직 하나님만 알 수 있다. 주님은 마태복음 24장 36절에서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했다. 그 날과 시를 정확히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짝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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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7
  • 선교사가 겪는 코로나19 위기
      ▲정용구 선교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초기에는 중국 내 확진자가 전 세계 뉴스로 보도되면서, 한인 선교사들의 경우 선교지에서 중국인으로 오해받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의 확진자가 급진적으로 증가하자, 선교지에서 한국에 대한 혐오도 늘었다. '코리아'와 '코로나'라는 비슷한 발음으로 놀림을 받았다는 지역도 있었다. 선교사들의 사역도 신천지처럼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의 주범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인들의 입국 금지를 하는 나라들이 늘어났다. 이때만 해도 많은 선교사는 한국에서 예배당 출입을 폐쇄하고, 예배를 중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국의 상황을 걱정했다. 그런데 코로나19의 확진자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 지역에서 한국보다 더 많은 확진자가 나오고, 중동과 미국에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확진자로 전 세계가 국경을 폐쇄하게 됐다. 또 항공 및 모든 출입국을 막는 조치를 강행하면서 선교사들은 몸으로 이 위기를 체감하게 됐다. 인도는 자국 내 거주 한국인의 모든 비자를 무효화했다.  그런 가운데 선교 현지에서 급속도로 확산되는 코로나19 확진자의 증가로 외국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자국으로 철수하라는 행정 명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급박하게 나오려고 했으나 공항 폐쇄로 인해 구입한 항공권도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수 없이 항공권 변경을 위한 연락을 해도 항공사나 여행사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아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구입했던 항공권의 환불은 나중에 처리하더라도, 곧바로 운항이 가능한 항공권을 구입하자니 가격이 너무 비싸다. 혹 구입을 하더라도 공항폐쇄나 이동 제한 명령에 발이 묶이면, 항공권으로 인한 손실이 불가피해져 항공권 구입을 고민하는 연락이 많았다.  방송 등 언론보도에 의하면 우리 정부에서 국적기나, 전세 항공기를 보내면 뭔가 지원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몇몇 선교지의 한인회나 대사관을 통해서 알아보니 이 경우도 자기 부담금이 원칙이며, 그 비용이 일반 항공요금보다 꽤 비싸다고 한다. 늘 저가 항공기를 이용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여러 번 경유하는 항공편을 애용하는 선교사들의 형편으로는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특히 한국의 많은 후원교회가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대신 인터넷이나 가정예배를 드리다 보니, 헌금을 드리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에게 선교비 송금을 임시 중단한 교회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선교지에서 이동도 못 하고, 선교비 지원이 끊어진 상황에서 버텨야 하는  선교사들의 어려움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특히 한국의 분위기도 초기와 달리 해외에서 유입되는 확진자의 증가로 인해 귀국했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도 느껴진다고 한다. 특히 선교사들의 경우 스스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자가 격리를 하려고 해도 부족한 안식관 시설과, 일반 시민들의 생활 터전 중심에 자리 잡은 안식관에서는 외국에서 온 선교사를 받는 것도 부담스럽다.  지금 코로나19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건물주는 임대료를 줄이고, 지방 자치단체는 자금 지원에 나서고 있다. 또 몇몇 대형교회들로부터 작은 교회의 임대료 지원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현실에서 선교 현지에서 몸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선교사들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도울지를 같이 고민하고, 이 위기를 같이 이겨 나갈 지혜를 모아야 한다. 가장 절실하게 어려움을 겪는 안식관과, 선교사들의 항공권 비용을 위한 지혜와 동역의 손길이 선교사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초기에는 중국 내 확진자가 전 세계 뉴스로 보도되면서, 한인 선교사들의 경우 선교지에서 중국인으로 오해받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의 확진자가 급진적으로 증가하자, 선교지에서 한국에 대한 혐오도 늘었다. '코리아'와 '코로나'라는 비슷한 발음으로 놀림을 받았다는 지역도 있었다. 선교사들의 사역도 신천지처럼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의 주범으로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인들의 입국 금지를 하는 나라들이 늘어났다. 이때만 해도 많은 선교사는 한국에서 예배당 출입을 폐쇄하고, 예배를 중지한다는 소식을 듣고 고국의 상황을 걱정했다. 그런데 코로나19의 확진자가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전 지역에서 한국보다 더 많은 확진자가 나오고, 중동과 미국에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는 확진자로 전 세계가 국경을 폐쇄하게 됐다. 또 항공 및 모든 출입국을 막는 조치를 강행하면서 선교사들은 몸으로 이 위기를 체감하게 됐다. 인도는 자국 내 거주 한국인의 모든 비자를 무효화했다.  그런 가운데 선교 현지에서 급속도로 확산되는 코로나19 확진자의 증가로 외국인들은 정해진 시간에 자국으로 철수하라는 행정 명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급박하게 나오려고 했으나 공항 폐쇄로 인해 구입한 항공권도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수 없이 항공권 변경을 위한 연락을 해도 항공사나 여행사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아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구입했던 항공권의 환불은 나중에 처리하더라도, 곧바로 운항이 가능한 항공권을 구입하자니 가격이 너무 비싸다. 혹 구입을 하더라도 공항폐쇄나 이동 제한 명령에 발이 묶이면, 항공권으로 인한 손실이 불가피해져 항공권 구입을 고민하는 연락이 많았다.  방송 등 언론보도에 의하면 우리 정부에서 국적기나, 전세 항공기를 보내면 뭔가 지원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몇몇 선교지의 한인회나 대사관을 통해서 알아보니 이 경우도 자기 부담금이 원칙이며, 그 비용이 일반 항공요금보다 꽤 비싸다고 한다. 늘 저가 항공기를 이용하고, 비용 절감을 위해 여러 번 경유하는 항공편을 애용하는 선교사들의 형편으로는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특히 한국의 많은 후원교회가 예배당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대신 인터넷이나 가정예배를 드리다 보니, 헌금을 드리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선교사들에게 선교비 송금을 임시 중단한 교회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선교지에서 이동도 못 하고, 선교비 지원이 끊어진 상황에서 버텨야 하는  선교사들의 어려움은 더욱 깊어지게 된다.  특히 한국의 분위기도 초기와 달리 해외에서 유입되는 확진자의 증가로 인해 귀국했다고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도 느껴진다고 한다. 특히 선교사들의 경우 스스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자가 격리를 하려고 해도 부족한 안식관 시설과, 일반 시민들의 생활 터전 중심에 자리 잡은 안식관에서는 외국에서 온 선교사를 받는 것도 부담스럽다.  지금 코로나19의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건물주는 임대료를 줄이고, 지방 자치단체는 자금 지원에 나서고 있다. 또 몇몇 대형교회들로부터 작은 교회의 임대료 지원 이야기도 나온다. 이런 현실에서 선교 현지에서 몸으로 어려움을 겪는 우리 선교사들을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도울지를 같이 고민하고, 이 위기를 같이 이겨 나갈 지혜를 모아야 한다. 가장 절실하게 어려움을 겪는 안식관과, 선교사들의 항공권 비용을 위한 지혜와 동역의 손길이 선교사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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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07
  • 코로나가 가져다준 선물
      송길원 목사(청란교회·하이패밀리 대표)   나는 배웠다. 모든 시간은 정지됐다. 일상이 사라졌다.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만나도 경계부터 해야 한다. 여러 사람이 마주 앉아 팥빙수를 겁 없이 떠먹던 날이 그립다. 가슴을 끌어안고 우정을 나누던 날이 또다시 올 수 있을까. 비로소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배웠다.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 그래서 기도한다. 속히 일상의 기적과 함께 기적의 주인공으로 사는 일상을 달라고.나는 배웠다. 마스크를 써 본 뒤에야 지난날 내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고 침묵을 배웠다. 너무나 쉽게 말했다. 너무 쉽게 비판하고 너무 쉽게 조언했다. 생각은 짧았고 행동은 경박했다. 나는 배웠다. ‘살아있는 침묵’을 스스로 가지지 못한 사람은 몰락을 통해서만 ‘죽음으로 침묵’하게 된다는 사실을.나는 배웠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정치인이 아니었다. 성직자도 아니었다. 소식을 듣자 대구로 달려간 신혼 1년 차 간호(천)사가 가슴을 울렸다. 잠들 곳이 없어 장례식장에서 잠든다는 겁 없는 간호(천)사들의 이야기에 한없이 부끄러웠다. 따뜻한 더치커피를 캔에 담아 전달하는 손길들을 보며 살맛 나는 세상을 느꼈다. 이마에 깊이 팬 고글 자국 위에 밴드를 붙이며 싱긋 웃는 웃음이 희망 백신이었다.나는 배웠다. 죽음이 영원히 3인칭일 수만은 없다는 것을. 언젠가 내게도 닥칠 수 있는, 그래서 언제나 준비돼 있어야만 하는 것이 죽음인 것을 배웠다. 인간이 쌓은 1000만의 도성도 바벨탑이 무너지듯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미생물의 침투에 너무도 쉽게 쓰러질 수 있는 존재인 것을 배웠다. 그런데도 천년만년 살 것처럼 악다구니를 퍼붓고 살았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를 배웠다.나는 배웠다. 인생의 허들경기에서 장애물은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라’고 있는 것임을.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재정의하고 살아남아 영웅이 될지, 바이러스의 희생양이 될지는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 닥친 불행과 시련을 운명이 아닌 삶의 한 조각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그때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었다.나는 배웠다. 카뮈의 ‘페스트’에 등장하는 북아프리카의 항구 오랑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의 최대 피해 지역인 대구는 ‘공황도 폭동도 혐오도 없었다. 침착함과 고요함이 버티고 있었다.’(미국 ABC 방송 이언 기자) 일본 대지진 때 일어났던 사재기도 없었다. 오히려 ‘착한 건물주 운동’으로 서로를 감싸 안았다. 외출 자제로 인간 방파제가 돼 대한민국을 지켰다. ‘배려와 존중’으로 빛났다.나는 배웠다. 어떤 기생충보다 무섭고 무서운 기생충은 ‘대충’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대충이었다. 손 씻기도 대충, 사회적 거리 유지도 대충, 생각도 대충…. 이제는 나 스스로 면역주치의가 돼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환경 문제나 생태계의 파괴가 남의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또다시 찾아올 바이러스에 대처하기 위해 두 눈 부릅뜨고 환경 지킴이가 돼야 한다. 나는 확실히 배웠다. 공생과 공존이 상생(相生)의 길이라는 것을.나는 배웠다. 가장 큰 바이러스는 사스도 코로나도 아닌 내 마음을 늙고 병들게 하는 절망의 바이러스라는 것을. 나는 배워야 한다. 아파도 웃어야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아니 그게 진정한 인간 승리임을. 나는 기도한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게 해 달라고.”“안코라 임파로.”(Ancora imparo)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는 이탈리어다. 세기의 천재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비롯해 수많은 명작을 남긴다. 많은 세월이 흐른다. 인생의 황혼 녘인 87세 때 자신의 스케치북 한쪽에 남긴 글이다. 내 나이 60을 넘겼다. 그래, 우리는 모두 살아야 한다. 잘 살기 위해 배워야 한다.“안코라 임파로!”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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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31
  • 내 백성을 구별하리라
    ▲이정기 목사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될 때, 제일 먼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전세기를 띄워 대피시킨 나라가 미국이다. 그리고 연이어 프랑스, 호주, 영국, 일본, 한국이 전세기를 띄워 대피시켰다. 자기 나라 백성이기에 보호한 것이다. 그리고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나라들이 중국인 입국을 금지시켰다. 북한, 대만, 베트남, 필리핀, 인도, 러시아, 몽골, 말레이시아, 싱가폴, 미국, 홍콩, 호주, 이스라엘, 뉴질랜드, 많은 나라들이 중국인 입국을 금지시켰다.일찍이 중국인 입국을 금지시킨 대만이나 러시아 베트남 같은 나라들은 확산이 더딘 반면에, 우리나라나 일본처럼 후베이성에 한해서 금지한 나라는 확진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래서 이제는 세계 180개 국가가 한국발 여행객의 입국을 금지시키는 상황이 되다. 그래서 인천 공항이 텅텅 비어있다. 박항서 감독으로 인해서 한국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베트남 마저도 한국사람들을 피하고 있다. 호텔에서는 한국 사람들에게는 방을 주지 않고 있다. 유럽도 안일하게 대처하더니 지금은 중국보다 확진자가 더 많아졌다. 이제는 유럽에 있는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애써야 할 상황이다. 끝까지 힘써야 한다. 대한민국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라들도 자기 백성들을 구별한다.  하나님도 자기 백성을 구별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실 때 애굽의 바로왕이 순순히 보내주지 않자 애굽에 재앙을 내리신다. 모세가 지팡이로 하수를 치니 피로변한다. 지팡이를 잡은 손을 운하와 못위에 펴니 개구리들이 올라와 애굽땅을 덮는다. 그런데 첫 번째와 두 번째 재앙인 피와 개구리 재앙은 애굽의 술객들도 따라한다. 그러나 세 번째 재앙은 사전 경고도 없었고, 애굽의 술객들도 따라하지 못한다. 지팡이로 땅의 티끌을 치니 온 땅의 티끌이 다 이가 되어 사람과 생축에게 오른다. 그때서야 애굽의 술객들이 바로에게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출8:19> 고 고한다.  그런데 네 번째 재앙부터는 양상이 달라진다. 애굽 백성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별하셔서 애굽 땅에만 재앙을 내리신다. 출 8:20-23절을 보면 '내 백성'이라는 표현이 4번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신다. '내 백성을 보내라. 내 백성을 보내지 아니하면 애굽땅에 파리떼가 가득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땅은 구별하여 파리가 없게 할 것이다.' 내 백성을 특별하게 구별하겠다고 말씀하신다.구별하신 이유는 단순하다. '내 백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자녀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다. 사 4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명하여 부르시고 너는 내것이라고 소유 삼아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물가운데 지날때에 물이 침몰치 못하도록, 불가운데 지날때에 불이 사르지 못하도록 지켜주시고,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셨다. 다섯 번째 재앙인 가축들이 전염병으로 죽는 재앙에 애굽의 모든 가축은 죽었다.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않았다.<출9:6절>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이 애굽의 모든 사람과 짐승과 밭에 있는 모든 채소 그리고 모든 나무를 꺾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있는 고센 땅에는 우박이 없었다.<출9:25-26절> 아홉 번째 흑암 재앙이 애굽 온 땅을 덮어 사람들이 3일동안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다.<출10:22-23절> 마지막 열 번째 재앙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굽의 장자들이 다 죽었다. 처음 난 짐승들까지 다 죽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개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출11:5-7절> 하나님께서 애굽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를 구별하셨다. 그래서 애굽땅에 재앙이 있을때 고센땅에는 없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구별해주시는 것이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구별해주시는 것이 축복이다.  구별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출애굽기 20장부터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세상 사람과 구별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먹을 것과 먹어서는 안될 것을 구별시켜 주셨다. 취할것과 취해서는 안될 것을 구별시켜주셨다.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될 것을 구별시켜주셨다. 날도 구별시켜주셨다. 사람도 구별시켜주셨다. 장소도 구별시켜주셨다. 언어도 구별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것도 구별시켜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 물질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십일조이다. 아무리 바빠도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주일성수와 기도생활이다. 아무리 힘든 문제가 있어도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찬송과 감사이다. 이것이 구별된 삶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다.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씀이 많이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진실하신 하나님 등 많이 있는데 가장 많이 쓰여지는 말씀은 '거룩하신 하나님'이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성도'는 '거룩한 무리, 거룩한 백성'이란 뜻이다. 이 "거룩"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코데쉬", 헬라어로 "하기오쉬네"라고 하는데 "구별되다"란 뜻이 있다. 그러므로 구별되게 사는 것이 거룩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구별하신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구별하신다. 예배드리는 자와 예배 드리지 않는 자, 순종하는 자와 순종하지 않는 자, 기도하는 자와 기도하지 않는자, 충성하는 자와 게으른 자, 양과 염소를 구별하신다. 알곡과 쭉정이를 구별하신다. 천국에 갈 자와 지옥에 갈 자를 구별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특별히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건져주시고, 응답하시고, 축복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구별되게 살자. 그래서 구별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많이 받으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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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30
  • 하나님이 설계하신 교회 모습은 ‘공동체’
      포항중앙침례교회 성도들이 지난 1월 15일 경주 켄싱턴리조트에서 개최된 전교인 수련회에서 함께했다.  교회는 1년에 두 차례 전교인 수련회를 진행한다. 포항중앙침례교회 제공  교회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너무나 필요한 곳이고 동시에 중요한 곳이다. 안타깝게도 갈수록 교회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교회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다 보니 교회를 쉽게 생각하고 이 교회 저 교회를 옮기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설교를 잘하거나, 특별한 무엇을 가진 교회가 생기면 많은 사람이 그런 교회로 수평 이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수평 이동이 많아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그런데 이제 수평 이동 정도는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이유는 아예 교회를 안 나가는 교인들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에는 ‘가나안(안 나가)’ 교인들이 많은데 이 문제는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자를 망하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이미 우리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를 불필요한 곳으로 생각하고 있고 심지어는 교회를 타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까지 있다. 과연 교회가 필요 없거나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그런 곳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2) 에베소서 1장 20~23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신 후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으며 또 교회가 그분의 몸이 되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구원 역사를 완성하신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는 말은 구원과 교회가 별개가 아니라 구원과 교회는 연결되는 것이며 한 덩어리라는 말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교회의 일원이 돼야 한다. 이것이 정상이다. 이처럼 구원받은 사람에게 교회가 필요 없을 수 없기에 구원받은 후 교회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주셨다. 신자에게는 교회가 있다. 교회는 영적인 가정과 같다. 갓 태어난 영적인 유아도 영적인 부모의 양육과 형님 오빠의 도움을 받아 건강하게 자라며 동시에 내면의 상처도 치유 받고 모난 인격도 다듬어간다. 교회는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배려와 축복이요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교회가 이런 곳이기에 교회에 속해 지체로 살아가는 사람과 교회 없이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만약 교회가 없다면 이 악한 세상을 혼자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그런데 교회에 속한다는 말의 의미는 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구원을 받은 모든 신자는 몸 안에서 서로 연결돼야 한다. 몇 사람이 모이든 교회는 서로 연결이 되어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태생적으로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공동체성을 추구하는 교회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는 당연히 한 몸, 즉 공동체여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설계하신 교회의 모습이다.“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 교회는 마디를 통해 모든 사람이 연결되고 결합돼야 한다. 그래서 하나가 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나와 한 몸을 이루는 지체이기에 나에게 정말 필요한 존재이다. 그가 존재해야 내가 존재할 수 있고 그가 건강해야 나도 건강할 수 있다. 그래서 신자는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책임감을 가지며 또 연결돼야 한다.그런데 연결이 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인격적으로 ‘공사 중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공사 중인 사람과 지내는 것은 불편하고 힘이 든다. 그러나 불편해도 견뎌야 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하나 되어 사는 법을 익혀가는 곳이 교회다. 교회 안에서는 용납 용서 오래참음 겸손 온유라는 단어가 늘 현실적인 단어가 된다.이 과정을 견디면서 연결해야 한다. 이렇게 연결이 되면 각 지체가 분량대로 역사하여 몸이 자라게 되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데 바로 이런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의 두 번째 기초가 된다.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는 옆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만 직통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지 않고 교회가 조금만 어려워져도 떠날 생각부터 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이 많으면 교회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부터 다시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세워가야 한다. 빨리 가려 하지 말고 모든 신자에게 교회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깨닫게 해야 한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지속적으로 투자한다면 잃어버린 교회의 건강성을 되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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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7
  •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시시각각 어려움이 더해지고 있다. 확진자와 사망자의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행정명령의 수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거리는 날로 황량해지고 자영업자들은 계속 문을 닫고 있다. 학생들이 등교하지 못한지는 꽤 여러 날이 됐다. 500명 이상 모일 수 없다고 한 지 며칠이 안 돼 50명 이상 모일 수 없다고 했다. 필자가 사는 미국 뉴욕의 상황이다. 뉴욕에 이웃한 뉴저지는 현재 야간 통행금지 중이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아니, 하나님만 아신다.필자가 섬기는 퀸즈장로교회는 50명으로 숫자를 제한해 사순절 새벽예배를 계속 드리고 있다. 매일 예배를 드리며 미국 대통령과 정부, 한국 대통령과 정부, 각 나라의 의료진과 환자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의 시간을 갖는다.이럴 때 교회가 사회적 거리 두기에 앞장서며 집에 머무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왜 안 듣겠는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책임과 사회의 안전을 아우르는 의견임에 동의한다. 이런 위기의 때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 있고, 의료진의 생명을 건 역할도 있다. 그리고 교회의 역할도 분명하다.하늘의 문을 두드리며 자복하고 긍휼을 구하는 기도는 교회의 독특한 역할이다. 어디서든 기도할 수 있겠지만, 정부의 방침을 준수하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지키심을 구하며 모여서 기도하는 길을 간다.아무튼, 숫자 제한 때문에 예배에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 없다. 성도들은 너무나 예배를 그리워하고 있다. 눈에는 주렁주렁 눈물로, 목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예배를 갈망한다. 그렇다. 예배는 갈망이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예배를 별 갈망 없이 드린 적이 많았는데, 갈망이 없는 자는 예배자로 적합지 않음을 이번 기회에 온몸으로 깨닫게 됐다.예배자라면 하나님이 초청하시는 영광스러운 예배에 갈망으로 응답하며 나가야 한다. 영혼의 갈망은 물론 육체의 앙모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 63:1~2)예배는 갈망이다. 특별히 무엇을 갈망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임재(presence)를 갈망해야 한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편재(遍在)하신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임재하시지 않으신다. 예배드리면서 나를 갈망할 수 있다. 내가 만족할 예배, 내 필요를 충족하게 해줄 예배, 나를 위로할 예배를 갈망한다. 일견 그럴듯하지만, 예배의 갈망은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임재하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인간이 “쉭쉭” 소리를 내거나 눈물을 쥐어짜면서 조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만들려고 조작하는 것과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전심으로 갈망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임재는 땅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말씀 가운데, 찬양 가운데, 기도 가운데, 성례 가운데, 그리고 모든 예배 순서 가운데 하나님은 다양하게, 강력하게, 따듯하게 임재하신다. 그 임재는 나를 압도해 반드시 나의 생각을 충만케 하고 나의 감정을 뜨겁게 하며 나의 의지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면 나의 전(全) 존재가 ‘업그레이드’ 되므로 명백히 알 수 있다.복음이 확실하게 이해되고 말씀에 찔림이 크고 회개가 쏟아지고 감사가 넘치며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삶이 전개된다. 하나님의 임재는 특정 교회와 어떤 시대의 큰 부흥을 통해서도 확실히 알 수 있고 볼 수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갈망하는 것이다. <미국 퀸즈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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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4
  • ‘미스터트롯’이 한국교회에 주는 도전
          세계보건기구(WHO)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다. 지구촌 모든 사람이 공포에 떨고 있다. 그런 공포는 우리나라에서 더 극대화되고 있다. 지금은 해외 어느 나라로도 피할 곳이 없다. 하물며 국내 어느 곳이라고 안전하겠는가. 사람도 믿을 수가 없다. 심지어는 자기 가족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사실은 교회도 믿을 수 없는 곳이 돼 버렸다.코로나 위기가 끝나면 사회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공포는 철저히 자기중심의 사회를 이루게 할 것이다. 집단적인 공동체 문화는 철저하게 무너지고 개개인 중심, 현물 중심의 사회로 변하게 될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교회는 영적인 회복을 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더 약해져 버렸던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미스터트롯’이라는 프로그램을 아는가. 미스터트롯은 방송 역사상 예능프로그램 중 최고의 시청률을 올린 새로운 포맷 방송이었다. 오죽하면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미스터트롯을 보는 재미로 세상을 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겠는가.우리는 트로트에 아주 익숙하다. 아무리 유명한 트로트 가수가 노래를 불러도 “아, 저 가수, 저 노래” 하며 당연시했다. 그리고 은연 중 트로트는 올드 포맷이 됐고 전형적인 노래로 여겨졌다. 그러나 방송사는 전혀 다른 형태의 트로트, 즉 21세기형 새로운 트로트의 포맷을 구상했다.이 프로그램을 준비하는데 50여명의 인력이 투입됐다고 한다. 그 인력이 프로그램을 설계하는데 3개월, 참가자를 면접하는데 3개월이 걸렸다는 것이다. 모두 1만2000명이 지원해 그중 101명을 선발했다. 선발기준은 노래도 잘해야 하지만 눈물겨운 사연과 감동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그리고 이 101명을 집단 합숙을 시키며 새로운 감성과 이야기를 입혀 노래를 부르도록 훈련을 시켰다. 더 중요한 것은 지상파방송이 간과했던 부분을 종편방송이 황홀한 감동과 전율의 프로그램으로 제작해낸 것이다.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했으면 시청자를 3시간 동안 화장실도 못 가게 할 정도로 사로잡았겠는가. 최종결선에서 700만명이 넘게 투표하다 서버가 다운돼 버릴 정도였다.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이거다!” 하고 무릎을 쳤다. 어느 곳으로도 피할 수 없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갈수록 진짜 믿을 수 있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다시 그런 곳이 되게 할 수는 없을까. 일제강점기에 교회가 민족의 소망이었고 산업화와 근대화 시대에 교회가 사람들의 위로처, 피난처가 됐던 것처럼.문제는 교회의 예배와 메시지에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당연하게 예배를 드려왔다. 당연하게 드렸던 예배는 그 소중함과 가치를 잃어버리게 했고 강단의 메시지 역시 생명력을 잃고 말았다. 성경공부나 제자훈련도 어느새 매뉴얼화되고 프로그램화됐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코로나 위기에 이렇게 교회의 예배가 동력을 잃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한국교회도 21세기형 새로운 포맷의 교회로 거듭나 보자. 지금껏 당연히 드려왔던 예배를 더 새롭고 전혀 다른 감동의 예배로 바꾸어 보자. 설교에도 다시 한번 생명의 동력을 불어넣어 보자.지금은 온라인예배의 찬반을 논하기보다 우리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느냐를 고심해야 한다. 같은 교회, 같은 예배, 같은 설교자, 같은 교인이라도 의례적인 매뉴얼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포맷, 새로운 사람, 새로운 마인드로 다시 태어나 보자. 그럴 때 한국교회는 개인중심, 현물중심을 넘어서는 새로운, 그리고 진정한 영적 공동체로 비상할 것이다.소강석(새에덴교회 목사·예장합동 부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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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3
  • 팬데믹 위기와 기독교
      ▲김명전 대표이사   코로나바이러스가 세계적 대유행(팬데믹)이다. 감염된 국가가 120여개 국,감염자도 13만 명에 이른다. 코로나19 감염자가 가장 많은 국가는 현재 중국, 이탈리아, 이란 순이다. 21세기들어 5번의 대형 감염병이 발생했다.첫째는 2002년 중국 광동성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다. 두번째는 2009년 3월에 북미대륙에서 발생한 신종 인플루엔자(H1N1)로 214개국에서 최고 20만 3,000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어 2012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생한 메르스 코로나(MERS-CoV)와 2014년 서아프리카의 치사율 60% 에볼라(ebola)가 발생했다. 그리고 2019년 코로나19다. 바이러스 위기가 다시 왔다.코로나19의 특징은 빠른 전파속도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니얼 퍼거슨 교수는 이 현상을 ‘네트워 크 효과’로 설명했다. 세계가 하나의 글로벌 공동체로 연결되어 있다는 의미다. ‘글로벌 사회연결 망’이 감염병의 확산 범위를 빠르고 넓게 하는 것은 확실하다.퍼거슨 교수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감염병으로 인한 “네트워크 효과로 세계 제조업의 공급망(글로벌 가치사슬)이 흔들리고 있다”고 했다. 방역을 위해 경제교역과 여행 등 국제 교류를 중지한 결과다. 코로나 19는 다가 올 바이러스 대재앙을 예고한다.바이러스는 경계가 없다. 국경도 면역망도 그 앞에서는 무력하다. 인간의 방역체계보다 빨리 진화한다. 이제 일상적으로 바이러스 감염 공포 속에 살아야 한다. 바이러스는 기후에 민감하다.지난 겨울은 역대 최고로 따뜻했다. 평균 기온이 3.1℃로 1973년 이래 가장 높았다.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러시아, 호주, 노르웨이, 브라질은 이상고온에 시달렸다. 이탈리아, 이집트, 파키스탄, 태국, 캐나다는 이상저온과 폭설에 갇혔다. 포루투갈, 스페인, 프랑스, 호주는 폭풍과 폭우로 큰 피해를 입었다. 기후변화에 따른 이상 기후 현상이다. 그때마다 바이러스도 함께 왔다.기후변화가 악(바이러스)의 연결고리다. 바이러스 팬데믹이 시사점을 준다. 바이러스가 중국의 산업 거점도시를 공습했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 제조업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올 겨울은 한반도에서 미세먼지 고통이 줄었다. 깨끗한 겨울 공기를 누렸다. 에너지와 청정공기연구센터(CREA)가 2020년 1월 중국의 온실가스 배출이 25% 줄었다고 발표했다.코로나19로 많은 공장이 가동을 중단하면서 에너지 소비가 줄고 항공, 육상운송 등 물류가 대폭 감소한 결과로 분석했다. 바이러스가 공기오염을 줄인 역설이다.코로나19가 일으킨 팬데믹 사태는 인류 문명사의 획을 긋는 분기점이다. 전혀 다른 사회로의 진화를 예고한다. 그 분기점을 세울 단초는 인류 자신에서 찾아야 한다. 1998년 퓰리처상을 받은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총·균·쇠’에서 인류의 문명화가 가져온 질병, 각종 변종 바이러스의 대유행을 예견했다.인간과 동물의공통전염병(인수공통전염병)출현이다. 인간이 노동력과 식량 확보, 즐거움을 충족하기 위해 동물과의 동거를 시작하면서다.창조의 질서, 자연의 섭리는 인간에게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과 절제라는 예절을 요구한다. 특 히 종교적 차원에서는 더욱 그렇다. 한국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이단 신천지를 공습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코로나19가 한국 기독교의 위기 상황을 들춰 내 보여주었다.신천지로 인해 건강한 기독교, 교회성도들이 감염되어 투병 중이다. 한국교회의 예배까지 중지시켰다. 창조주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일까? 이 신호를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지금은 신천지와 같은 이단 바이러스가 오염시킨 복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다. 종교의 힘만이 인간의 탐욕에 제동을 걸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또한 역설이다.코로나19는 종교를 넘어 인류 문명사를 새롭게 재단할 것 같다.인류의 문명화, 산업화는 창조의 질서인 자연 생태계를 교란시켰다. 수억 년의 세월이 농축된 화석연료를 캐내어 에너지로 쓰고 있다. 그 열이 지구를 따뜻하게 만들고 남·북극의 빙하를 녹였다. 지구 온난화다. 석유·석탄과 빙하 속에 잠들어 있던 바이러스를 깨웠다.돌연변이 바이러스들이 속출하고 있다. 기후변화다. 글로벌바이러스네트워크(GVN)는 “사람과 동물, 자연생태계를 하나로 연결하여 다층적이고 포괄적인 접근으로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지구 생태계는 하나의 체계로 연결되어 있다. 바이러스가 아니라 바이러스가 가리키는 곳을 봐야 답이 보인다. 기후위기다. 기후변화협약만으로는 부족하다. 바이러스·세균의 무기화도 금지하고 감시해야 한다. 코로나19를 계기로 ‘국제감염병협약’ 같은 강제력 있는 기구와 국제법이 필요하다.기후와 환경오염, 세균과 바이러스의 파괴력에 공감하고 방법을 찾자. 인류와 생명의 터전, 지구를 지킬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종교, 기독교의 소명 또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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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23
  • 수천 번 망설이게 한 시청 앞 설교
    제주새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2014년 버스정류장에서 전도활동을 펼친 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개척을 하고 2년이 지난 2007년 5월이었다. 말씀을 읽는데 문득 ‘교회이름을 변경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당시 교회이름은 ‘제주교회’였다. 교단마다 제주교회가 하나씩은 있었는데, 심지어 이단도 제주교회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이사야서 60장을 묵상하는데 이 말씀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를 향한 예언이라는 감동이 있었다. ‘이거다.’ 그래서 교회명을 ‘새예루살렘’으로 하고 교단본부에 명칭변경 신청을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의견이 의외였다. “너무 이단스럽지 않습니까.”다시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그것은 나의 이름이다’라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고 보니 이긴자 베뢰아 다락방 하나님의교회 등 성경의 좋은 이름을 이단이 가져다가 제 것처럼 사용한다. 그래서 오히려 교회가 꺼리는 것이 됐다. 하나님의 것을 교회가 되찾아야 하지 않겠나.’교회 명칭을 변경하고 장소도 옮겨야겠다는 마음을 주셨다. 성도들에게 2008년 4월 교회를 옮기겠다고 선포했다. 건물주에게도 통지했다. 그러나 계약 만료 1주일 전까지 임차할 장소는 구해지지 않았다.벽에 붙여 놓은 제주도 지도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했다. “주님 이 넓은 제주에 이 작은 교회 하나 갈 곳이 없습니다. 다들 교회를 꺼립니다.”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음성이 들렸다. 마치 누가 내 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깜짝 놀라 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그때 아내도 사택에서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어떤 페이지의 하단을 보라는 감동을 주셨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차를 타고 지역정보지를 들여다보며 전화를 하고 다녔다. 결국, 제주시청이 내려다보이는 건물을 임차했다. 계약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무심코 전화해서 계약한 장소가 아내가 기도 때 보았던 정보지 하단에 있었던 것이다.2008년 4월 교회를 이전했다. ‘주님,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구하신다고 깨닫게 됐다. 먼저는 이 땅을 위한 중보기도, 그리고 시청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는 것이었다.기도야 교회에서 하면 되지만, 제주시청 앞에서 전도가 아니라 설교하라는 것은 순종하기가 참 어려웠다. 주님은 이사야 62장 10절을 보여주시며 성문에서 이 땅의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올 길을 닦는 것을 말씀하셨다. 또 구약의 선지자와 신약의 예수님과 사도들이 야외에서 많은 설교를 했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감리교를 시작한 존 웨슬리 목사님도 야외에서 설교하지 않았던가.먼저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제주와 국가, 열방을 위한 중보기도를 시작했다. 그 시간은 계속 깊어졌고, 하나님께서 중보기도자들을 보내주셔서 10명 이상이 전심으로 기도했다.문제는 시청 앞 설교였다. 두려웠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주신 마음에 순종은 해야 하겠기에 주일 성도들에게 “2009년 9월부터 매주 토요일 1시에 시청 만남의 광장에서 설교하며 전도하겠다”고 선포했다.9월 첫째 토요일이 됐다. 새벽부터 수천 번 망설이고 고민하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시청으로 향했다. 따라와 중보기도 하겠다는 아내도 마다했다. ‘거참,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거야.’ 시외버스가 다니는 정거장 앞 벤치에서 30분을 망설이다가 신발을 벗고 올라섰다. 그다음부턴 기억이 나지 않는다. 30분 동안 목이 쉬도록 무엇인가 외쳤다. 사람들이 수군댔다. 여기저기 욕이 나왔다. 그래도 순종했다. 그날부터 꼬박 2년 동안 매주 토요일 그 벤치에 올랐다.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그날 이후 그렇게도 전도가 되지 않던 교회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순종할 때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그렇게 체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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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8
  • 코로나 19보다 더 해로운 불신
          불신을 파고드는 전염병 ▲정재영 교수 지금 우리 사회는 코로나 19의 여파로 그 어느 때보다 불안과 염려에 휩싸여 있다. 작년 12월 중국에서 처음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뒤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이 호흡기 감염질환은 다소 진정기에 들어선 중국과 달리 한국을 비롯한 이탈리아와 전 세계로 확산되는 추세이다.초기에는 비교적 통제가 잘 되었고 확진자가 30명 이내로 유지되었으나 신천지 신자 중에 확진자가 나오면서 엄청난 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한 외국 기관에서는 3월 20일에 가서야 바이러스 확산이 절정에 이르고 확진자가 1만 명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기도 하였는데 지금 추세라면 이 예측이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다.사실 코로나 19와 같은 전염병은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질병이다. 이미 사스와 신종플루, 그리고 메르스의 발병으로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홍역을 치렀고 인수공동 전염병의 위험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예고된 바이다. 이미 인류 역사 속에서도 다양한 전염병이 발생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다.문제는 이러한 전염병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태도이다. 코로나 19가 확산되면서 우리 사회는 그 치부를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다. 정치인들은 이를 정쟁화 하면서 서로를 비난하기 바쁘다. 최근에는 의학에 대한 전문 지식이 없는 연예인들까지 나서서 정부와 의료진을 비난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물론 국민 누구나 자신의 의사 표명을 할 수 있고 이렇게 심각한 상황에 대해서 감정 표현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뚜렷한 근거도 없이 비방을 일삼거나 지나친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불안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최근에는 언론까지도 이러한 불안과 공포를 증폭시키고 있는 양상이다. 사회 비판의 기능을 담당하는 언론에서 잘못된 행정에 대해서 문제를 지적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감시의 역할을 하는 것은 마땅한 역할이다.그러나 사실을 보도하고 개관적인 분석을 하기보다는 똑같은 문제를 반복적으로 주장할 뿐만 아니라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보도를 연일 다루는 것은 언론 본연의 역할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많은 의료진과 공무원들의 수고에도 물구하고 서로에 대한 불신만 더욱 커지고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쉽게 사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신뢰의 중요성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에서 성찰과 반성이 없이 근대화를 이룬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이 커다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을 몰고 왔다고 역설한다. 그에 따르면, 위험은 성공적인 근대가 초래한 딜레마이며, 경제가 발전할수록 위험요소도 증가하기 때문에, 후진국이 아니라 오히려 선진국에서 위험요소가 더 많이 나타난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이것이 예외적 위험이 아니라 일상적 위험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우리 사회에서는 이미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때 크게 이슈가 되었고, 최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원전에 대한 불안감이 증대되어 이 이론이 더욱 주목 받고 있다. 이러한 일상적 불안감은 불확실성에서 비롯된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발달해도 인간의 근본 문제인 불확실성으로부터 오는 불안은 크게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위험 요소는 여전히 항존하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그리고 현재 상태에 대해서도 인간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오는 불안감이 줄어들지 않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간과 자연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코로나 19와 같은 전염병이 가져오는 불확실성은 더 큰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이러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사람들 사이의 신뢰가 중요하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위험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은 절대로 혼자가 아니며 협력과 연대를 통해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통해서 불안감을 해소하고 공동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문제 해결에 다가갈 수 있다. 사회학자인 로버트 퍼트남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에 터한 사회자본은 특정 목표를 달성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구성원들이 서로 신뢰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보이는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많은 것을 성취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그는 신뢰와 사회적 네트워크가 활성화 된 곳에서는 사람들을 다양한 파트너들과 연결시켜주고, 고급 정보들을 제공함으로써 경제적으로도 앞서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뢰감은 사람들에게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심어주며, 시민적 연대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은 사회 안전망 역할을 하기도 한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는 정부에서 할 수 없는 사회 곳곳의 문제를 해결하고 안전한 사회가 될 수 있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그래서 사회 자본이 높은 지역에서는 공공장소도 더 깨끗하고 사람들도 더 친근하며 길거리는 더 안전하게 된다.  신뢰 회복을 위한 교회의 역할 이렇게 신뢰 회복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다. 교회는 스스로 공동체임을 강조할 뿐만 아니라 빈번한 모임과 교제를 통해서 친숙성을 높임으로써 서로에 대한 신뢰감을 높일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 공동체의 일원인 기독교인들은 서로에 대해 깊은 신뢰를 할 수 있고, 공동체 활동은 이런 식으로 기독교인들이 시민으로서 연대하며 참여할 수 있도록 북돋을 수 있다. 특히 자기 희생의 규범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사회가 혼란하고 어려울수록 사회 곳곳에서 공적인 책임과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전염병의 확산 속에서 주일 예배를 지킬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에 대한 신학적 토론이 벌어지고 있지만, 주일 예배를 지키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신앙 고백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히 종교 의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신앙고백이 우리 사회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안고 있고 실제적인 책임의식으로 표현되느냐 하는 것이다. 특정 신앙을 가지는 사람들끼리의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의 본을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신앙의 전통과 그 정수를 지키면서도 이 시대와 사회의 요청에 응답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국 교회 안에 있는 신앙 공동체들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개교회주의는 단순히 각자 알아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외부의 지시에 일방적으로 따르기보다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여 일치된 견해에 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획일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사고하여 창조적인 합의를 이루어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염려에 낙심하고 있는 이 시기에 신뢰와 연대를 통해서 난국을 이겨낼 수 있도록 모든 신앙공동체가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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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6
  • ‘거지 나사로’를 돌보다
      고웅영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목사가 2014년 4월 ‘24시간 연속예배’를 인도하고 있다. 교회는 2012년부터 교회 절기 때마다 24시간 기도회를 진행했다.  제주 개척의 첫 3년 동안 어린이와 알코올 중독자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그룹은 육적·영적인 장애를 지닌 이들이었다.등이 굽고 두 발을 쓰지 못하는 자매가 있었다. 부모는 자매를 집에 가두어 키웠다. 학교도 보내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녀를 만났을 때는 40대의 나이로 시내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었다. 집에서 TV를 보며 한글을 배웠고, 홀로 집안일을 해내는 총명한 자매였다.그는 영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어둠이 엄습할 때면 숨을 쉬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나와 아내가 함께 기도하면 어둠 속에서 빠져 나왔다. 자매는 복음을 눈물로 받았고 말씀의 양육도 받았다. 예배 때마다 자매를 업고 교회를 오르내리는 것은 교회 형제들의 수고였지만,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기쁨이 더 컸다.버거씨병을 앓는 50대 형제도 있었다. 흡연으로 인해 혈관에 염증이 생겨 혈관이 막히고 괴사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우리가 만났을 때는 두 다리가 무릎 위까지 절단된 상태였다. 그는 형님 집에서 살고 있었다. 수백 평에 달하는 대궐 같은 집이었지만, 다른 가족과 완전히 단절된 채 뒷방에 버려진 상태로 살고 있었다. 부잣집의 문에 거하는 ‘거지 나사로’ 같은 이였다.2006년 여름 육지에서 온 선교팀과 함께 방을 청소하고 벽지를 바르고 장판을 까는데 꼬박 3일이 걸렸다. 그런 난리 중에도 가족들은 아무도 없었다. 이후 이 형제를 업어 옮기는 것도 우리의 사역이 됐다.전도하면서 30대의 범상치 않은 한 자매를 만났다. 눈 마주치기를 피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죽은 동물의 사체를 보면 그 동물의 혼이 저에게 달라붙어 온몸이 아파요.” 그야말로 귀신에게 사로잡혀 고통당하는 자매였다.자매에게 복음을 전해 영접게 했다. 귀신을 쫓는 기도를 하자고 했는데 거절하는 게 아닌가. 한참을 설득하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자신에게 악한 영이 들어온 후 남자들이 찾아오기 시작해 지금은 매춘을 통해 생활한다고 했다. 귀신이 떠나면 생계가 어려워지니 고통스럽지만, 그렇게 사는 게 자신의 운명이라고 했다.성경책을 주고 이틀 후에 함께 기도할 날을 약속했다. 사단은 이 자매를 놓아주기를 싫어한 것일까. 이틀 만에 찾아갔을 때 그녀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듯 이사를 가 버린 뒤였다.전도로 만난 50대 후반의 알코올중독 형제는 술만 마시면 나를 불러 놓고 자살하겠다고 밤새 울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형제도 그렇지만 밤새도록 같은 이야기를 수백 번 듣는 나도 매우 괴로웠다.기도 중에 주님이 지혜를 주셨다. 형제를 찾아가 함께 바람을 쐬러 가자고 했다. 제주 애월읍 쪽의 한적한 해안도로로 갔다. 그는 “20년 만에 바닷가에 왔다”고 했다. 우리는 절벽이 아름다운 해안에 내렸다. 들뜬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제님, 오늘 제가 형제님 소원을 들어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시신은 잘 수습해 드리겠습니다.”형제는 화를 내면서 한참 욕설을 퍼부었다. “그거 보세요. 형제님은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살고 싶은 겁니다.” 그날 이후 자살하겠다는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고 예배에 잘 나왔다.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사랑한다. 누구나 잘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게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고 잘 사는 길인지 모른다. 하나님은 주님의 몸 된 교회는 그것을 알려주고 함께 품으라고 말씀하신다.주님은 이 땅에 버려진 사람, 버려진 영혼이 많다고 하셨다. 주님은 이러한 영혼들에 관심이 있으시고 한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다. 아직 우리는 예수님께 배울 것이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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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11
  • 코로나19, 의료진들의 수고
      ▲정용구 선교사   코로나 19(COVID-19)의 영향력이 쉽게 줄어들지 않고 있다. 관계된 많은 뉴스를 접하고, 그 내용이 우리의 삶에 이렇게 가깝게 다가온다는 것을 느낀 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한 가운데 치료약에 대한 뚜렷한 보도가 없는 상황에서, 넘쳐나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의료진들의 수고가 연일 계속되고 있고, 의료진들도 감염이 되거나, 사망하는 뉴스를 접하다보니, 그 위험과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매일 실감하고 있다.닥터 셔우드 홀(Sherwood Hall)이 쓴 “조선회상”을 보게 되면 아버지인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 선교사는 1894년 청일 전쟁 때 부상당한 수 많은 병사들과 환자들을 밤낮없이 치료하다가 과로로 쓰러져서 급성 발진티푸스에 걸려 고열로 35세의 나이로 선교활동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순직하였다.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한 글에서는 의료선교사로서 열악한 의료시설로, 조선의 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를 알게 한다.이번 코로나 19 사태를 위해 많은 의료진들의 수고의 이야기를 듣는다. 중국에서도 코로나 바이러스를 최초로 발견해서 그 위험을 알리기 위해 힘썼던 의사 리원량(李文亮)은 결국 바이러스에 감염된 환자를 치료하다가 자신도 감염이 되어서 34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가 의사로서 사명을 가지고 전했던 최초 보고가 제대로만 인식되고, 거기에 대한 대비만 잘했어도, 지금과 같은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고 하며,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언더우드 후손이 쓴 한국의 선교역사”라는 책에서는 1884년-1934년의 선교역사들이 기록이 되어 있는데, 당시 의료선교사들의 고민들이 많이 실려 있다. 새롭게 발견된 점은 의료선교사들은 기존의 선교사들이 복음 전도를 하기 위해 조선의 언어 공부에 집중을 했던 것과는 다르게, 의료선교사들은 조선에 오자마자 많은 환자들을 바로 치료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쉽게 조선의 언어를 잘 접하지 못한 내용이 많았다는 것이다. 반면 그들은 당시 조선의 가장 어려운 사람들로서, 가난하며, 제대로 치료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만났지만,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해서 내적인 갈등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의료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있었겠지만, 생명을 구하기 위해 열악한 환경에서 조선인의 생명을 구하고, 치료해 준 의료선교사들에게는 다시 한 번 그 고귀한 희생에 감사를 드리고, 그것이 당시에는 최고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조선인들의 마음에 심겨졌을 것이라는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지금 코로나 19로 많은 의료진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계속되는 확진자와 사망자를 접하면서, 자신의 위험에도 묵묵히 싸워나가는 의료진들에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매일 초췌한 얼굴로 확진자 상황을 보고하는 질병관리본부, 의료진이 절대 부족한 대구에 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 임상병리사, 병원 행정직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지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 힘은 안되겠지만, 이들의 수고를 기억하고, 위로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한국국제재난구호팀에서도 선교사들 가운데 코로나 19로 어려움을 당하여 한국에 들어 왔을 경우 자가 격리를 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고, 상담과 의료지원 시스템을 준비하면서 이번 코로나 19의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수고하고 있다. 곳곳에서 수고하는 의료진들이 너무나 귀하다.특별히 이번 코로나 19가 종교시설에서 많은 확산 요인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그리스도인으로 당혹감이 크겠지만,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어렵고, 위기에 처한 이웃들을 위해, 특별히 귀한 수고를 담당하는 의료진들을 기억하고, 위로하는 일들로 용기를 주기를 기대한다. 오래전 우리를 치료해 준 의료선교사들에게는 충분하게 감사의 이야기를 못 전했지만, 이번 일로 수고하는 의료진들을 위한 감사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좀 더 앞장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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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9
  • 그 많던 예배자는 어디로 갔을까
        사라졌다. 예배의 자리를 채우던 예배자들이 사라졌다. 여전히 예배당은 있지만, 그 많던 예배자는 어디로 간 것일까. 지금 우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상상 못 한 일들을 곳곳에서 보고 있다.전염병이 창궐한 이때 예배자의 자리는 어디인가. 세상 나라가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 곳인가, 스스로 물러가 숨죽이고 숨어 있는 곳인가. 그 쓰라린 결정을 이해 못 할 자 아무도 없다. 하지만 텅 빈 예배당에서 예배자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 척할 수는 더더욱 없다. 하나님은 그 어떤 상항 속에서도 주저 없이 우리를 찾아오시지 않으셨던가. 다른 쪽은 넓은 예배당에 예배자가 넘친다. 문제는 그 넓은 곳에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편리함이나 교회 성장이 주된 관심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실 곳은 도무지 없는 것이다.하나님은 참된 예배자를 찾으신다. 자기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를 찾으신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참 예배자가 온 세상에 곳곳에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런 참 예배자가 곳곳에만 있지 아니하고 온 세상에 그리고 천상에 가득 차야 한다.우리는 이런 꿈을 갖고 예배를 드려야 한다. 천상의 예배는 무엇인가. 동서고금의 모든 사람은 무언가를 예배한다. 물론 그들 모두가 참된 예배를 드리는 자는 아니다.참된 예배의 원형은 어디에 있을까. 초대 교회 안에 있을까. 인류의 타락 이후 구약 아벨의 예배가 예배의 원형일까.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예배는 예배의 원형을 반영한 예배일뿐이다.예배가 하나님의 하신 일에 대한 반응이라면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다 이루시고, 안식하셨던 첫 안식의 날,(창 2:2) 이 땅 모든 안식일의 원형(출 20:8~10)이었던 그날, 모든 만물을 새롭게 이루신 완성의 출발점(계 21:5~6)이었던 그날은 원형 예배의 날이었다.하나님은 첫 안식일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창 2:3) 복을 주신다는 단어 ‘바라크’는 경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첫 안식일은 예배드리고 복 받은 ‘바라크’의 날이었다.잠언 8장에는 지혜가 의인화돼 있다. 의인화된 지혜는 바로 창조주 예수님이심을 드러낸다. 천지창조의 나날에 지혜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창조를 기쁨으로 반응하는 것을 본다. 그리고 사람들도 지음 받은 후에 그 기쁨에 참여했다.천지창조의 반응으로 드려진 예배에는 이 땅의 사람은 물론 천상의 천사와 우주 만물도 함께한다.(시 148:1~14) 창조의 반응으로서의 예배만이 아니라 구속의 반응으로서의 예배가 천상에 있다.(빌 2:5~11, 계 7:9~17) 실상 이 땅의 예배는 이미 천상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다.(히 12:22~29, 계 5:7~14)참된 예배는 사람들이 스스로 고안해 발전시킨 게 아니다. 이 땅의 예배는 창조와 구속의 감격으로 가득 찬 천상의 예배를 투사하고 참여토록 하신 하나님의 찬란한 작품이요 보배로운 선물이다.예배는 그때그때 끊어지는 졸렬한 세상의 단편극이 아니라 창조부터 영원까지 펼쳐지는 장엄한 천상의 대하드라마다. 오늘의 나의 예배, 우리의 예배가 그 이음 속에 생생히 살아있어야 한다. 모든 예배자는 이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 김성국 목사 약력=총신대 신학과 및 신대원 졸업, 미국 고든콘웰신대원 신학석사, 목회학박사. 혜천대 교수, 혜천대학교회 담임목사 역임. 현 미국 동부개혁장로회신학교 학장, 미국 퀸즈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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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6
  • ‘조폭’ 마음을 움직이신 하나님
    2011년 6월 제주 새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 지하상가 예배당에서 열린 주일예배에서 뜨겁게 찬양하고 있다.  교회 문을 열고 실전이 시작됐다. 제주에서 3년간 전도하며 많은 사람을 만났다. 도시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이들이었다. 하나님은 제주의 영혼들을 품고 기도하게 하셨다.2005년 개척하고 처음 전도로 온 이들은 어린이였다. 여름이 지났을 때 20여명이 모였다.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깨진 가정에서 편부모나 조부모와 살고 있었다. 매일 오후 5시 이들과 예배를 드렸다. 찬양하고 성경 한 장을 가르쳤다. 사모는 매일 간식이나 저녁을 준비했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은 하교 후 교회에 와서 저녁 늦게까지 있다가 집에 갔다.그런 예배가 1년 넘게 지속했다. 그런데 2년 후 갑자기 모임이 멈췄다. 그것도 한날한시에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교회를 떠났다. 큰 충격을 받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어린이 대부분이 초등학교 5·6학년이었는데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제사에 참여할 나이가 된 것이다. 또 주일에 학원을 가야 한다고 했다. 모든 아이가 썰물처럼 갑자기 교회를 떠났다. 이 일로 주님 앞에 엎드렸다. 주님은 제주의 깨어진 가정의 아픔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뿌려진 씨앗은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지금도 기도할 때 그들에게 심어진 말씀의 씨앗이 열매 맺기를 기도하고 있다.두 번째 무리는 2005년 7월 전도된 3명의 성인이다. 동거 남녀와 60대 남자였는데 모두 알코올중독자였다. 주일에 승합차로 데리러 가면 이미 소주 두어 병을 마신 상태였다. 승합차와 예배당이 술 냄새로 진동했다. 60대 남자는 이혼하고 집에 방화했다가 교도소에 다녀온 상태였다. 술만 마시면 나를 불러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자살하겠다고 울었다. 함께 울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동거 남녀는 무연고로 간경화 말기 환자였다. 혼수상태가 오면 내가 보호자 신분으로 병원에 데려가곤 했다. 동거 남녀는 그해 11월과 12월에 각각 하나님 나라로 갔다. 교회 나온 지 4개월쯤 된 10월 주일이었다. 동거남녀 중 남자가 말끔하게 옷을 입고 술도 마시지 않은 채 승합차에 탔다.“목사님, 저 오늘부터 술 끊고 하나님 잘 믿어 볼랍니다.” “형제님, 정말 기적입니다. 오늘부터 세례교육을 합시다.” 그 날부터 4주간 세례 문답 공부를 했다. 거짓말처럼 그는 30년 이상 매일 네댓 병을 마시던 술을 끊었다.4주째 토요일 저녁이었다. “고 목사님이십니까. 잠깐 병원에 오셔야겠습니다.” 제주 한마음병원 중환자실이었다. 직감으로 주님이 남성을 부르고 계심을 알았다. 세례기와 가운을 챙겼다.중환자실에는 지인 몇 명이 있었다. 가운을 입고 세례식을 했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세례 문답에 눈짓과 작은 고갯짓으로 응답했다. 떨리는 손으로 안수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고 선포했다. 기도하는 동안 그는 조용히 하나님 나라로 갔다.문제는 장례를 치를 비용이었다. 일단 빈소를 정하고 간절히 기도했다. “주님 어떻게든 장례를 치르겠습니다. 도와주세요.” 월요일 아침 장례식장에 갔는데 초입부터 화환이 줄지어 있었다. ‘대단한 인물이 죽었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그 화환은 성도의 빈소로 이어져 있었다. 정장 차림의 청년 수십명이 손님을 받고 있었다.임종한 성도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모두 어린 시절 집을 나갔고 큰아들은 조직폭력배였다. 과거 제주에 큰 폭력 사건이 있었는데, 큰아들이 모든 걸 뒤집어쓰고 수감 중이었다. 수감 중 부친의 부고가 전달되자 보스가 약속했다고 한다. “네 아버지 장례는 내가 치른다.” 그렇게 인원을 총동원했다 한다.이틀 동안 다섯 차례 장례예배를 드렸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복음을 전했다. 출관하는 날 17대의 검은색 세단이 장례행렬을 호위했다. 주님은 장례의 상주가 돼 주셨다. 무엇보다도 평생 술과 사단에 매여 있던 한 영혼을 구원하시는데 제주새예루살렘교회를 사용해 주셨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가장 존귀한 한 영혼을 구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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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3-04
  • 모든 사건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정기 목사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재앙은 하나님의 경고이다. 아합왕 때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경고였다. 코로나19도 하나님의 경고이다.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이 내리시는 경고이다.살 길은 회개하는 것이다. 항간에 떠도는 문자들이 있었다. 신천지가 '이번주는 신천지 에배에 참석하지 말고 일반교회 예배에 첨석하여 코로나 전파후 코로나가 신천지인의 문제가 아닌 것으로 만들어라' 하고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문구를 보면서 두가지를 생각했다.하나는 '신천지라면 그럴수도 있겠다' 또 하나는 '사단이 성도들 주일 예배드리지 못하도록 장난치겠구나'였다. 그 생각은 안타깝게도 적중했다. 예배 참여 인원이 절반 가까이 줄었다. 충격이었다. 물론 조심할 것은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사단이 조장하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앞으로 난리와 난리의 소문은 더하여져 갈 것이다. 그것이 말세의 징조이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 볼 것이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허락속에 일어난다. 욥에게 일어난 사건도 하나님의 허락속에 일어났다. 그래서 우연은 없다. 마 10: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참새 한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알 수 없다.그런데 많은 경우 시간이 흐른 후에 알게 된다. 요셉의 경우를 보면 형제들에게 미움을 사 노예로 팔려간다.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 하다 누명쓰고 감옥에 갇힌다. 요셉에게 꿈을 꾸게 하신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꿈대로 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된다.  모세를 보면 바로왕 공주의 양자가 되어 왕궁에서 자란다. 40세가 되어 쓸만할 때 살인을 저지르고 광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어떤 애굽 사람이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화가난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모래속에 감추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탄로나 바로가 모세를 죽이려고 찾자 광야로 도망간 것이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까지 하셨는지 잘 이해가 안된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후, 모세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빠른길인 블레셋 땅으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돌아가는 길 홍해길로 인도하셨다.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블레셋 사람들과 전쟁을 하게 되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까봐서 하나님께서 홍해길로 인도하신 것이다.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오는 급박한 위기의 상황을 허락하신 것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 애굽의 바로를 벌하시고 영광을 얻으시기 위함이었다.<출14:4>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세를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함이었다.<출14:31> 그래서 바로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셔서 추격하게 하신다. 그리고 홍해에서 애굽 군대를 수장 시켜버리신다.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보이는 상황만 보며 심히 두려워하고 원망하게 된다. 좌절하고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았던 모세는 담대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하나님의 구원을 외칠수 있었다.  로마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얼마나 간절하게 로마에 가고 싶어 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수도나 다름없었다. 바울은 보다 더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로마로 가기를 원했다. 당시 정치, 군사, 문화 등 모든 것의 중심은 단연코 로마였다. 그러나 바울은 무리하지 않았다. 초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롬 1:10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로 갈 좋은 길 얻기를 구했다. 좀더 평탄하고, 좀더 효과적이고, 좀더 선교에 보탬이 되고, 지름길이라고 할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기를 기도했다.  그러다가 바울이 제3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환란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간다. 그리고 체포당하여 재판을 받게 된다. 바울은 재판을 받으면서도 총독에게, 아그립바 왕에게, 그리고 헤롯 왕에게도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바울은 일부러 로마 황제에게 상소를 한다. 목적은 오직 하나였다. 살기위해서가 아니고, 오직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로마로 가는 항로가 순탄하지 않았다. 바울이 출항을 말렸는데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듣고 항해를 하다가 유라굴로라는 엄청난 풍랑을 만난다. 구원의 여망마져 없어졌다. 여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가 안된다. 그런데 그 배가 섬에 도착하게 되고 그 곳에서 되어진 일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얼마나 오묘한지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 할 수 없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해 할 수 없는 사건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롬 8:28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모든 것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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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7
  • “지금은 질병 앞에 두려움 생길 때 애통하는 자와 함께한 하나님 기억하자”
          의료선교단체인 한국누가회에서 활동 중인 김신곤(사진) 고려대 내과 교수는 2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감염자와 최전선에서 뛰는 의료진을 기도로 응원해 달라고 당부했다.김 교수는 전 세계로 확산되는 코로나19는 없던 병이 새로 생겨난 게 아니라고 강조했다.“에볼라 바이러스도 그렇고 코로나19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에게 노출되지 않았던 바이러스였을 뿐이지 기존에도 있던 겁니다. 그런데 난개발로 환경이 파괴되고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유입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지키는 청지기 역할을 하지 못한 게 문제였지요.”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겐 코로나19 감염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격려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누구보다 두려움이 클 대구와 우한 사람들을 위로해야 한다고도 당부했다. 김 교수는 “애통하는 사람들과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질병 앞에 두려움이 생기는 건 맞지만 정확한 실체를 보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어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 연대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면서 “예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고통을 겪고 구원으로 화답하셨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격리와 차단 위주의 방역에 대해선 이해를 당부했다. 전형적인 전염병 관리 방법인 ‘슈퍼 장벽’을 만들어 바이러스 전파를 억제해야 하지만, 감염자 격리가 차별이나 냉대로 이어져선 안 된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세계는 하나로 이어진 초연결사회”라며 “언제든 우리가 있는 지역이 제2의 우한, 제2의 대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코로나19 최전방에서 싸우고 있는 의료진들에 대한 응원도 요청했다.김 교수는 “의료진들은 의사로서 사명감을 잃지 않고 바이러스와 맞서 싸우는 데 앞장선 사람들”이라며 “그들이 건강해야 치료받는 환자도 건강해질 수 있는 만큼 기도로 지원해 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의료진을 기도제목도 공유했다. “힘든 상황에도 희망을 가지며 환자를 치료하려는 의료인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일하면서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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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6
  • 뜻밖의 손님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눈송이가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던 주일 오후, 밖에 있는 내게 아내가 두 장의 사진을 보내왔다.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지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장은 부등깃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의 분홍빛 생명체였다. 다른 한 장은 눈을 또랑또랑 뜬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비둘기 한 마리였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내 서재에 연해 있는 베란다 창밖에 놓인 실외기 틈에 외로운 생명 하나가 깃들었던 것이다. 저물녘 집으로 돌아가 창문을 열어보니 어미 비둘기는 갑자기 닥쳐온 추위로부터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고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의 등장에 경계는 하면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한 눈빛을 내게 보냈다.비둘기 배설물이 켜켜이 쌓여 있어 습도가 높은 날에는 그 냄새가 문틈으로 스며들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날이 푸근해지면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여린 생명이 내 창가에서 탄생한 것이다. 차마 그 가족을 내쫓을 수는 없고, 새끼가 날 수 있을 때까지 불편을 감수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작고 여린 것들을 대할 때 우리 마음은 말랑말랑해진다. 여린 생명은 종이 무엇이든 우리의 굳은 표정을 녹여 벙싯 웃게 만들지 않던가. ‘작은 것들의 신’으로 알려진 인도 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신작 소설 ‘지복의 성자’에 등장하는 안줌은 남녀 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다. 그런 이들을 가리키는 말 ‘히즈라’는 신성한 영혼이 깃든 육체라는 뜻을 내포하지만, 일종의 멸칭이라 할 수 있다. 히즈라들의 내면에 깃든 어둠이 깊다. 어느 날 안줌은 계단에 버려진 세 살배기 아이 자이나브를 데려가 키우기 시작한다. 안줌은 한 인간이 타인을 완전하게 사랑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당혹스럽게 자각한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이었다. 자이나브와의 만남은 안줌의 삶에 카타르시스적 전환점이 됐다. 자이나브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그는 자기 속에 깃든 어둠과 화해해야 했고, 단순하고 행복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했다.누군가의 품이 되어주려 할 때 사람은 사람다워진다. 거룩해진다. 김준태 시인은 ‘인간은 거룩하다’라는 시에서 새벽에 일어나면 한 그릇의 물도 엎지르지 말고, 한 삽의 흙도 불구덩이에 던지지 말자고 말한다. 차라리 달팽이라도 어루만지고, 풀잎을 가슴에 담고 설레어 보라는 것이다. 시인은 ‘풀여치 지렁이 장구벌레 물새 뜸북새 물방울’을 호명하며 말한다. “땅 위에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나 거룩하냐.” 인간은 땅 위의 칼들을 녹슬게 할 때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와 만난 사람들이 모두 변화를 경험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도 스스로 더럽혀지지 않는 흙과 같은 존재를 만났기 때문이다. 거룩함이란 구별됨을 뜻하지만, 스스로 거룩함을 자처하는 이들은 정작 거룩함을 알지 못한다. 거룩함이란 잣대를 갖고 다른 이들을 재고 가르는 이들은 예수의 마음에서 가장 멀다.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사회의 긴장도가 높아졌다. 노골적이든 은밀하게든 특정한 나라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 깊어진 것 같다. 최근 외국을 다녀온 이들은 아시아인들이라 하여 기피 대상이 됐던 불쾌한 경험을 이야기하며 속상해 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이들만 있는 게 아니다. 감염의 위험을 알면서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이들이 있다. 의료진들, 방역을 담당하는 분들, 지원 업무를 하는 분들은 누군가의 품이 되기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연약한 것들을 부둥켜안으려는 이들이 늘어날 때 증오와 혐오의 바이러스는 스러진다. 그들이야말로 봄을 선구하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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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20
  • 성도·건물 없는 ‘서류상 교회’ 부임
    고웅영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목사(앞줄 오른쪽 세 번째)와 성도들이 지난해 9월 제주 서귀포항에서 제주 복음화를 위한 기도회를 갖고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제주 목회는 하나님께서 여러 개의 관문을 열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다. 2005년 개척 때 일이다. 제주새예루살렘교회 개척의 문은 수월하게 열린 게 아니었다. 2002년과 2003년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를 둘러봤다. 2004년은 부교역자 시절 청년부와 전도여행을 하면서 제주를 찾았다. 청년 45명과 2004년 1월 제주 전도여행을 했다. 4개의 팀으로 나눠 미션을 주고 제주의 여러 곳에서 예배하고 전도했다. 그때 제주 감리교회 목회자들을 만나 제주 목회의 비전을 나눴다.목회자들은 부정적 반응을 내비쳤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뿐 아니라 제주 전체 교회의 절반 이상이 미자립 상태입니다. 또다시 미자립 개척교회를 세우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이런 반응이 나오자 두 가지 감사가 터져 나왔다. “주님, 제주의 교회와 영적 상황을 실제로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교사로 헌신했던 청년 시절 기도대로 선교지와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불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전도 여행을 다녀온 후 하나님은 제주를 향해 더 기도할 마음을 주셨다. 개척과 목회의 문이 열리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그때부터 영적 도전들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2004년 가을 목사고시가 있었는데, 한 달 전부터 아내에게 혈변과 진통이 찾아왔다. 병원에선 대장의 자가면역 관련 질환인데 평생 안고 가야 할 난치병이라 했다. 상황이 더 나빠지면 대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난감했다. 교회 사역은 계속해야 하고 목사고시는 다가오고 어린 두 자녀는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다. 첫째 아이는 할머니가, 둘째 아이는 교회 권사님께서 맡아 주셨다. 아내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낮에는 교회 사역을 하고 저녁부터 아침까지는 아내의 병상 옆에서 돌보며 목사고시를 준비하는 생활이 시작됐다.모두가 잠든 밤에도 아내는 수십 차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혈변을 봤다. 아내의 진통이 잦아들면 병원 로비의 수납창구 불빛 아래서 공부했다. 졸지에 아이들도 아내도 나도 어떤 시험 앞에 서 있었다.더 전심으로 하나님을 붙잡는 시간이었다. 목사고시를 보러 대전으로 내려가던 날 아내의 혈변이 멈췄다. 감사하게도 목사고시에 합격하고 돌아온 날 아내는 퇴원했다. 며칠 후 가족은 다시 모였다. 또 한 가지 도전은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교회 담임목사님이 갑작스럽게 임지를 옮긴 것이었다. 개척하면 힘이 돼주시겠다고 늘 말씀하셨는데, 기대도 할 수 없게 됐다. 주님은 사람과 교회를 의지했던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셨다. 제주 감리교회의 개척 불가 입장도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 제주지역 교단 관계자는 새로운 미자립교회가 또다시 세워지는 것이 당시 제주선교 상황에 맞지 않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2005년 4월에 목사안수식이 예정돼 있었다. 교단법에 따라 그 전에 담임할 교회가 결정되지 않으면 안수 자체가 무산되는 상황이었다.그해 1월 황급히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제주 지역 교단 관계자들을 만나 이러한 상황을 알리고 간청했지만, 답은 같았다. 그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목사님, 혹시 감리교 제주지방에 서류상으로는 있지만, 목회자가 없는 교회가 있습니까.” “아, 한 교회가 2년 전부터 목회자 미파송 상태에 있습니다. 전임 목회자가 경제적, 영적으로 타격을 받고 제주를 떠났습니다. 성도도 목회자도 교회 건물도 없는 서류상 교회죠. 한 달 후 지방회에서 영구 폐지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 교회를 맡으면 어떻겠습니까.” “정말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제주에 오고 싶습니까.” “네.” “좋습니다.”하나님께선 새로운 방법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없어지는 것을 막으셨다. 그렇게 개척의 문이 열렸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도 나름대로 과정이 있고 도전이 있기 마련이다. 이 과정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신다. 실로 주님은 지혜가 한이 없으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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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하나님의 창고 연 비결 ‘십의 3조’
      고웅영 제주새예루살렘교회 목사가 2012년 10월 성도들과 함께 제주 상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포기함으로 얻는 방법 중 세 번째는 소유의 포기다. 그동안 소유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2000년 아버지가 소천하셨을 때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빚을 물려받지 않으려고 상속포기서까지 썼다. 1990년 대학 시절부터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신문 배달, 손세차장 세차, 일용직 등으로 일했고 우체국 택배센터와 어린이의류 물류센터에소 일했다. 2002년 감리교신학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시작한 일은 무보수 자비량 사역을 하는 선교단체 간사였다.당시 나는 가난하지 않았고 부요하지도 않았다. 많은 간사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기도하면서 섬기던 시절이었다. 기도해보고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을 찾아가 “내가 당신에게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기회를 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찾아간 분의 95%가 후원자와 중보자가 됐다. 하나님은 아굴의 잠언처럼 ‘필요한 양식으로’ 먹이셨다. 1999년 전도사로 사역할 때 첫 월급이 40만원이었다. 당시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고 신대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도 가난하지 않았다. 개척 후 6년 차부터 교회에서 목회비를 받았다. 그 6년 동안 자녀가 셋이 됐고 하나님은 더 풍성하게 채워 주셨다. 비결은 나눠주는 훈련에 있었다. 간사로 섬기던 시절 하나님께서는 후원받은 헌금 일부를 다른 간사들을 위해 헌금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부끄러울 정도로 아주 적은 금액을 매달 후원했다. 전도사 시절에도 다른 간사 가정과 선교사 가정을 후원했다. 그때 우리 가정이 세운 헌금원칙은 십의 3조였다. 십의 1조는 하나님께, 십의 1조는 선교사역에, 십의 1조는 구제가 필요한 이들에게 헌금했다.하나님의 비밀창고는 그때부터 열리기 시작했다. 월급이 80만원이었던 전도사 시절 400만원 가까운 대학원 등록금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들로부터 계속 채워졌다. 제주도에 교회를 개척할 때 임차계약금 300만원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신대로 기도의 후원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전화 한 통화로 20분 만에 계약금을 치렀다. 나머지 잔금 1700만원은 제주로 이삿짐을 싣고 내려오는 날 아침에 몇 분의 권사님들이 모아 주셨다.개척하고 사용하던 승합차가 2007년 도로 한가운데 멈췄다. 600만원을 주고 산 중고차였는데, 견적만 170만원이 나왔다. 그날 미국에서 제주도로 손님이 찾아왔다. 10년 전 간사 시절 2만원씩 딱 1년간 헌금했던 선배 간사 가정이었다. 사업차 한국에 왔다고 했다. 식사 후 봉투 하나를 놓고 갔다. 열어보니 170만원이었다.2008년 교회를 옮기고 강대상을 바꾸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강대상이 200만원이었다. 한두 번 뵀던 다른 교단 장로님이 찾아오셨다. “교회를 옮기고 무엇이 필요합니까.” “강대상이 필요합니다.” 그분은 얼마 후 베트남 선교사로 나가신다며 봉투를 두고 가셨다. 200만원이었다. 육지의 대형교회에서 제주도로 청년수련회를 왔다. 제주공항에서 수련회 장소로 안내하는 일을 했다. 버스 안에서 제주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제주도에서 개척목회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을 30분 정도 나눴다. 그 교회는 수련회를 마치고 돌아가며 모든 헌금을 놓고 갔다. 개척 때부터 필요한 목회 서적이 있으면 목록을 적어 놓고 “주님 매달 책을 사주는 후원자를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청년부 제자 중 한 형제가 직장에 들어간 후 지금까지 15년간 매달 필요한 책을 보내주고 있다.제주새예루살렘교회는 아직도 임차 교회다. 하지만 지난해 8월 하나님께서 4436㎡(1341평) 예배당 부지를 주셨다. 대출이자만 내고 있는데, 건축의 나머지 과정은 주님의 때에 풍성하게 이뤄주실 것을 알고 기쁘게 기다리고 있다. 현재 6개의 지역교회와 국내 선교기관 4곳, 해외 선교지 8곳을 후원하고 있다. ‘포기함으로 얻는 법’을 배우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최고의 보상이고 상급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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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2
  • 하나님의 비전을 쫓는 삶 4
    ▲여주봉 목사   나는 비전과 관련하여 네 종류의 사람을 살펴보고 있다. 하나님의 비전이 있어야 교회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방향으로 나아갈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처한 영적 침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비전을 쫓아 사는 삶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비전의 성격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기초한 네 종류의 사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방랑자.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는 사람.겁쟁이.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만 대가 지불이 두려워서 가지 못하는 사람.성취자.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온 삶으로 달려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룬 사람.리더.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온 삶으로 달려가 하나님의 비전이 그를 통해 성취될 뿐 아니 라, 다른 사람들을 그 자리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지난번에는 방랑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하는 방랑자는,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나오는 길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두 번째 부류의 사람은 겁쟁이다. 겁쟁이는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만 대가 지불이 두려워서 가지 못하는 사람이다.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많은 대가 지불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이루셨지만 그 비전을 위해 모세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다. 또한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하는 하나님의 비전에 동참하면서 수많은 대적과 방해를 극복했던 느헤미야는 어떠한가. 무엇보다, 인류의 구속이라는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예수님께서 치루신 대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 앞에서 크고 중요할수록 그 비전이 성취되기 위해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 영적인 공격과 방해가 클 수 있다. 그런데 겁쟁이는 그 대가 지불이 두려워서 하나님의 비전에 동참하지 못한다.또한 겁쟁이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의 돌밭과 가시밭과 같은 사람들이다.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만 말씀으로 인하여 핍박이 오면 말씀을 버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가시밭은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에 대한 유혹 등이 내려지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둘은 그 성격이 약간 다를지 모르지만, 두 가지 면에서 비슷하다. 첫째,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였다. 둘째, 그들은 말씀의 결실을 맺기 위해 세상 사랑, 돈에 대한 집착, 세상의 목적이 내려져야 했을 때 그것을 원치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소위 말씀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을 경험하는 일에는 매우 열정적이었지만, 주님을 따르는 대가 지불은 원치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겁쟁이였다.겁쟁이, 돌밭과 가시밭과 같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씀을 깨닫는 자들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들은 깨닫지 못한 자들, 하나님의 비전을 보지 못한 자들이었다. 만약 그들이 실제로 본 자들이었다면 그들은 좋은 밭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라며 자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면서 예수님을 떠나 다시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 그것을 보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8-69). 그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비전을 본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값진 보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비전을 진정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대가를 지불하지 못했던 것이다.하나님께서 나에게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으로 회복되어지고, 다가오는 하나님의 부흥의 길을 예비하는 "회복과 부흥"의 비전을 보이셨다.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교회를 세워감에 있어 재정적인 압박, 환경적인 어려움, 하나님의 길과 비전을 보지 못하는 성도들의 비협조, 대적 등 수많은 어려움과 공격에도 나와 아내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은 선명하게 보여진 하나님의 비전 때문이었다. 내 눈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고 계신 일 가운데 한 나라도 바꿀 수 있을 만한 소중한 것, 우리 부부 인생 전부를 드려도 좋을 만큼의 소중한 것이 보였다. 그래서 나와 아내는 "우리가 죽기 밖에 더하겠느냐?"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었다.교회의 회복도 그렇다. 어떤 목회자들은 하나님 중심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가르치면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지고,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회복될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몇 가지 성경적인 진리를 전한다고 회복되지 않는다. 목회자부터 성도들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거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비전은 성취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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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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