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19-12-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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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말씀으로 일어난 부흥
      ▲이정기 목사   한국 교회가 큰 위기를 맞았다. 총체적인 위기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더욱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 존재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이런 얘기를 듣는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그러나 초대교회에도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의 갈등과 불평이 있었다. 초대교회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 돌아가도 별 수 없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와 완벽한 사람은 없다. 믿을 것은 말씀밖에 없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오직 성경!’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많은 책들가운데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두말할 것 없이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겔3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끌고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신다. 전혀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였다. 그런 뼈들을 향해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을 대언하자 뼈들이 연결되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고, 생기를 향해 대언했더니 생기가 들어가 큰 군대가 된다. 전혀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씀으로 회복시킬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한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요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요1:14절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다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그 자체에 엄청난 능력이 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 지고 눈이 뜨였다.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딤후3:16-17) 말씀이 능력이다. 말씀이 축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나라는 부강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는 부흥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일터는 창대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가정은 번성하게 된다.  느헤미야 8장에는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벌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운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 부흥은 말씀으로 일어난 부흥이었다.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한다. 백성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6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말씀을 사모하는 백성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여 모이는 곳에 임한다.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난 오순절 사건도, 고넬료의 가정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도, 미스바에서 일어난 승리의 역사도 모두 사모하여 모일 때 일어났다. 어느 때든지 축복과 부흥의 원리는 동일하다. 축복과 부흥 전에는 항상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이 있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고, 말씀이 더 듣고 싶고,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임하게 되는 전조이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젓을 사모함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벧전2:2)  에스라가 백성들 앞에서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 일어섰다는 것은 말씀을 경외하는 모습이고,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순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말씀의 권위를 높이는 만큼 은혜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 말씀이 귀하게 느껴지고 말씀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들리면 역사는 일어나게 될 것이다.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고, 믿음의 역사가 있어서 소문난 교회였다. 모든 믿는자에게 본이 되는 교회였다. 그 비결은 말씀받는 태도가 좋았기 때문이다. 살전2:13절에 “~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에, 그 말씀이 믿는자들속에서 역사한 것이다.  에스라가 읽어준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고, 크게 기뻐하고, 말씀에 순종한다. 칠월에는 초막절을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초막절을 지킨다. 이방인과의 잡혼을 금한다. 안식일 날 해서는 안될 일들을 금한다. 안식년을 똑바로 지킨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단한다. 말씀으로 일어난 부흥이었다. 우리 신앙생활에 변화가 없는 이유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많고, 성도는 많은데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사는 한 사람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 한 사람이 가정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성공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가장 큰 축복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 순종만큼 복된 길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 축복하시고, 순종하는 만큼 사용하신다. 참된 부흥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말씀으로 시작된 부흥은 근본적인 변화가 있게 한다. 신앙생활의 내용이 달라진다. 신앙의 수준이 달라진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부흥이 필요하다. 말씀이 깨달아져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크게 기뻐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요새 지식 정보 산업이 뜨고 있다. 인터넷을 보면 엄청나고 방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 원하는 지식 대부분 다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지식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변화시키는 능력은 말씀안에 있다. 말씀 안에 사는 길이 있고, 말씀 안에 회복의 길이 있다. 말씀따라 살면 신기하게 문제도 풀리고, 말씀따라 살면 신기하게 인간관계도 풀리게 된다. 이제 작은 일을 해도 하나님 말씀보다 앞서지 말자. 작은 사업을 해도 말씀 중심적으로 운영하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마4:4> 말씀없이 잘사는 길은 없다. 말씀없이 성공도 없고, 말씀없이 성숙도 없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으로 나타난다. 말씀을 통한 깨달음으로 회개하고, 크게 기뻐하고, 순종하여 삶의 현장에서 말씀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부흥 많이 체험하며 사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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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3
  • 다산신도시 작은교회 도전기
      ▲이효상 목사ㅣ교회건강연구원장   25년 살던 경기도 구리시를 떠나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 살았던 남양주로 이사했다. 다산신도시로 입주한 탓인지 다산 선생 형제들의 신앙과 정신을 생각하게 되고, 교통사정이 좋은지, 가까이에 편한 마트가 있는지, 맛집은 어디인지, 스포츠센터가 좋은지 등에 관심이 가게 된다. 학부모라면 자녀들이 다녀야할 유치원과 초중고가 있는지, 주변 환경에 관심이 크다. 그 중 크리스천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마 처음엔 이전 교회를 계속 다닐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교회를 정하고 기존교회를 떠나는 것은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사정상 교회를 다시 정해야 할 경우도 있다. 너무 멀리 이사 왔거나, 자녀들이 어리거나,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어 먼 교회로 가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롭고 건강한 교회를 찾는다. 신도시 입주민들은 새로운 교회를 생각하고 찾는다. 아마 주님도 여러 모습으로 교회다운 교회를 찾으실 것 같다. 신도시 새로운 지역, 새로운 교회는 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틈새전략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꼭 큰 건물교회가 아닌 작은 공간도 좋을듯하다. 카페나 레스토랑, 학원이나 식당을 빌려 주일 오전만 이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도 가능하다. 어차피 작은 교회는 소그룹이기에 중대형 교회를 흉내로는 생존이 어렵다. 기존의 생각이나 패러다임을 바꾸고 가족같은 공동체, 교회다운 교회를 지향하면 좋겠다. 여기에 목사 1인의 교회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투명성과 건강한 공동체로서 공교회성까지 갖추면 더 할 나위가 없이 좋다.   요즘 성도들은 건물이 큰 교회를 찾기 보다는 공동체가 건강한 교회를 찾는다. 다산에 도전장을 내밀고 개척한 작은 상가교회나 목회자를 만나보면 참 순수하고 열정이 대단하다. 이런 개척도전기, 건강한 생존기에 관심과 애정이 더 생기고 주목하게 된다. 다산동의 예장합동 다산따스한교회(손진원 목사)는 3월에 개척한 성복중앙교회 분립 1호이다. 손 목사는 제자훈련의 전문가로, 교회소개 전단을 잘 만들어 전도에 사용한다. 예배가 찬양과 경배로 뜨겁고 예배 후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는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결단, 축복, 격려하는 악수례를 하는 독특함이 있다. 이어 따스한 애찬과 따스한 소그룹 활동으로 친교하며 말씀을 나눈다. 수요예배에는 성경66권을 공부하며, 금요철야는 주기도로 하는 기도회를 가진다.   가운고등학교 정문앞에 위치한 예장통합의 하늘누리교회(윤호용 목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과 관계가 깊어지도록 하는데 사명을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새신자에 대한 교인들의 친밀도가 높다. 예배전 중보기도팀을 통해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를 기도한다. 예배는 차분하고 안정감을 지녔다. 매월 말씀주제(예를 들어 ‘공감’)를 가지고 진행되며, 오후예배는 목장예배로 후원협력 선교지를 중심으로 모인다.   다산동 예스프라자의 감리회 주이음교회(정현수 목사)는 퇴계원에서 시작하여 오남리를 거쳐 다산동에 세 번째 정착한 교회다. 정 목사는 서글서글한 인상과 차분함, 친근감이 장점이다. 교회적으로 성도들이 큐티에 열심을 내며, 말씀사경회와 새가족전도를 위해 ‘릴레이’기도를 주일오후와 수요기도히는 성경통독을 진행하며, ‘가족소통학교’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예장합동 기쁨누리교회(성성섭 목사)는 감자탕교회에서 개척한 교회로 분당에서 6월에 이전해 왔다. 사모님의 인테리어 실력으로 꾸며진 성전이 포근하고 아름답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영향력을 끼칠 사람을 키우자’는 창립비전을 가지고 설립 1년 정도된 교회이다.   가운동의 예장고신 온생명교회(손재경 목사)는 칼빈이나 루터 등 종교개혁가들이 만든 ‘시편찬송’(고려서원)을 예배 전이나 예배에 별도로 사용하는 전통적 예전으로 드린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예배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좀 생소하고 적응이 낯설다. 예배전 결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에서 십계명 낭독도 있다. 대표기도가 5분 정도면 좀 긴 편이다. ‘전교인 성경읽기와 돌아보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설립 10년을 넘겼다.   이렇듯 다산에는 괜찮은 교회들이 꽤 많다. 사랑하는교회, 세한교회, 바라봄교회, 풍성한교회, 신풍라파교회, 도동세광교회, 한빛교회, 경성교회, 두드림교회, 세은교회, 미금제일교회, 우리이웃교회, 도동순복음교회, 주마음교회, 선한교회 등 이름처럼 교회마다 특징도 다양하다. 비록 상가지만 부흥하는 교회, 목사님의 성품이 참 좋은 교회, 구제와 사회봉사를 잘하는 교회, 매주 기도와 전도를 열심하는 교회, 설교의 말씀이 좋고 성경공부를 하는 교회, 성도들의 교제가 풍성한 교회 등이 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선하고 좋은 교회들이다. 10월말 구리에서 이전해 온 나루순복음교회(나송아 목사)나, 11월말 한양수지인 상가에서 개척한 순복음 다산충만한교회(이평수 목사)도 있다. 참고로 한국교회는 70%가 출석교인 100명 미만이다. 개척교회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한 작은교회 목회자들의 꿈과 믿음에 마음이 간다. 새신자가 와도 반겨줄 사람이 없고 재정의 부족함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희망과 열정을 잃지 않는다. 전도와 예배준비, 안내와 반주, 점심식사 준비까지 다 목회자와 사모의 몫이다. 돕는 손길이 절실하다. 이런 작은 교회가 한국교회 생태계의 근원지이다. 작은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국교회가 전체가 살 수 있다. 새로운 신앙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작고 열악한 교회들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좌석수는 최대 100석 미만, 평균 교인 출석수 50여명 남짓하지만 주님의 임재가 있고 부흥의 가능성을 믿기에 관심이 간다. 다산신도시에는 좋은 교회가 많다. 새로 이사 와서 건강한 교회와 좋은 공동체를 만나 행복한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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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2
  • 교회 지도자들이여! 이젠 제자리를 찾자
    큰사랑교회 박광서 목사   좌익의 판도라에서 나온 온갖 사악한 영들이 이 나라를 혼돈과 파괴의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보통 국가 안위의 기초는 ‘경제’와 ‘안보’와 ‘국민의 성숙도’로 판단한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래 현 정권의 경제점수는 몇 점일까? 반환점을 돈 지금 문재인의 ‘J노믹스’는 낙제 점수다. 성장률, 취업자 수, 중산층 비중 등 10개 주요 지수에서 역대 정권 중 최악이다. 제2의 베네수엘라가 대한민국의 미래상으로 다가온다. 안보는 어떤가? 역시 동일하다. 군 해체로 군대는 민병대 수준으로 전락해 있고 한미일 동맹은 파기 직전에 있다. 그럼에도 이 정권의 북을 향한 사랑은 도무지 식을 줄을 모른다. 현 정권의 유일한 목적이 대한민국을 김정은에게 진상(進上)하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현 상태가 지속된다면 공산화는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분별 못하는 인생들이 왜 그리 많은 것일까?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 원인은 국민의식이 심각하게 좌경화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좌경화율이 90%에 이른다고 한다. 그 나라는 보수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일시적일뿐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답이 없는 불행한 나라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떨까? 혹자는 약 70%에 달한다고 한다. 지나친 말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태가 지난 40년 좌익의 주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대학진학율이 80%인 수준 높은 국민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착각하지 말자. 이 나라는 이제야 보수가 뭔지 고민하는 부끄러운 수준의 나라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좌익은 지난 40년 정치, 경제, 법조, 종교, 언론, 교육, 행정, 군대, 사회, 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침투하여 헤게모니 장악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성공했다.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교육과 군대와 문화와 사회를 장악했다. 그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저들은 오늘을 소망하며 철저히 희생하고 절제했으며 주밀하게 움직여왔다. 지금도 그 작업은 진행형이다. 반면 보수우익은 어떤가? 너무 어리석었다. 저들의 간계와 움직임에 무지했고 자신의 기득권에 침 흘리며 탐욕의 화신들로 살아왔다. 보수를 표방하는 제1야당의 현재 모습을 눈여겨보면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뼈를 깎는 개혁의 진통을 겪어도 부족한데 전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지도자들도 보수 위정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경과 역사가 증명하듯 타 종교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한계가 있다. 오히려 좌익의 주역 혹은 들러리가 되기 쉽다. 왜 그런가? 참된 개혁의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점을 잘 아는 좌익은 교회를 제일 두려워하고 골치 아파한다. 저들은 교회의 인간의 영혼과 양심을 깨우는 진리운동을 매우 불편해한다. 자신들이 그 진리운동을 감당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억지와 선동을 주 무기로 삼는 것이다. 교회만 무너뜨린다면 저들의 목적은 쉽게 달성된다. 이 점을 교회가 간파해야하건만 오히려 좌익에 동조하는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들이 교회 속에 적지 않아 보여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왜 좌익을 지지하는 것일까?   나라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음에도 “아무 문제없다, 뭐가 문제냐”며 공산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정말 공산국가를 소망하는 것인가? 특히 교회 지도자가 이런 입장에 있다면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 같이 “과거 보수정권도 이 정도는 해 먹었다.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사람 있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잘 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볼멘소리를 한다. 이런 모습에 혹자는 “좌익을 지지하는 이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비판하곤 한다. 그리스도인이 왜 좌로 기울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 두 사람의 견해가 도움이 될 듯싶다. (1) 낸시 피어스(Nancy Pearce)는 ‘사실과 가치의 분열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성경의 눈으로 해석했다. 즉, 과학도 성경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체계였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은 요지부동의 자리를 굳혔고, 성경적 진리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취향이요 선호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신앙인조차도 진리보다는 현실에 더 영향을 받는다. 성경을 신행의 준칙으로 여기지 않는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에게 성경과 좌익의 선동 중 무엇이 더 와 닿겠는가? 혹자는 “나는 좌도 우도 아닌 중도다”고 주장한다. 과연 투표 현장에서도 유효할까? 투표 현장에서는 좌든 우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성경적 판단보다는 지연과 학연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여기서 신자임에도 사회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교회가 좌경화됨은 거듭난 신자들이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영국의 보수철학자 로저 스크루톤(Roger Scruton)은 공산사회주의를 ‘영지주의’(gnosticism)로, 정치 지형을 재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저들의 신조어를 ‘주술’(呪術)이라 표현한다. 필자 역시 스크루톤의 통찰에 공감한다. 공산사회주의는 칼 맑스의 특정 지식을 추구함으로 지상의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는 헛된 소망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종교다. 그 신념에서 나온 억압, 착취, 해방, 인권, 혐오, 차별과 같은 교리적 신조어들은 추종자를 세뇌하기 위한 주술과 같다. 따라서 공산사회주의는 하나의 종교요 그에 따른 교리들이 주술인 것이다. 맑스 이래로 이 우상종교에 빠진 이들이 세상에 넘쳐나고 있다. 대한민국도 직간접적으로 그 희생양이 적지 않다. 이 종교가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옷을 갈아입으며 전 세계를 파멸과 죽음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깨어나야 대한민국이 산다 필자는 최근 초대 교회 기독교 유적지 탐방을 다녀왔다. 바울의 선교지를 살피며 복음전파를 위한 바울의 정공법에 놀랐다. 초기 기도처 대부분이 거대한 우상신전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유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마지막 권면에서 보듯 바울은 이단과의 싸움과 영적 분별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영혼 구원과 교회의 파수는 바울의 중대한 사명이었다. 사도 바울과 비교해 볼 때 오늘의 목회자의 태도는 어떨까? 목숨을 내걸고 진리와 교회를 파수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상황이 위중함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교회는 정치문제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해. 골치 아픈 일을 일부러 만들어 교회로 갈등에 빠지게 할 필요는 없어. 교인들이 나가면 어떻게 해. 우리교회는 특정 지역 사람이 많아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조용히 있고 싶어. 나라 구하는 일은 남이 다 알아서 해주겠지.” 공산사회주의자들이 이 사회와 한국교회에 칼을 들이미는데도 왜 교회 목회자들은 침묵하는 것일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본다. (1) 좌익에 대한 목회자들의 무지가 한 몫을 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아무래도 성경과 신학에 익숙하다. 세상학문을 배설물로 표현한 바울의 영향(?) 탓인지 몰라도 일반학문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 그로 인해 정치사상이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적 깊이가 약하다. 그나마 있는 지식도 좌익에 의해 심겨진 왜곡된 지식이 전부라 목회자의 좌경화는 필연적인지 모른다. (2) 성경과 성령의 영향에 의한 목회자들의 착한(?) 성정도 한몫을 한다. 목회자들은 싸움닭인 좌파들과 달리 웬만하면 싸움을 피하려 하며, 정치적 문제에 대해 공적으로 나서는 것에 극히 꺼린다. 프란시스 쉐퍼가 학문 중에 제일 늦게 반응하는 것이 신학이라 말했듯이, 영적 흐름에 제일 먼저 반응해야 할 목회자들이 제일 늦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북한이 공산화될 때 북한교회가 한 행동은 달랑 성명서 한 장 발표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공산화되었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그런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교회 지도자들이 일어나야겠다 결단할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늦은 때다. 사도 바울 같으면 이 시대의 목회자처럼 행동할까? 무신론적 인본주의요 우상종교인 공산사회주의에 동조하고, 교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침투한 ‘공산사회주의 이리’일 것이다. 지금은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때다. 이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다. 시대를 거스르는 쓴 소리를 해야 할 때다. 오늘도 ‘자유’와 ‘개인’의 소중함을 아는 홍콩의 젊은이들은 땀과 피를 흘리고 있다. 경찰에 구속된 젊은이들이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저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이들이 누구일까? 그들은 1997년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중국의 사탕발림에 박수친 지금의 50-60대 부모세대들이다. 그들의 오판에 의한 고통이 고스란히 후손들의 몫이 되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절대 공존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반드시 어느 한편으로 통일되게 되어 있다. 홍콩이 그 위기의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부모세대의 오판은 다음세대에게 지옥의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경제와 안보가 붕괴되고, 패스트트랙 3법에 의한 전체주의 독재사회가 되어감에도, 다음세대들이 왜곡된 역사와 사상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의 홍위병과 서구 PC의 좀비로 양육되고 있음에도, 나라꼴이 제2의 베네수엘라가 되어감에도 지금의 이 자리가 좋사오니 침묵하고 안주한다면 그 사람은 참된 목회자라기보다 사탄에게 영혼을 판 사악한 광대다. 좌파 정부의 거짓 평화쇼와 분배라는 이름의 몇 푼의 동전에 미소 짓고, 고려연방제의 찬양대가 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그동안 침묵하고 안주했던 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영적 지도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닫힌 문 앞에서 왜 우리에게 지옥을 가져다주었느냐는 후손들의 원망소리에 비겁자의 침통한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촛대도 불신앙이 역사하는 곳에서는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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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8
  • 식물이 태양보다 먼저 창조된 이유는?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창조 하나님은 첫째 날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창조(창 1:1)하셨고 특별히 빛(창 1:3-5)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첫째 날 우주의 기본 구성 요소를 만드셨습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고, 궁창을 하늘이라 칭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다와 땅을 만드셨습니다(창 1:9-10절). 이미 땅이 있었고(땅이 혼돈) 바다(궁창 아래의 물)가 있었는데 어찌된 일일까요? 혹시 중력을 만드신 걸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무중력 상태의 땅과 물이라면 물이 둥둥 떠 있고 땅이 혼돈(창 1:2절)한 것이 이해가 갑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내용이 아니기에 상상이고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중력 속에서) 물이 모이고 뭍이 드러나게 하심으로 본격적으로 세상의 일정한 질서를 만들어가셨습니다(렘 5:22). 이렇게 낮, 밤, 궁창(하늘), 땅, 바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데 중요한 배경(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이것들의 주관자요 지배자이십니다. 이것들이 모두 인간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창 1:10). ◈최초의 생명체 식물 창조 창조주 하나님은 최초 생명체 식물을 셋째 날 만드셨습니다(창 1:11-12절). 하나님은 식물(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가 진 열매 맺는 과목)을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진화론은 물고기가 먼저 만들어진 후 대부분의 식물이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반대의 주장도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식물이 종류대로 먼저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동물과 식물은 이렇게 성경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둘 다 생명체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동물에게는 생명("네페쉬")이 있는 반면 식물에게는 "네페쉬"(Nepesh)가 없습니다.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창 1:11절)을 창조했다는 언급은 모든 식물을 만드셨음에 대한 강조 용법입니다! 풀("에세브")은 풀, 풀잎, 목초로 번역되고 있으나 채소(창 2:5, 출 9:22)로도 번역됩니다. 씨 맺는 채소("쩨라")의 이 "씨"는 자손(창 12:7), 후손(창 3:15), 자식(레 20:2,3,4), 인종(창 19:32), 후사(後嗣, 룻 4:12, 삼상 2:20)의 씨에도 적용이 되는 단어입니다.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에츠")은 나무, 목재, 나무로도 번역되고 "씨"("페리")는 씨뿐 아니라 과일, 실과, 열매, 소생 등으로 번역이 됩니다. 이렇게 창세기는 모든 식물이 함께 창조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태양 없이 식물을 먼저 창조(?) 그렇다면 식물이 태양보다 먼저 창조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의 생각이 곧 창조주의 생각은 아닙니다. 인간이 성경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초월의 창조는 내재(內在)의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과학적 상식과 다르게 태양보다도 먼저 초목과 나무를 먼저 만드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상식으로는 식물보다 태양을 먼저 우선하여 떠올리게 되지요. 그래서 창조과학의 원조과학자 헨리 모리스는 태양을 대체하는 빛(광명)이 먼저 식물을 비추고 태양이 창조된 이후에는 첫째 날 창조된 빛(광명)은 태양으로 대체되었다고 해석하였지요. 이것이 창조과학적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양보다 식물을 먼저 창조한 섭리(창조 계시는 과학적 설명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창세기 1장 계시는 과학이 아니라 초월적 사건이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계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차원을 초월하는 계시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피조물인 인간의 상식이나 생각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여 태양보다 빛을 먼저 만드시고 식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2) 둘째, 칼빈은 모든 것은 인간의 생각이 아닌 모든 일이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태양이나 달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식물을 먼저 만드셨다고 주석합니다. (3) 따라서 빛을 만드신(첫째 날) 다음 태양보다 먼저 셋째 날 식물을 창조한 본질은, 인간 복지를 위해 땅이 계속해서 소산을 내야한다는 인간적 당위성이 그 "본질"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으로 빛 다음 식물을 태양보다 먼저 창조하셨다는 것을 창세기 1장은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창조와 구속) 계시의 신비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기에 초월 계시인 창세기 1장을 온전히 해석한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창조 계시는 그 자체가 초월적 신비의 계시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신비주의는 아니나 그 본질은 신비한 계시(성경의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영생의 계시)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초월적 창조 계시를 억지로 내재의 과학으로 퍼즐 맞추기처럼 해석한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리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심은 우리 인간을 향하신 준비요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마 6:26). 보잘 것 없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그 사귐을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고귀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십자가를 통한 은혜의 보혈로 죄악을 씻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시 50:9-13)로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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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9-11-13
  • 해외 한인주재원의 선교동력 가능성
        선교사로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적어도 향후 10년 정도 함께 선교에 동역할 사람들이다. 신학생들, 단기선교(비전트립)팀, 선교훈련 수료자들도 있겠지만, 그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그룹들도 있다.바로 해외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주재원들이다. 이들은 회사의 인사발령으로 해외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그 기한은 보통 3년-5년 미만이 많다. 가족이 함께 현지에서 낮선 문화와 현지인에 적응하게 된다.물론 이들은 선교사와는 그 목적이 다르지만 많은 부분에서 동질감을 가진 그룹이다. 이들의 경우 회사 규모나 지원 정책에 따라 생활의 차이는 있지만, 낮선 해외에서의 이방인 나그네로서 겪는 어려움은 선교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해외 현장에서 같이 지내면서 지켜본 결과 이들에게서 선교의 많은 가능성을 보게 됐다.일단 해외 주재원들은 언어에 대해서는 준비된 사람들이다. 나름대로 해외에서 살기 위한 준비와 문화적 충격에 대한 대비를 한 이들로 엘리트들이다. 그리고 현지인들을 고용하기에 어느 면에서는 공식적인 만남의 자리가 형성돼 있고, 회사를 통해 생활비 지원과 현지국가의 비자를 받는데 어려움이 없다.그렇다고 이들이 회사의 일을 하지 않고, 선교의 일만을 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훈련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지에서 좋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다. 그만큼 이들이 잘 준비가 된다면 너무나 좋은 열매를 맺을 것으로 기대된다.특히 해외에서는 한인교회가 지역에서 교민사회의 중심점으로 많은 역할을 하고 있기에, 많은 해외 주재원들이 교회에 출석한다. 물론 때로는 지역 정보나, 정착정보를 위해서 출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가운데 점점 은혜의 자리를 경험하고, 특별히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 선교사의 사역과 삶을 공유하고 경험하게 된다.필자가 섬겼던 델리한인장로교회에서도 많은 한인 주재원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자신의 재능을 사용해 우리와 협력하는 현지학교에서 미술이나, 음악교육을 하는 주재원 가정들이 있었다.처음에는 주저했지만 현장 선교 사역지를 방문하면서 자신의 재능들이 선교현장에서 너무나도 귀중하게 사용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 어떤 지역에서의 해외 주재원 근무보다도, 선교를 경험한 선교지가 인생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다는 고백을 한 주재원 가정들이 기억난다.한인교회는 해외 주재원들이 복음을 새롭게 접하는 장소만이 아니라, 선교현장에서 선교의 눈을 뜨게 하는 장소다. 따라서 그 역할이 너무 중요하다. 해외 주재원들은 보통 3-5년 정도의 해외 주재원 경험을 하고 한국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나, 또 다른 제3국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이들이 경험한 선교적 경험이 다음세대 선교 동력을 위한 중요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특히 한국교회는 이들이 해외 주재원으로 파견된 뒤에 선교적 경험을 하기보다는, 한국에서 사전에 이들에게 ‘선교지의 특성’ ‘선교사는 누구인가?’, ‘한인교회는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지인들에게 어떠한 삶의 모범을 보일 것인가?’를 사전에 훈련하도록 해야 한다.이들이 좋은 선교 동역자로서 해외 선교사역에 준비된 도구로 쓰이도록 지금부터라도 선교전략과 정책을 구체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특히 신학교육 기관에서는 주말을 이용한 선교학 과정을 개설하거나, 온라인 수업 과정을 개설함으로 바쁜 직장생활 가운데서도 평신도 선교사로서 잘 준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해외에 주재하게 될 때 선교적 사역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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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사
    2019-11-12
  • 교회 지도자들이여! 이젠 제자리를 찾자
      큰사랑교회 박광서 목사 좌익의 판도라에서 나온 온갖 사악한 영들이 이 나라를 혼돈과 파괴의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보통 국가 안위의 기초는 ‘경제’와 ‘안보’와 ‘국민의 성숙도’로 판단한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래 현 정권의 경제점수는 몇 점일까? 반환점을 돈 지금 문재인의 ‘J노믹스’는 낙제 점수다. 성장률, 취업자 수, 중산층 비중 등 10개 주요 지수에서 역대 정권 중 최악이다. 제2의 베네수엘라가 대한민국의 미래상으로 다가온다. 안보는 어떤가? 역시 동일하다. 군 해체로 군대는 민병대 수준으로 전락해 있고 한미일 동맹은 파기 직전에 있다. 그럼에도 이 정권의 북을 향한 사랑은 도무지 식을 줄을 모른다. 현 정권의 유일한 목적이 대한민국을 김정은에게 진상(進上)하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현 상태가 지속된다면 공산화는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분별 못하는 인생들이 왜 그리 많은 것일까?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 원인은 국민의식이 심각하게 좌경화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좌경화율이 90%에 이른다고 한다. 그 나라는 보수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일시적일뿐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답이 없는 불행한 나라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떨까? 혹자는 약 70%에 달한다고 한다. 지나친 말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태가 지난 40년 좌익의 주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대학진학율이 80%인 수준 높은 국민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착각하지 말자. 이 나라는 이제야 보수가 뭔지 고민하는 부끄러운 수준의 나라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좌익은 지난 40년 정치, 경제, 법조, 종교, 언론, 교육, 행정, 군대, 사회, 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침투하여 헤게모니 장악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성공했다.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교육과 군대와 문화와 사회를 장악했다. 그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저들은 오늘을 소망하며 철저히 희생하고 절제했으며 주밀하게 움직여왔다. 지금도 그 작업은 진행형이다. 반면 보수우익은 어떤가? 너무 어리석었다. 저들의 간계와 움직임에 무지했고 자신의 기득권에 침 흘리며 탐욕의 화신들로 살아왔다. 보수를 표방하는 제1야당의 현재 모습을 눈여겨보면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뼈를 깎는 개혁의 진통을 겪어도 부족한데 전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지도자들도 보수 위정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경과 역사가 증명하듯 타 종교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한계가 있다. 오히려 좌익의 주역 혹은 들러리가 되기 쉽다. 왜 그런가? 참된 개혁의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점을 잘 아는 좌익은 교회를 제일 두려워하고 골치 아파한다. 저들은 교회의 인간의 영혼과 양심을 깨우는 진리운동을 매우 불편해한다. 자신들이 그 진리운동을 감당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억지와 선동을 주 무기로 삼는 것이다. 교회만 무너뜨린다면 저들의 목적은 쉽게 달성된다. 이 점을 교회가 간파해야하건만 오히려 좌익에 동조하는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들이 교회 속에 적지 않아 보여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왜 좌익을 지지하는 것일까? 나라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음에도 “아무 문제없다, 뭐가 문제냐”며 공산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정말 공산국가를 소망하는 것인가? 특히 교회 지도자가 이런 입장에 있다면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 같이 “과거 보수정권도 이 정도는 해 먹었다.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사람 있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잘 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볼멘소리를 한다. 이런 모습에 혹자는 “좌익을 지지하는 이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비판하곤 한다. 그리스도인이 왜 좌로 기울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 두 사람의 견해가 도움이 될 듯싶다. (1) 낸시 피어스(Nancy Pearce)는 ‘사실과 가치의 분열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성경의 눈으로 해석했다. 즉, 과학도 성경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체계였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은 요지부동의 자리를 굳혔고, 성경적 진리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취향이요 선호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신앙인조차도 진리보다는 현실에 더 영향을 받는다. 성경을 신행의 준칙으로 여기지 않는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에게 성경과 좌익의 선동 중 무엇이 더 와 닿겠는가? 혹자는 “나는 좌도 우도 아닌 중도다”고 주장한다. 과연 투표 현장에서도 유효할까? 투표 현장에서는 좌든 우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성경적 판단보다는 지연과 학연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여기서 신자임에도 사회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교회가 좌경화됨은 거듭난 신자들이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영국의 보수철학자 로저 스크루톤(Roger Scruton)은 공산사회주의를 ‘영지주의’(gnosticism)로, 정치 지형을 재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저들의 신조어를 ‘주술’(呪術)이라 표현한다. 필자 역시 스크루톤의 통찰에 공감한다. 공산사회주의는 칼 맑스의 특정 지식을 추구함으로 지상의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는 헛된 소망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종교다. 그 신념에서 나온 억압, 착취, 해방, 인권, 혐오, 차별과 같은 교리적 신조어들은 추종자를 세뇌하기 위한 주술과 같다. 따라서 공산사회주의는 하나의 종교요 그에 따른 교리들이 주술인 것이다. 맑스 이래로 이 우상종교에 빠진 이들이 세상에 넘쳐나고 있다. 대한민국도 직간접적으로 그 희생양이 적지 않다. 이 종교가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옷을 갈아입으며 전 세계를 파멸과 죽음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깨어나야 대한민국이 산다 필자는 최근 초대 교회 기독교 유적지 탐방을 다녀왔다. 바울의 선교지를 살피며 복음전파를 위한 바울의 정공법에 놀랐다. 초기 기도처 대부분이 거대한 우상신전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유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마지막 권면에서 보듯 바울은 이단과의 싸움과 영적 분별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영혼 구원과 교회의 파수는 바울의 중대한 사명이었다. 사도 바울과 비교해 볼 때 오늘의 목회자의 태도는 어떨까? 목숨을 내걸고 진리와 교회를 파수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상황이 위중함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교회는 정치문제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해. 골치 아픈 일을 일부러 만들어 교회로 갈등에 빠지게 할 필요는 없어. 교인들이 나가면 어떻게 해. 우리교회는 특정 지역 사람이 많아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조용히 있고 싶어. 나라 구하는 일은 남이 다 알아서 해주겠지.” 공산사회주의자들이 이 사회와 한국교회에 칼을 들이미는데도 왜 교회 목회자들은 침묵하는 것일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본다. (1) 좌익에 대한 목회자들의 무지가 한 몫을 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아무래도 성경과 신학에 익숙하다. 세상학문을 배설물로 표현한 바울의 영향(?) 탓인지 몰라도 일반학문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 그로 인해 정치사상이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적 깊이가 약하다. 그나마 있는 지식도 좌익에 의해 심겨진 왜곡된 지식이 전부라 목회자의 좌경화는 필연적인지 모른다. (2) 성경과 성령의 영향에 의한 목회자들의 착한(?) 성정도 한몫을 한다. 목회자들은 싸움닭인 좌파들과 달리 웬만하면 싸움을 피하려 하며, 정치적 문제에 대해 공적으로 나서는 것에 극히 꺼린다. 프란시스 쉐퍼가 학문 중에 제일 늦게 반응하는 것이 신학이라 말했듯이, 영적 흐름에 제일 먼저 반응해야 할 목회자들이 제일 늦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북한이 공산화될 때 북한교회가 한 행동은 달랑 성명서 한 장 발표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공산화되었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그런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교회 지도자들이 일어나야겠다 결단할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늦은 때다. 사도 바울 같으면 이 시대의 목회자처럼 행동할까? 무신론적 인본주의요 우상종교인 공산사회주의에 동조하고, 교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침투한 ‘공산사회주의 이리’일 것이다. 지금은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때다. 이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다. 시대를 거스르는 쓴 소리를 해야 할 때다. 오늘도 ‘자유’와 ‘개인’의 소중함을 아는 홍콩의 젊은이들은 땀과 피를 흘리고 있다. 경찰에 구속된 젊은이들이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저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이들이 누구일까? 그들은 1997년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중국의 사탕발림에 박수친 지금의 50-60대 부모세대들이다. 그들의 오판에 의한 고통이 고스란히 후손들의 몫이 되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절대 공존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반드시 어느 한편으로 통일되게 되어 있다. 홍콩이 그 위기의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부모세대의 오판은 다음세대에게 지옥의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경제와 안보가 붕괴되고, 패스트트랙 3법에 의한 전체주의 독재사회가 되어감에도, 다음세대들이 왜곡된 역사와 사상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의 홍위병과 서구 PC의 좀비로 양육되고 있음에도, 나라꼴이 제2의 베네수엘라가 되어감에도 지금의 이 자리가 좋사오니 침묵하고 안주한다면 그 사람은 참된 목회자라기보다 사탄에게 영혼을 판 사악한 광대다. 좌파 정부의 거짓 평화쇼와 분배라는 이름의 몇 푼의 동전에 미소 짓고, 고려연방제의 찬양대가 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그동안 침묵하고 안주했던 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영적 지도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닫힌 문 앞에서 왜 우리에게 지옥을 가져다주었느냐는 후손들의 원망소리에 비겁자의 침통한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촛대도 불신앙이 역사하는 곳에서는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광서 목사 myr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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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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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기 목사   한국 교회가 큰 위기를 맞았다. 총체적인 위기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사는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더욱 본질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 존재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이런 얘기를 듣는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 그러나 초대교회에도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의 갈등과 불평이 있었다. 초대교회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초대교회로 돌아가도 별 수 없다. 이 세상에 완벽한 교회와 완벽한 사람은 없다. 믿을 것은 말씀밖에 없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오직 성경!’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수많은 책들가운데 인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두말할 것 없이 성경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겔3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끌고 뼈가 가득한 골짜기로 인도하신다. 전혀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였다. 그런 뼈들을 향해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을 대언하자 뼈들이 연결되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이고, 생기를 향해 대언했더니 생기가 들어가 큰 군대가 된다. 전혀 소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씀으로 회복시킬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한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요1: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 요1:14절에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다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 그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그 자체에 엄청난 능력이 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을 때에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말씀을 풀어 주실 때에 마음이 뜨거워 지고 눈이 뜨였다.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한다.(딤후3:16-17) 말씀이 능력이다. 말씀이 축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나라는 부강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는 부흥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일터는 창대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가정은 번성하게 된다.  느헤미야 8장에는 학사 에스라를 중심으로 벌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부흥운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 부흥은 말씀으로 일어난 부흥이었다. 모든 백성이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한다. 백성들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6시간 동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말씀을 사모하는 백성들의 열정이 대단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여 모이는 곳에 임한다. 마가다락방에서 일어난 오순절 사건도, 고넬료의 가정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도, 미스바에서 일어난 승리의 역사도 모두 사모하여 모일 때 일어났다. 어느 때든지 축복과 부흥의 원리는 동일하다. 축복과 부흥 전에는 항상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이 있었다.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있고, 말씀이 더 듣고 싶고,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임하게 되는 전조이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갓난아이가 어머니의 젓을 사모함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벧전2:2)  에스라가 백성들 앞에서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 일어섰다는 것은 말씀을 경외하는 모습이고, 무슨 말씀을 주시든지 순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말씀의 권위를 높이는 만큼 은혜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 말씀이 귀하게 느껴지고 말씀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들리면 역사는 일어나게 될 것이다. 말씀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고, 믿음의 역사가 있어서 소문난 교회였다. 모든 믿는자에게 본이 되는 교회였다. 그 비결은 말씀받는 태도가 좋았기 때문이다. 살전2:13절에 “~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말씀을 받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에, 그 말씀이 믿는자들속에서 역사한 것이다.  에스라가 읽어준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고, 크게 기뻐하고, 말씀에 순종한다. 칠월에는 초막절을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초막절을 지킨다. 이방인과의 잡혼을 금한다. 안식일 날 해서는 안될 일들을 금한다. 안식년을 똑바로 지킨다.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기로 결단한다. 말씀으로 일어난 부흥이었다. 우리 신앙생활에 변화가 없는 이유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많고, 성도는 많은데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말씀대로 사는 한 사람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 한 사람이 가정을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세상을 바꾼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성공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가장 큰 축복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이 세상에 순종만큼 복된 길은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는 만큼 축복하시고, 순종하는 만큼 사용하신다. 참된 부흥은 말씀으로 시작된다. 말씀으로 시작된 부흥은 근본적인 변화가 있게 한다. 신앙생활의 내용이 달라진다. 신앙의 수준이 달라진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부흥이 필요하다. 말씀이 깨달아져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크게 기뻐하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요새 지식 정보 산업이 뜨고 있다. 인터넷을 보면 엄청나고 방대한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 원하는 지식 대부분 다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지식으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변화시키는 능력은 말씀안에 있다. 말씀 안에 사는 길이 있고, 말씀 안에 회복의 길이 있다. 말씀따라 살면 신기하게 문제도 풀리고, 말씀따라 살면 신기하게 인간관계도 풀리게 된다. 이제 작은 일을 해도 하나님 말씀보다 앞서지 말자. 작은 사업을 해도 말씀 중심적으로 운영하자.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마4:4> 말씀없이 잘사는 길은 없다. 말씀없이 성공도 없고, 말씀없이 성숙도 없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축복으로 나타난다. 말씀을 통한 깨달음으로 회개하고, 크게 기뻐하고, 순종하여 삶의 현장에서 말씀으로 일어나는 놀라운 부흥 많이 체험하며 사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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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3
  • 다산신도시 작은교회 도전기
      ▲이효상 목사ㅣ교회건강연구원장   25년 살던 경기도 구리시를 떠나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이 살았던 남양주로 이사했다. 다산신도시로 입주한 탓인지 다산 선생 형제들의 신앙과 정신을 생각하게 되고, 교통사정이 좋은지, 가까이에 편한 마트가 있는지, 맛집은 어디인지, 스포츠센터가 좋은지 등에 관심이 가게 된다. 학부모라면 자녀들이 다녀야할 유치원과 초중고가 있는지, 주변 환경에 관심이 크다. 그 중 크리스천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아마 처음엔 이전 교회를 계속 다닐 것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교회를 정하고 기존교회를 떠나는 것은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사정상 교회를 다시 정해야 할 경우도 있다. 너무 멀리 이사 왔거나, 자녀들이 어리거나,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어 먼 교회로 가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혜롭고 건강한 교회를 찾는다. 신도시 입주민들은 새로운 교회를 생각하고 찾는다. 아마 주님도 여러 모습으로 교회다운 교회를 찾으실 것 같다. 신도시 새로운 지역, 새로운 교회는 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틈새전략이 필요하다. 처음부터 꼭 큰 건물교회가 아닌 작은 공간도 좋을듯하다. 카페나 레스토랑, 학원이나 식당을 빌려 주일 오전만 이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도 가능하다. 어차피 작은 교회는 소그룹이기에 중대형 교회를 흉내로는 생존이 어렵다. 기존의 생각이나 패러다임을 바꾸고 가족같은 공동체, 교회다운 교회를 지향하면 좋겠다. 여기에 목사 1인의 교회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투명성과 건강한 공동체로서 공교회성까지 갖추면 더 할 나위가 없이 좋다.   요즘 성도들은 건물이 큰 교회를 찾기 보다는 공동체가 건강한 교회를 찾는다. 다산에 도전장을 내밀고 개척한 작은 상가교회나 목회자를 만나보면 참 순수하고 열정이 대단하다. 이런 개척도전기, 건강한 생존기에 관심과 애정이 더 생기고 주목하게 된다. 다산동의 예장합동 다산따스한교회(손진원 목사)는 3월에 개척한 성복중앙교회 분립 1호이다. 손 목사는 제자훈련의 전문가로, 교회소개 전단을 잘 만들어 전도에 사용한다. 예배가 찬양과 경배로 뜨겁고 예배 후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는 제사장으로서의 삶을 결단, 축복, 격려하는 악수례를 하는 독특함이 있다. 이어 따스한 애찬과 따스한 소그룹 활동으로 친교하며 말씀을 나눈다. 수요예배에는 성경66권을 공부하며, 금요철야는 주기도로 하는 기도회를 가진다.   가운고등학교 정문앞에 위치한 예장통합의 하늘누리교회(윤호용 목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과 관계가 깊어지도록 하는데 사명을 두고 있다. 그래서인지 새신자에 대한 교인들의 친밀도가 높다. 예배전 중보기도팀을 통해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를 기도한다. 예배는 차분하고 안정감을 지녔다. 매월 말씀주제(예를 들어 ‘공감’)를 가지고 진행되며, 오후예배는 목장예배로 후원협력 선교지를 중심으로 모인다.   다산동 예스프라자의 감리회 주이음교회(정현수 목사)는 퇴계원에서 시작하여 오남리를 거쳐 다산동에 세 번째 정착한 교회다. 정 목사는 서글서글한 인상과 차분함, 친근감이 장점이다. 교회적으로 성도들이 큐티에 열심을 내며, 말씀사경회와 새가족전도를 위해 ‘릴레이’기도를 주일오후와 수요기도히는 성경통독을 진행하며, ‘가족소통학교’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예장합동 기쁨누리교회(성성섭 목사)는 감자탕교회에서 개척한 교회로 분당에서 6월에 이전해 왔다. 사모님의 인테리어 실력으로 꾸며진 성전이 포근하고 아름답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영향력을 끼칠 사람을 키우자’는 창립비전을 가지고 설립 1년 정도된 교회이다.   가운동의 예장고신 온생명교회(손재경 목사)는 칼빈이나 루터 등 종교개혁가들이 만든 ‘시편찬송’(고려서원)을 예배 전이나 예배에 별도로 사용하는 전통적 예전으로 드린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예배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는 좀 생소하고 적응이 낯설다. 예배전 결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에서 십계명 낭독도 있다. 대표기도가 5분 정도면 좀 긴 편이다. ‘전교인 성경읽기와 돌아보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설립 10년을 넘겼다.   이렇듯 다산에는 괜찮은 교회들이 꽤 많다. 사랑하는교회, 세한교회, 바라봄교회, 풍성한교회, 신풍라파교회, 도동세광교회, 한빛교회, 경성교회, 두드림교회, 세은교회, 미금제일교회, 우리이웃교회, 도동순복음교회, 주마음교회, 선한교회 등 이름처럼 교회마다 특징도 다양하다. 비록 상가지만 부흥하는 교회, 목사님의 성품이 참 좋은 교회, 구제와 사회봉사를 잘하는 교회, 매주 기도와 전도를 열심하는 교회, 설교의 말씀이 좋고 성경공부를 하는 교회, 성도들의 교제가 풍성한 교회 등이 있다. 조금씩은 다르지만 선하고 좋은 교회들이다. 10월말 구리에서 이전해 온 나루순복음교회(나송아 목사)나, 11월말 한양수지인 상가에서 개척한 순복음 다산충만한교회(이평수 목사)도 있다. 참고로 한국교회는 70%가 출석교인 100명 미만이다. 개척교회가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열정으로 시작한 작은교회 목회자들의 꿈과 믿음에 마음이 간다. 새신자가 와도 반겨줄 사람이 없고 재정의 부족함으로 어려움을 겪지만 희망과 열정을 잃지 않는다. 전도와 예배준비, 안내와 반주, 점심식사 준비까지 다 목회자와 사모의 몫이다. 돕는 손길이 절실하다. 이런 작은 교회가 한국교회 생태계의 근원지이다. 작은 교회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국교회가 전체가 살 수 있다. 새로운 신앙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작고 열악한 교회들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좌석수는 최대 100석 미만, 평균 교인 출석수 50여명 남짓하지만 주님의 임재가 있고 부흥의 가능성을 믿기에 관심이 간다. 다산신도시에는 좋은 교회가 많다. 새로 이사 와서 건강한 교회와 좋은 공동체를 만나 행복한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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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2-02
  • 교회 지도자들이여! 이젠 제자리를 찾자
    큰사랑교회 박광서 목사   좌익의 판도라에서 나온 온갖 사악한 영들이 이 나라를 혼돈과 파괴의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보통 국가 안위의 기초는 ‘경제’와 ‘안보’와 ‘국민의 성숙도’로 판단한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래 현 정권의 경제점수는 몇 점일까? 반환점을 돈 지금 문재인의 ‘J노믹스’는 낙제 점수다. 성장률, 취업자 수, 중산층 비중 등 10개 주요 지수에서 역대 정권 중 최악이다. 제2의 베네수엘라가 대한민국의 미래상으로 다가온다. 안보는 어떤가? 역시 동일하다. 군 해체로 군대는 민병대 수준으로 전락해 있고 한미일 동맹은 파기 직전에 있다. 그럼에도 이 정권의 북을 향한 사랑은 도무지 식을 줄을 모른다. 현 정권의 유일한 목적이 대한민국을 김정은에게 진상(進上)하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현 상태가 지속된다면 공산화는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분별 못하는 인생들이 왜 그리 많은 것일까?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 원인은 국민의식이 심각하게 좌경화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좌경화율이 90%에 이른다고 한다. 그 나라는 보수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일시적일뿐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답이 없는 불행한 나라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떨까? 혹자는 약 70%에 달한다고 한다. 지나친 말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태가 지난 40년 좌익의 주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대학진학율이 80%인 수준 높은 국민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착각하지 말자. 이 나라는 이제야 보수가 뭔지 고민하는 부끄러운 수준의 나라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좌익은 지난 40년 정치, 경제, 법조, 종교, 언론, 교육, 행정, 군대, 사회, 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침투하여 헤게모니 장악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성공했다.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교육과 군대와 문화와 사회를 장악했다. 그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저들은 오늘을 소망하며 철저히 희생하고 절제했으며 주밀하게 움직여왔다. 지금도 그 작업은 진행형이다. 반면 보수우익은 어떤가? 너무 어리석었다. 저들의 간계와 움직임에 무지했고 자신의 기득권에 침 흘리며 탐욕의 화신들로 살아왔다. 보수를 표방하는 제1야당의 현재 모습을 눈여겨보면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뼈를 깎는 개혁의 진통을 겪어도 부족한데 전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지도자들도 보수 위정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경과 역사가 증명하듯 타 종교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한계가 있다. 오히려 좌익의 주역 혹은 들러리가 되기 쉽다. 왜 그런가? 참된 개혁의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점을 잘 아는 좌익은 교회를 제일 두려워하고 골치 아파한다. 저들은 교회의 인간의 영혼과 양심을 깨우는 진리운동을 매우 불편해한다. 자신들이 그 진리운동을 감당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억지와 선동을 주 무기로 삼는 것이다. 교회만 무너뜨린다면 저들의 목적은 쉽게 달성된다. 이 점을 교회가 간파해야하건만 오히려 좌익에 동조하는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들이 교회 속에 적지 않아 보여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왜 좌익을 지지하는 것일까?   나라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음에도 “아무 문제없다, 뭐가 문제냐”며 공산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정말 공산국가를 소망하는 것인가? 특히 교회 지도자가 이런 입장에 있다면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 같이 “과거 보수정권도 이 정도는 해 먹었다.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사람 있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잘 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볼멘소리를 한다. 이런 모습에 혹자는 “좌익을 지지하는 이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비판하곤 한다. 그리스도인이 왜 좌로 기울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 두 사람의 견해가 도움이 될 듯싶다. (1) 낸시 피어스(Nancy Pearce)는 ‘사실과 가치의 분열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성경의 눈으로 해석했다. 즉, 과학도 성경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체계였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은 요지부동의 자리를 굳혔고, 성경적 진리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취향이요 선호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신앙인조차도 진리보다는 현실에 더 영향을 받는다. 성경을 신행의 준칙으로 여기지 않는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에게 성경과 좌익의 선동 중 무엇이 더 와 닿겠는가? 혹자는 “나는 좌도 우도 아닌 중도다”고 주장한다. 과연 투표 현장에서도 유효할까? 투표 현장에서는 좌든 우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성경적 판단보다는 지연과 학연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여기서 신자임에도 사회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교회가 좌경화됨은 거듭난 신자들이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영국의 보수철학자 로저 스크루톤(Roger Scruton)은 공산사회주의를 ‘영지주의’(gnosticism)로, 정치 지형을 재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저들의 신조어를 ‘주술’(呪術)이라 표현한다. 필자 역시 스크루톤의 통찰에 공감한다. 공산사회주의는 칼 맑스의 특정 지식을 추구함으로 지상의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는 헛된 소망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종교다. 그 신념에서 나온 억압, 착취, 해방, 인권, 혐오, 차별과 같은 교리적 신조어들은 추종자를 세뇌하기 위한 주술과 같다. 따라서 공산사회주의는 하나의 종교요 그에 따른 교리들이 주술인 것이다. 맑스 이래로 이 우상종교에 빠진 이들이 세상에 넘쳐나고 있다. 대한민국도 직간접적으로 그 희생양이 적지 않다. 이 종교가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옷을 갈아입으며 전 세계를 파멸과 죽음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깨어나야 대한민국이 산다 필자는 최근 초대 교회 기독교 유적지 탐방을 다녀왔다. 바울의 선교지를 살피며 복음전파를 위한 바울의 정공법에 놀랐다. 초기 기도처 대부분이 거대한 우상신전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유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마지막 권면에서 보듯 바울은 이단과의 싸움과 영적 분별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영혼 구원과 교회의 파수는 바울의 중대한 사명이었다. 사도 바울과 비교해 볼 때 오늘의 목회자의 태도는 어떨까? 목숨을 내걸고 진리와 교회를 파수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상황이 위중함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교회는 정치문제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해. 골치 아픈 일을 일부러 만들어 교회로 갈등에 빠지게 할 필요는 없어. 교인들이 나가면 어떻게 해. 우리교회는 특정 지역 사람이 많아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조용히 있고 싶어. 나라 구하는 일은 남이 다 알아서 해주겠지.” 공산사회주의자들이 이 사회와 한국교회에 칼을 들이미는데도 왜 교회 목회자들은 침묵하는 것일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본다. (1) 좌익에 대한 목회자들의 무지가 한 몫을 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아무래도 성경과 신학에 익숙하다. 세상학문을 배설물로 표현한 바울의 영향(?) 탓인지 몰라도 일반학문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 그로 인해 정치사상이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적 깊이가 약하다. 그나마 있는 지식도 좌익에 의해 심겨진 왜곡된 지식이 전부라 목회자의 좌경화는 필연적인지 모른다. (2) 성경과 성령의 영향에 의한 목회자들의 착한(?) 성정도 한몫을 한다. 목회자들은 싸움닭인 좌파들과 달리 웬만하면 싸움을 피하려 하며, 정치적 문제에 대해 공적으로 나서는 것에 극히 꺼린다. 프란시스 쉐퍼가 학문 중에 제일 늦게 반응하는 것이 신학이라 말했듯이, 영적 흐름에 제일 먼저 반응해야 할 목회자들이 제일 늦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북한이 공산화될 때 북한교회가 한 행동은 달랑 성명서 한 장 발표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공산화되었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그런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교회 지도자들이 일어나야겠다 결단할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늦은 때다. 사도 바울 같으면 이 시대의 목회자처럼 행동할까? 무신론적 인본주의요 우상종교인 공산사회주의에 동조하고, 교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침투한 ‘공산사회주의 이리’일 것이다. 지금은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때다. 이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다. 시대를 거스르는 쓴 소리를 해야 할 때다. 오늘도 ‘자유’와 ‘개인’의 소중함을 아는 홍콩의 젊은이들은 땀과 피를 흘리고 있다. 경찰에 구속된 젊은이들이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저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이들이 누구일까? 그들은 1997년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중국의 사탕발림에 박수친 지금의 50-60대 부모세대들이다. 그들의 오판에 의한 고통이 고스란히 후손들의 몫이 되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절대 공존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반드시 어느 한편으로 통일되게 되어 있다. 홍콩이 그 위기의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부모세대의 오판은 다음세대에게 지옥의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경제와 안보가 붕괴되고, 패스트트랙 3법에 의한 전체주의 독재사회가 되어감에도, 다음세대들이 왜곡된 역사와 사상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의 홍위병과 서구 PC의 좀비로 양육되고 있음에도, 나라꼴이 제2의 베네수엘라가 되어감에도 지금의 이 자리가 좋사오니 침묵하고 안주한다면 그 사람은 참된 목회자라기보다 사탄에게 영혼을 판 사악한 광대다. 좌파 정부의 거짓 평화쇼와 분배라는 이름의 몇 푼의 동전에 미소 짓고, 고려연방제의 찬양대가 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그동안 침묵하고 안주했던 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영적 지도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닫힌 문 앞에서 왜 우리에게 지옥을 가져다주었느냐는 후손들의 원망소리에 비겁자의 침통한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촛대도 불신앙이 역사하는 곳에서는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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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28
  • 식물이 태양보다 먼저 창조된 이유는?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창조 하나님은 첫째 날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창조(창 1:1)하셨고 특별히 빛(창 1:3-5)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첫째 날 우주의 기본 구성 요소를 만드셨습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고, 궁창을 하늘이라 칭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다와 땅을 만드셨습니다(창 1:9-10절). 이미 땅이 있었고(땅이 혼돈) 바다(궁창 아래의 물)가 있었는데 어찌된 일일까요? 혹시 중력을 만드신 걸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무중력 상태의 땅과 물이라면 물이 둥둥 떠 있고 땅이 혼돈(창 1:2절)한 것이 이해가 갑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내용이 아니기에 상상이고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중력 속에서) 물이 모이고 뭍이 드러나게 하심으로 본격적으로 세상의 일정한 질서를 만들어가셨습니다(렘 5:22). 이렇게 낮, 밤, 궁창(하늘), 땅, 바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데 중요한 배경(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이것들의 주관자요 지배자이십니다. 이것들이 모두 인간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창 1:10). ◈최초의 생명체 식물 창조 창조주 하나님은 최초 생명체 식물을 셋째 날 만드셨습니다(창 1:11-12절). 하나님은 식물(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가 진 열매 맺는 과목)을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진화론은 물고기가 먼저 만들어진 후 대부분의 식물이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반대의 주장도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식물이 종류대로 먼저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동물과 식물은 이렇게 성경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둘 다 생명체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동물에게는 생명("네페쉬")이 있는 반면 식물에게는 "네페쉬"(Nepesh)가 없습니다.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창 1:11절)을 창조했다는 언급은 모든 식물을 만드셨음에 대한 강조 용법입니다! 풀("에세브")은 풀, 풀잎, 목초로 번역되고 있으나 채소(창 2:5, 출 9:22)로도 번역됩니다. 씨 맺는 채소("쩨라")의 이 "씨"는 자손(창 12:7), 후손(창 3:15), 자식(레 20:2,3,4), 인종(창 19:32), 후사(後嗣, 룻 4:12, 삼상 2:20)의 씨에도 적용이 되는 단어입니다.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에츠")은 나무, 목재, 나무로도 번역되고 "씨"("페리")는 씨뿐 아니라 과일, 실과, 열매, 소생 등으로 번역이 됩니다. 이렇게 창세기는 모든 식물이 함께 창조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태양 없이 식물을 먼저 창조(?) 그렇다면 식물이 태양보다 먼저 창조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의 생각이 곧 창조주의 생각은 아닙니다. 인간이 성경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초월의 창조는 내재(內在)의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과학적 상식과 다르게 태양보다도 먼저 초목과 나무를 먼저 만드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상식으로는 식물보다 태양을 먼저 우선하여 떠올리게 되지요. 그래서 창조과학의 원조과학자 헨리 모리스는 태양을 대체하는 빛(광명)이 먼저 식물을 비추고 태양이 창조된 이후에는 첫째 날 창조된 빛(광명)은 태양으로 대체되었다고 해석하였지요. 이것이 창조과학적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양보다 식물을 먼저 창조한 섭리(창조 계시는 과학적 설명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창세기 1장 계시는 과학이 아니라 초월적 사건이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계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차원을 초월하는 계시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피조물인 인간의 상식이나 생각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여 태양보다 빛을 먼저 만드시고 식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2) 둘째, 칼빈은 모든 것은 인간의 생각이 아닌 모든 일이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태양이나 달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식물을 먼저 만드셨다고 주석합니다. (3) 따라서 빛을 만드신(첫째 날) 다음 태양보다 먼저 셋째 날 식물을 창조한 본질은, 인간 복지를 위해 땅이 계속해서 소산을 내야한다는 인간적 당위성이 그 "본질"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으로 빛 다음 식물을 태양보다 먼저 창조하셨다는 것을 창세기 1장은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창조와 구속) 계시의 신비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기에 초월 계시인 창세기 1장을 온전히 해석한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창조 계시는 그 자체가 초월적 신비의 계시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신비주의는 아니나 그 본질은 신비한 계시(성경의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영생의 계시)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초월적 창조 계시를 억지로 내재의 과학으로 퍼즐 맞추기처럼 해석한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리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심은 우리 인간을 향하신 준비요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마 6:26). 보잘 것 없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그 사귐을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고귀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십자가를 통한 은혜의 보혈로 죄악을 씻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시 50:9-13)로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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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9-11-13
  • 해외 한인주재원의 선교동력 가능성
        선교사로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적어도 향후 10년 정도 함께 선교에 동역할 사람들이다. 신학생들, 단기선교(비전트립)팀, 선교훈련 수료자들도 있겠지만, 그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은 그룹들도 있다.바로 해외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주재원들이다. 이들은 회사의 인사발령으로 해외에서 근무를 하게 된다. 그 기한은 보통 3년-5년 미만이 많다. 가족이 함께 현지에서 낮선 문화와 현지인에 적응하게 된다.물론 이들은 선교사와는 그 목적이 다르지만 많은 부분에서 동질감을 가진 그룹이다. 이들의 경우 회사 규모나 지원 정책에 따라 생활의 차이는 있지만, 낮선 해외에서의 이방인 나그네로서 겪는 어려움은 선교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 해외 현장에서 같이 지내면서 지켜본 결과 이들에게서 선교의 많은 가능성을 보게 됐다.일단 해외 주재원들은 언어에 대해서는 준비된 사람들이다. 나름대로 해외에서 살기 위한 준비와 문화적 충격에 대한 대비를 한 이들로 엘리트들이다. 그리고 현지인들을 고용하기에 어느 면에서는 공식적인 만남의 자리가 형성돼 있고, 회사를 통해 생활비 지원과 현지국가의 비자를 받는데 어려움이 없다.그렇다고 이들이 회사의 일을 하지 않고, 선교의 일만을 한다면 문제가 될 것이다. 하지만 훈련된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지에서 좋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다. 그만큼 이들이 잘 준비가 된다면 너무나 좋은 열매를 맺을 것으로 기대된다.특히 해외에서는 한인교회가 지역에서 교민사회의 중심점으로 많은 역할을 하고 있기에, 많은 해외 주재원들이 교회에 출석한다. 물론 때로는 지역 정보나, 정착정보를 위해서 출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가운데 점점 은혜의 자리를 경험하고, 특별히 현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 선교사의 사역과 삶을 공유하고 경험하게 된다.필자가 섬겼던 델리한인장로교회에서도 많은 한인 주재원들이 있었다. 그들 가운데 자신의 재능을 사용해 우리와 협력하는 현지학교에서 미술이나, 음악교육을 하는 주재원 가정들이 있었다.처음에는 주저했지만 현장 선교 사역지를 방문하면서 자신의 재능들이 선교현장에서 너무나도 귀중하게 사용되는 것을 경험했다. 그 어떤 지역에서의 해외 주재원 근무보다도, 선교를 경험한 선교지가 인생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다는 고백을 한 주재원 가정들이 기억난다.한인교회는 해외 주재원들이 복음을 새롭게 접하는 장소만이 아니라, 선교현장에서 선교의 눈을 뜨게 하는 장소다. 따라서 그 역할이 너무 중요하다. 해외 주재원들은 보통 3-5년 정도의 해외 주재원 경험을 하고 한국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나, 또 다른 제3국으로 가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이들이 경험한 선교적 경험이 다음세대 선교 동력을 위한 중요한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이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특히 한국교회는 이들이 해외 주재원으로 파견된 뒤에 선교적 경험을 하기보다는, 한국에서 사전에 이들에게 ‘선교지의 특성’ ‘선교사는 누구인가?’, ‘한인교회는 어떠한 역할을 하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지인들에게 어떠한 삶의 모범을 보일 것인가?’를 사전에 훈련하도록 해야 한다.이들이 좋은 선교 동역자로서 해외 선교사역에 준비된 도구로 쓰이도록 지금부터라도 선교전략과 정책을 구체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특히 신학교육 기관에서는 주말을 이용한 선교학 과정을 개설하거나, 온라인 수업 과정을 개설함으로 바쁜 직장생활 가운데서도 평신도 선교사로서 잘 준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해외에 주재하게 될 때 선교적 사역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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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사
    2019-11-12
  • 교회 지도자들이여! 이젠 제자리를 찾자
      큰사랑교회 박광서 목사 좌익의 판도라에서 나온 온갖 사악한 영들이 이 나라를 혼돈과 파괴의 수렁에 빠뜨리고 있다. 보통 국가 안위의 기초는 ‘경제’와 ‘안보’와 ‘국민의 성숙도’로 판단한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 이래 현 정권의 경제점수는 몇 점일까? 반환점을 돈 지금 문재인의 ‘J노믹스’는 낙제 점수다. 성장률, 취업자 수, 중산층 비중 등 10개 주요 지수에서 역대 정권 중 최악이다. 제2의 베네수엘라가 대한민국의 미래상으로 다가온다. 안보는 어떤가? 역시 동일하다. 군 해체로 군대는 민병대 수준으로 전락해 있고 한미일 동맹은 파기 직전에 있다. 그럼에도 이 정권의 북을 향한 사랑은 도무지 식을 줄을 모른다. 현 정권의 유일한 목적이 대한민국을 김정은에게 진상(進上)하는 것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일 현 상태가 지속된다면 공산화는 필연적이다. 그럼에도 분별 못하는 인생들이 왜 그리 많은 것일까? 인정하기 싫겠지만 그 원인은 국민의식이 심각하게 좌경화되었기 때문이다. 베네수엘라 국민의 좌경화율이 90%에 이른다고 한다. 그 나라는 보수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일시적일뿐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답이 없는 불행한 나라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어떨까? 혹자는 약 70%에 달한다고 한다. 지나친 말일까?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유는 현재 대한민국의 상태가 지난 40년 좌익의 주밀한 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대학진학율이 80%인 수준 높은 국민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착각하지 말자. 이 나라는 이제야 보수가 뭔지 고민하는 부끄러운 수준의 나라다.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말이다.   좌익은 지난 40년 정치, 경제, 법조, 종교, 언론, 교육, 행정, 군대, 사회, 문화 등 전방위적으로 침투하여 헤게모니 장악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성공했다.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교육과 군대와 문화와 사회를 장악했다. 그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저들은 오늘을 소망하며 철저히 희생하고 절제했으며 주밀하게 움직여왔다. 지금도 그 작업은 진행형이다. 반면 보수우익은 어떤가? 너무 어리석었다. 저들의 간계와 움직임에 무지했고 자신의 기득권에 침 흘리며 탐욕의 화신들로 살아왔다. 보수를 표방하는 제1야당의 현재 모습을 눈여겨보면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뼈를 깎는 개혁의 진통을 겪어도 부족한데 전혀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 모양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지도자들도 보수 위정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경과 역사가 증명하듯 타 종교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데 한계가 있다. 오히려 좌익의 주역 혹은 들러리가 되기 쉽다. 왜 그런가? 참된 개혁의 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점을 잘 아는 좌익은 교회를 제일 두려워하고 골치 아파한다. 저들은 교회의 인간의 영혼과 양심을 깨우는 진리운동을 매우 불편해한다. 자신들이 그 진리운동을 감당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억지와 선동을 주 무기로 삼는 것이다. 교회만 무너뜨린다면 저들의 목적은 쉽게 달성된다. 이 점을 교회가 간파해야하건만 오히려 좌익에 동조하는 ‘쓸모있는 바보’(useful idiot)들이 교회 속에 적지 않아 보여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왜 좌익을 지지하는 것일까? 나라가 급격히 무너지고 있음에도 “아무 문제없다, 뭐가 문제냐”며 공산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이들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정말 공산국가를 소망하는 것인가? 특히 교회 지도자가 이런 입장에 있다면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 같이 “과거 보수정권도 이 정도는 해 먹었다. 털어서 먼지 나오지 않는 사람 있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잘 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냐?”는 볼멘소리를 한다. 이런 모습에 혹자는 “좌익을 지지하는 이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고 비판하곤 한다. 그리스도인이 왜 좌로 기울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 두 사람의 견해가 도움이 될 듯싶다. (1) 낸시 피어스(Nancy Pearce)는 ‘사실과 가치의 분열 현상’ 때문이라고 한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세상을 성경의 눈으로 해석했다. 즉, 과학도 성경적 진리를 증명하기 위한 하나의 체계였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시대에 들어서면서 과학은 요지부동의 자리를 굳혔고, 성경적 진리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취향이요 선호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신앙인조차도 진리보다는 현실에 더 영향을 받는다. 성경을 신행의 준칙으로 여기지 않는 거듭나지 않은 교인들에게 성경과 좌익의 선동 중 무엇이 더 와 닿겠는가? 혹자는 “나는 좌도 우도 아닌 중도다”고 주장한다. 과연 투표 현장에서도 유효할까? 투표 현장에서는 좌든 우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성경적 판단보다는 지연과 학연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여기서 신자임에도 사회주의자들을 지지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교회가 좌경화됨은 거듭난 신자들이 적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 영국의 보수철학자 로저 스크루톤(Roger Scruton)은 공산사회주의를 ‘영지주의’(gnosticism)로, 정치 지형을 재구성하기 위해 만들어낸 저들의 신조어를 ‘주술’(呪術)이라 표현한다. 필자 역시 스크루톤의 통찰에 공감한다. 공산사회주의는 칼 맑스의 특정 지식을 추구함으로 지상의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다는 헛된 소망에 의해 형성된 하나의 종교다. 그 신념에서 나온 억압, 착취, 해방, 인권, 혐오, 차별과 같은 교리적 신조어들은 추종자를 세뇌하기 위한 주술과 같다. 따라서 공산사회주의는 하나의 종교요 그에 따른 교리들이 주술인 것이다. 맑스 이래로 이 우상종교에 빠진 이들이 세상에 넘쳐나고 있다. 대한민국도 직간접적으로 그 희생양이 적지 않다. 이 종교가 카멜레온처럼 다양한 옷을 갈아입으며 전 세계를 파멸과 죽음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깨어나야 대한민국이 산다 필자는 최근 초대 교회 기독교 유적지 탐방을 다녀왔다. 바울의 선교지를 살피며 복음전파를 위한 바울의 정공법에 놀랐다. 초기 기도처 대부분이 거대한 우상신전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목숨을 걸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유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성령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마지막 권면에서 보듯 바울은 이단과의 싸움과 영적 분별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영혼 구원과 교회의 파수는 바울의 중대한 사명이었다. 사도 바울과 비교해 볼 때 오늘의 목회자의 태도는 어떨까? 목숨을 내걸고 진리와 교회를 파수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대한민국의 상황이 위중함에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교회는 정치문제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해. 골치 아픈 일을 일부러 만들어 교회로 갈등에 빠지게 할 필요는 없어. 교인들이 나가면 어떻게 해. 우리교회는 특정 지역 사람이 많아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조용히 있고 싶어. 나라 구하는 일은 남이 다 알아서 해주겠지.” 공산사회주의자들이 이 사회와 한국교회에 칼을 들이미는데도 왜 교회 목회자들은 침묵하는 것일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본다. (1) 좌익에 대한 목회자들의 무지가 한 몫을 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아무래도 성경과 신학에 익숙하다. 세상학문을 배설물로 표현한 바울의 영향(?) 탓인지 몰라도 일반학문을 가까이 하지는 않는다. 그로 인해 정치사상이나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적 깊이가 약하다. 그나마 있는 지식도 좌익에 의해 심겨진 왜곡된 지식이 전부라 목회자의 좌경화는 필연적인지 모른다. (2) 성경과 성령의 영향에 의한 목회자들의 착한(?) 성정도 한몫을 한다. 목회자들은 싸움닭인 좌파들과 달리 웬만하면 싸움을 피하려 하며, 정치적 문제에 대해 공적으로 나서는 것에 극히 꺼린다. 프란시스 쉐퍼가 학문 중에 제일 늦게 반응하는 것이 신학이라 말했듯이, 영적 흐름에 제일 먼저 반응해야 할 목회자들이 제일 늦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북한이 공산화될 때 북한교회가 한 행동은 달랑 성명서 한 장 발표한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공산화되었다. 안타깝지만 지금도 그런 현상이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교회 지도자들이 일어나야겠다 결단할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늦은 때다. 사도 바울 같으면 이 시대의 목회자처럼 행동할까? 무신론적 인본주의요 우상종교인 공산사회주의에 동조하고, 교인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일을 할 수 있을까?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를 파괴하기 위해 침투한 ‘공산사회주의 이리’일 것이다. 지금은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자리를 되찾을 때다. 이 나라를 지키고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야 할 때다. 시대를 거스르는 쓴 소리를 해야 할 때다. 오늘도 ‘자유’와 ‘개인’의 소중함을 아는 홍콩의 젊은이들은 땀과 피를 흘리고 있다. 경찰에 구속된 젊은이들이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저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이들이 누구일까? 그들은 1997년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중국의 사탕발림에 박수친 지금의 50-60대 부모세대들이다. 그들의 오판에 의한 고통이 고스란히 후손들의 몫이 되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절대 공존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반드시 어느 한편으로 통일되게 되어 있다. 홍콩이 그 위기의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부모세대의 오판은 다음세대에게 지옥의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경제와 안보가 붕괴되고, 패스트트랙 3법에 의한 전체주의 독재사회가 되어감에도, 다음세대들이 왜곡된 역사와 사상에 의해 공산주의자들의 홍위병과 서구 PC의 좀비로 양육되고 있음에도, 나라꼴이 제2의 베네수엘라가 되어감에도 지금의 이 자리가 좋사오니 침묵하고 안주한다면 그 사람은 참된 목회자라기보다 사탄에게 영혼을 판 사악한 광대다. 좌파 정부의 거짓 평화쇼와 분배라는 이름의 몇 푼의 동전에 미소 짓고, 고려연방제의 찬양대가 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그동안 침묵하고 안주했던 교회 지도자들은 이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영적 지도자의 자리로 돌아갈 시점이다. 그렇지 않으면 닫힌 문 앞에서 왜 우리에게 지옥을 가져다주었느냐는 후손들의 원망소리에 비겁자의 침통한 눈물을 흘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촛대도 불신앙이 역사하는 곳에서는 다른 곳으로 옮겨질 수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박광서 목사 myro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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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1
  • 강연에서 책 출판, 베스트셀러까지
      ▲이효상 목사ㅣ교회건강연구원장   글은 말에서 나왔고 말은 자기 삶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삶이 말이 되고, 말이 글이 된다’는 것이다. 좋은 강연과 글이 되려면 삶이 풍부하고 알차야 하겠다. 어떤 삶을 살았는가 하는 것이 말과 글을 결정하게 된다. 말과 글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일이 결코 아니다. 바탕은 삶이다. 삶이 풍부해야 글감도 풍성해지고 결과적으로 삶이 건강하면 말과 글도 건강해진다. 말이나 글이 숨김없이 진실되이 드러낼 때 감동이 있고 생명력을 불어넣게 된다. 80년대 후반 시집을 낸바 있지만 글쓰기를 포기한지 오래되었는데, 월간목회 발행인 박종구 목사님이 글쓰기를 자꾸 권유하셔서 7년간 월간목회의 집필위원으로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하였다. 그러다 초짜 글쟁이가 겁없이 낸 책이『영혼을 깨우는 예배기도』라는 책인데, 반응이 좋아 5만권 이상이 팔리며 장기 베스트셀러가 되고 졸지에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말도 듣게 되었다.   2002년 교회건강연구원을 설립 이후 강연과 더불어 집필에 신경을 써 가능하면 매년 한권 정도는 출간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17년간 출판된 책이 15권 정도가 된다. 하지만 쓸 때마다 힘들다. 그중에『관계의 벽을 넘어라』라는 119관계전도훈련 세미나 강연집으로 세미나에 5천여교회 5만여명이 참여하며 필독서가 되다보니 관계전도의 교과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글을 쓰고 책을 왜 내는가? 최근 집필 출판한『나이롱 집사와 기둥 같은 제직』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세상에 시시각각 달라지는 신앙의 여러 모습들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표지판, 가는 길을 헤매지 않도록 세워주고 싶어 냈다. 텅빈 마음 채워주고 영혼에 꺼진 불을 피우며 심장을 새로운 감정으로 뛰게 하고 싶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와 청지기·직분자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3·1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심정으로 펜에 피땀과 교회를 향한 사랑을 찍어 썼다. 하지만 글을 쓰고 책을 출판하는 일이 부족한 사람이 요란을 떠는 것은 아닌지, 과연 예수그리스도와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를 위한 것인지 많이 성찰하게 된다.   이 책의 시작은 2002년 가을, 40년 목회를 은퇴하시던 고 김우영 목사님(만나감리교회)께서 전국목회자들을 초청하여 세미나를 열고 필자를 주강사로 세워주셨다. 그 때부터 전국교회를 돌며 1천여 교회에서 강연했던 것에서 20여년의 강연 녹취와 자료를 정리하다보니 사람의 부족함이 글에까지 전달되었음을 느꼈다. 책이 출간되자 “제목부터 참신하다”, “신앙의 위기에서 용기를 찾았다”, “몸과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했다”, “단단하게 버틸 힘과 해낼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긴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교회가 얼마나 소중한지 안 것이다”,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가치있는 존재이며, 훨씬 더 귀한 일을 하는 사역자라는 사실이다”라는 독자들의 반응과 소감, 그리고 “팬심으로 꼭 사서 읽어 보겠다”는 격려의 말들을 듣게 된다.   특히 '글 쓰느라 애썼다’, ‘글에 반했다’는 말을 듣는다. 그 말은 글쓰기가 참으로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다. 글쓰기가 뭐라고 이렇게 힘들까 하면서 홀로 지새운 숱한 밤들을 알기나 할까. 오자와 싸움에서 죽을 고생을 다하며 글재주가 부족함을 절감한 걸 알기나 할까. 출산한 산모처럼 그래서 또 다시 책을 쓸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글 잘 쓰는 사람은 틀리다. 차원이 다르다. 가끔 주보와 인터넷에 실리는 소강석 목사님(새에덴교회)의 칼럼을 읽으면, 감동을 받곤 한다. 한국교회와 성도사랑이라는 글의 고민이 절실하기에 웃음이 있고 즐거움이 있으며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힘이 크다.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사실 사랑한다는 고백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촛불로 길을 내고, 그 길 위에 꽃가루를 뿌리고, 장미꽃 백 송이를 들고 음악이 흐르게 하는 준비성에 ‘감동’하겠지만, 겉치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심을 담은 한마디 “나, 너 좋아해” 라는 그 한마디가 아닐까? 이렇듯 책으로 진정성을 전달하는 것처럼 힘든 것도 없는 것 같다. 솔직한 글을 쓴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도 아니다. 계속적인 글쓰기와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많이 읽어야 하고, 누구나 읽어도 좋을 솔직한 글을 쓰기 위해서 매일 밥 먹듯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주변 환경이나 다른 사람의 눈치 보지 않고 쓰는 용기를 전제로 한다. 십자가 지고 순교할 각오 아니면 맨땅에 헤딩이라도 하듯, 어쩌면 짱돌 맞을 각오를 하고 글을 써야 글이 산다. 스마트 폰에 빠져 책을 안 읽는다고 하지만 역시 베스트셀러는 내용의 충실이자 독자들의 입소문이다. 최근 출판된『교회오빠 이관희 집사』처럼, 꼭 필요하고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공감하고 감동하는 글쓰기· 말하기· 출판하기· 책 읽기를 권하고 싶다. 글을 쓰고 강연하고 책을 출판하는 것이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무엇을 하든 ‘정석’은 중요하다. 중요하기 때문에 ‘정석’이다. 기본을 지키지 않는 기술은 ‘겉멋’에 불과하다. 삶이 그렇다.   시대를 읽고 역사를 알고 사람과 문화, 십자가를 사랑하는 그런 책이 더 많이 출판되고 ‘거룩한 독서’를 위해 ‘책 읽기’를 권하는 가을이 되었으면 한다. 결실의 계절에 추수를 기다리듯 건강한 사회를 위한 사랑이 말이나 글로 표현되고 출판되므로 그런 사역들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문화의 융성과 영적 회복을 가져오는 거룩한 출발이 있기를 나는 소망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9-11-08
  • 식물이 태양보다 먼저 창조된 이유는?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창조 하나님은 첫째 날 시간과 공간과 물질을 창조(창 1:1)하셨고 특별히 빛(창 1:3-5)을 창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첫째 날 우주의 기본 구성 요소를 만드셨습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시고, 궁창을 하늘이라 칭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다와 땅을 만드셨습니다(창 1:9-10절). 이미 땅이 있었고(땅이 혼돈) 바다(궁창 아래의 물)가 있었는데 어찌된 일일까요? 혹시 중력을 만드신 걸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무중력 상태의 땅과 물이라면 물이 둥둥 떠 있고 땅이 혼돈(창 1:2절)한 것이 이해가 갑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내용이 아니기에 상상이고 해석입니다.   하나님은 (중력 속에서) 물이 모이고 뭍이 드러나게 하심으로 본격적으로 세상의 일정한 질서를 만들어가셨습니다(렘 5:22). 이렇게 낮, 밤, 궁창(하늘), 땅, 바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직접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가는데 중요한 배경(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이것들의 주관자요 지배자이십니다. 이것들이 모두 인간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창 1:10). ◈최초의 생명체 식물 창조 창조주 하나님은 최초 생명체 식물을 셋째 날 만드셨습니다(창 1:11-12절). 하나님은 식물(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가 진 열매 맺는 과목)을 종류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진화론은 물고기가 먼저 만들어진 후 대부분의 식물이 진화되었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반대의 주장도 있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식물이 종류대로 먼저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동물과 식물은 이렇게 성경적으로 전혀 다릅니다. 둘 다 생명체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동물에게는 생명("네페쉬")이 있는 반면 식물에게는 "네페쉬"(Nepesh)가 없습니다.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과목(창 1:11절)을 창조했다는 언급은 모든 식물을 만드셨음에 대한 강조 용법입니다! 풀("에세브")은 풀, 풀잎, 목초로 번역되고 있으나 채소(창 2:5, 출 9:22)로도 번역됩니다. 씨 맺는 채소("쩨라")의 이 "씨"는 자손(창 12:7), 후손(창 3:15), 자식(레 20:2,3,4), 인종(창 19:32), 후사(後嗣, 룻 4:12, 삼상 2:20)의 씨에도 적용이 되는 단어입니다.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에츠")은 나무, 목재, 나무로도 번역되고 "씨"("페리")는 씨뿐 아니라 과일, 실과, 열매, 소생 등으로 번역이 됩니다. 이렇게 창세기는 모든 식물이 함께 창조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태양 없이 식물을 먼저 창조(?) 그렇다면 식물이 태양보다 먼저 창조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의 생각이 곧 창조주의 생각은 아닙니다. 인간이 성경을 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창조주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초월의 창조는 내재(內在)의 과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과학적 상식과 다르게 태양보다도 먼저 초목과 나무를 먼저 만드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습니다.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상식으로는 식물보다 태양을 먼저 우선하여 떠올리게 되지요. 그래서 창조과학의 원조과학자 헨리 모리스는 태양을 대체하는 빛(광명)이 먼저 식물을 비추고 태양이 창조된 이후에는 첫째 날 창조된 빛(광명)은 태양으로 대체되었다고 해석하였지요. 이것이 창조과학적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태양보다 식물을 먼저 창조한 섭리(창조 계시는 과학적 설명을 요구하는 건 아니다) 창세기 1장 계시는 과학이 아니라 초월적 사건이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계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과학으로 설명할 차원을 초월하는 계시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피조물인 인간의 상식이나 생각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여 태양보다 빛을 먼저 만드시고 식물을 창조 하셨습니다. (2) 둘째, 칼빈은 모든 것은 인간의 생각이 아닌 모든 일이 창조주 "하나님께 속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태양이나 달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식물을 먼저 만드셨다고 주석합니다. (3) 따라서 빛을 만드신(첫째 날) 다음 태양보다 먼저 셋째 날 식물을 창조한 본질은, 인간 복지를 위해 땅이 계속해서 소산을 내야한다는 인간적 당위성이 그 "본질"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말씀으로 빛 다음 식물을 태양보다 먼저 창조하셨다는 것을 창세기 1장은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창조와 구속) 계시의 신비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기에 초월 계시인 창세기 1장을 온전히 해석한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창조 계시는 그 자체가 초월적 신비의 계시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신비주의는 아니나 그 본질은 신비한 계시(성경의 창조와 타락과 구속과 영생의 계시)에 의존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초월적 창조 계시를 억지로 내재의 과학으로 퍼즐 맞추기처럼 해석한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리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심은 우리 인간을 향하신 준비요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마 6:26). 보잘 것 없는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그 사귐을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고귀한 소명을 받았습니다. 더욱이 십자가를 통한 은혜의 보혈로 죄악을 씻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하고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시 50:9-13)로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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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2019-11-07
  • 교회에 대한 새로운 욕구
        비제도권 교회들의 등장 최근 한국에 새로운 유형의 교회가 등장하고 있다. 제도권 교회들의 성장 정체 속에서 건물, 성직자, 교단 등 기존의 교회 구성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 실험적인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기존 교회의 틀에서는 의미 있는 신앙생활이 어렵다는 이유로,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 가운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서, 그리고 이러한 모양을 원하는 교인들의 욕구에 부응해 기존 교회의 모습에서 탈피한 신앙 공동체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들은 기존의 관점에서는 교회라고 보기 어려울 수도 있고, 또한 기존 교회의 틀로서는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비제도권 교회라고 부르는 것이다.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종교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탈물질주의와 실존적 안정감의 증가를 들 수 있다. 종교에 대한 욕구가 번영신학에 의지한 축복형에서 의미형으로 변환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의 개인들이 점점 더 전통적 사회 기관들로부터 피로감을 느끼고 이탈해 개인화, 파편화 돼가는 포스트모더니즘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이 교회들은 이렇게 개인 중심의 영성 추구, 형식적 종교의식 보다는 의미와 관계 중심의 신앙 표현,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증가에 대한 저항 등과 같은 새로운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이러한 비제도권 교회의 등장은 세계적인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사회가 지향하는 대형화와 규격화로 대표되는 사회 체계화가 종교계까지 퍼지면서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 것이다.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가 서구 문명의 제도권으로 흡수된 이후에, 그 지배 체제의 위치를 굳혔고, 기독교는 점차 제도화된 문화적 관습이 됐다. 그로 인해서 교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관료제와 같은 성격이 교회 안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제도권 교회에서 문화적 그리스도인이 되기보다는 실제적인 영성의 경험과 인격적 공동체를 추구하는 새로운 탈 제도적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 세계권에 속하지는 않지만, 서구기독교의 경험을 따라 비슷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제도화의 딜레마 이러한 현상은 종교사회학에서 말하는 ‘제도화의 딜레마’와 관련된다. 제도화의 딜레마란, 교회는 공동체를 추구하지만 그 형태는 사회조직의 특성을 나타내는 데서 오는 문제를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의 공동체로서 교회구성원인 신자들 사이에 일치와 연합, 결속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조직으로서 효율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그러짐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1차집단과 2차집단의 특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독특한 구조라고 할 수 있다.교회의 제도화는 교회가 존재를 지속하며 여러 가지 활동을 하기 위한 필수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조직은 처음에는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운동체 성격으로 시작하지만, 효율성을 높이고 목적에 보다 빨리 도달하기 위해 제도화의 길을 걷게 된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처음에는 창시자의 카리스마 있는 능력에 의해 시작된 후에는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제도화되는 경향이 있다. 종교의 제도화는 특정종교가 안정된 지위를 확보하면서 역사를 따라 지속하는가, 아니면 창시자의 카리스마적 종교운동으로 끝나고 마는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여기서 1세대 지도자의 카리스마적 권위의 제도화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는다면 조직은 와해될 수도 있다.그러나 한편으로는 제도화 자체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먼저 조직의 규모가 커질 때 필연으로 나타나는 귀속감 저하 현상을 가리키는 ‘확장의 딜레마’를 들 수 있다. 곧 구성원 사이에서 목표와 규범에 대한 합의의 강도가 약화되는 것이다. 구성원 사이의 교섭이 어려워지고 다양성이 증가되면서 정책결정에 대한 공통이해에 도달하기 어려워진다. 다음으로 ‘복합동기의 딜레마’는 교회 규모가 커질수록 다양한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교회출석동기가 다양해지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구원을 받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위로나 도움을 받기 위해, 복을 받기 위해, 치유를 받기 위해, 사회에서 누리지 못하는 지위나 권력을 교회에서 대용으로 누려보기 위해, 사회운동의 기반을 구하기 위해, 정치나 사업의 발판으로 삼기 위해 등 참으로 다양하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문제는 관료주의화의 문제이다. 현대의 모든 조직은 상당한 정도로 관료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관료제는 조직 자체의 존속과 기득권 유지를 최우선의 목표로 삼고 환경에 유연하게 변화하지 못하는 경향을 낳는다.이러한 교회 제도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교회 본연의 모습을 되찾고 공동체성을 추구하는 교회들이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다. 종교학자인 다이애나 버틀러 배스는 미국 교계에 화제가 됐던 ?교회의 종말?에서 중앙 통제에 의해서 표준화되고 규칙화된 종교 형태의 기독교는 쇠퇴하는 반면, 훨씬 더 유연한 형태의 창의성과 인격성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 공동체들이 출현하고 있다고 전망한다. 전통 교단들의 교세 약화 이면에는, 관습적 종교의 틀을 넘어서는 영성과 관계 중심의 신앙 재편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최근 미국에서 교단에 속하지 않은 독립교회들이 증가하고 있는 이유이다.한국의 비제도권 교회들 필자는 교단에 속하지 않고 그들 나름의 교회관에 입각하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비제도권 교회들을 조사연구 하였다. 25개 사례 중에 유형별로는 목회자 없이 평신도들로 구성되었거나 목회자가 있어도 목회자로서 특별한 권한을 행사하지 않는 평신도 교회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주일에 모이지 않고 평일에 모이는 주중 교회 형태가 3개 있었고 명시적으로 교회를 표방하지 않지만 사실상 교회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례가 2개 있었다. 한 가지 특징은 연구자가 연구를 수행하여 논문과 책으로 출판된 ‘가나안 성도’ 곧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표방하며 모이는 사례가 3개 있어서 최근 개신교계에서 가나안 성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또한 비제도권 교회에 속한 교인들과 기존 교인들의 인식 차이를 파악하기 위해 설문 조사를 실시했는데 교회에 대한 만족도와 대부분의 평가 항목에서 비제도권 교회 교인들이 더 높은 만족도를 나타냈다. 특히 규모와 체계를 갖춘 교회에 유리한 항목을 제외하고 교회의 본래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공동체적인 측면에 대해서 비제도권 교회가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비제도권 교회들이 오늘날 개신교 신자들이 요구하는 신앙적 욕구에 더 부합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비제도권 교회 교인들은 신앙생활 이유에서도 보다 본질적인 차원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물론 이러한 차이가 비제도권 교회의 우월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소속 교단이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교단이 없어서라기보다는 교단의 방침이나 이해관계를 넘어서 교인들의 종교적 필요에 민감하고 보다 교회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려는 경향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실제로 교인들 중에는 본인이 속한 교회가 교단이 있는지 없는지 또는 어떤 교단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다니는 경우들이 많다. 따라서 교단 소속 여부와 상관없이 교회 본연의 모습을 추구하며 보다 공동체적인 교회를 이루려고 하는 교회라면 이와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이렇게 비제도권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한국 교회에 큰 도전을 던져준다. 교회 성장 이후기, 엄밀히 말하면 제도교회의 쇠퇴기에 새로운 유형의 교회가 등장하고 있고 이들이 새로운 신앙적 욕구를 채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제도권 교회들은 기존의 전통적인 교회들과는 형식 구조 면에서 뚜렷한 차별성과 자생적 자유로움을 지니는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새롭고 다양한 종교적인 욕구에 대해서 한국 교회, 특히 제도권 교회들이 어떻게 대응하고 스스로 갱신할 지에 대해서 구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대안이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 오피니언
    • 칼럼
    2019-11-06
  • "동성애 반대는 하루살이 걸러내기 아닌, 교회의 본질 지키는 일" (II)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박사   세계적 동성애 허용 대세에 교회는 굴복하거나 영적 투쟁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3. 한국교회는 동성애 반대(하루살이 걸러냄)에 그치지 않고 우상숭배 타파(낙타 지킴)해야 한다. 1) 동성애는 적대시 하면서 각종 우상숭배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한국교회 풍토 손 교수는 “성경은 동성애를 반대하지만 그보다 더 정죄하는 것은 거짓말과 우상숭배”라면서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번연히 드러나는 거짓과 탐심(우상숭배, 골3:5)을 경계하고 비판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미온적”이라고 지적한다. “교회 돈을 횡령해서 유죄판결을 받는 목사가 설교를 계속해도, 대형교회의 목회세습이 일어나는데도, 논문과 설교의 표절이 발각되었는데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동성애는 마치 기독교의 사활이 거기에 걸린 것처럼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선다.”며 “한 때 술, 담배를 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처럼 지금은 동성애를 찬동하면 기독교의 적으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우려를 나타낸다. 손 교수는 동성애 비판하는 지도자들이 목회 세습하고 교권욕에 불타고 각종 비리에 연루되어 있는 현실에 대해 한국교회가 책임을 묻지 않는 도덕적 불감증에 대해 윤리적 각성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필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러한 예리한 지적에 대하여 필자를 비롯하여 한국교회 일부 대형교회와 목회 지도자들은 깊이 자성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2) 동성애 반대만이 아니라 교회 내 비리 및 우상숭배 척결 함께 해야 하지만 성경을 인용해서 ‘동성애 관련 차별금지법의 입법 등에 반대하는 것’은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일처럼 아주 사소한 일’이고, 오히려 ‘교회가 긍휼과 정의를 상실하고 부패하는 것은 낙타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손 교수 주장에 대하여 필자는 그의 취지에 찬성하면서도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다음같이 보완하고자 한다. 한국교회는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입법 반대에만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공공선인 정의와 윤리실천과 선행을 하는 데 더욱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다. 동성애 반대 투쟁과 교회의 윤리 및 사회정의 운동은 양자 택일 사항이 아니라 둘 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전자에 힘을 쏟아 부어, 후자를 지나쳐서는 안될 일이다. 만일 그럴 때, 동성애 반대도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말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율법을 성취하는 길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기독교가 동성애 관련 차별금지법 입법 등에 반대하고 저지하는 것은 성다수자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양심과 사회적 자유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반대운동과 더불어 교회 내부의 각종 목회세습 배격, 각종 형사 처벌 받은 목회자들의 자숙과 설교금지, 각종 권력 다툼이나 각종 금권 선거 연루자 배척 등 교회 정화 운동에 전력해야 한다. 그런데 이 일까지 동성애 투쟁하는 자들에게 하라는 것은 역할분담론에 있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교회 내부 비리 척결 문제는 교회 원로들과 중진들이 해야 하고 동성애 반대 투쟁은 젊은 세대들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에 보완적인 보다 적극적인 윤리적 선행운동으로 신자와 교회는 사회적 소외자들, 이주민들, 탈북민들 돌봄 등 사회적 정의 실천 등 선행 아젠다를 실천하여 사회적으로 그리스도인들 내면에서 사회를 향하여 우러나오는 이웃사랑인 긍휼과 정의를 적극적으로 펼쳐야 할 것이다. 4. 동성애 이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동성애 이슈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해당한다 손 교수는 “기독교가 그런 사소한 것에 목 멜 이유는 없다. 동성애 반대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들이 매우 많기 때문”이라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중시했던 십일조를 하루살이에, 그들이 무시했던 정의와 긍휼은 낙타에 비유했다.(마23:23-24). 둘 다 지킬 수 있으면 좋겠지만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낙타를 택해야 한다. 적어도 하루살이 지키느라 낙타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고 밝힌다. 특히 “한국교회가 초기처럼 예수님이 낙타에 비유했던 ‘정의와 긍휼’에 힘을 기울였다면 그 때 누렸던 도덕적 권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하루살이 같은 동성애와의 싸움에도 쉽게 이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힌다. 손 교수는 “지금이라도 낙타와 하루살이를 구분하고 낙타에 집중해야 하루살이도 구할 수 있다. 정직하고 공정해서 정의를 실천하며 하나님과 믿음을 돈, 명예, 권력 같은 하급가치를 얻는 수단으로 착각하는 우상숭배를 중단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약한 자에 대한 긍휼에 사용하면 영적 전투에서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다. 필자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손 교수는 이 대목에서 하루살이(동성애 반대)도 한국교회가 해야할 사회적 과제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한국교회가 초기처럼 독립운동이나 신분 차별 타파운동이나 남녀 동권운동에 앞장선 것은 낙타에 비유할 수 있다. 한국교회가 정직하고 공정해서 정의를 실천하며 하나님과 믿음을 돈, 명예, 권력 같은 하급가치를 얻는 수단으로 착각하는 우상숭배를 중단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음을 사회적 소외자들과 약한 자들에 대한 긍휼 베풂에 사용하면 동성애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교회 세습, 일부 목회자의 독선적 교회 경영 및 세상법과 제도를 무시하는 탈법적 행태를 시정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그의 견해에 찬성한다. 그러나 오늘날 ‘동성애 이슈는 낙타가 아닌 하루살이 제거’라고 비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5. 기독교의 상실한 위상에 대해서는 한국교회가 깊이 다시 자성해야 한다 손 교수는 오늘날 주변으로 밀려난 기독교 위상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건국 후 상당기간 개신교만 군목을 보냈는데도 다른 종교나 사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기독교가 국민의 신뢰와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지금은 도덕적 권위를 상실해서 기독교가 아무리 옳은 주장을 해도 ‘너나 잘 하세요’ 야유만 받게 됐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명성교회의 세습으로 인한 교단의 정관 유린과 교인들 앞에서 세습 안하겠다는 세 번 약속 파기, 서울장로교회 등에서 진행 중인 원로목사와 후임목사 간의 싸움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사회적 위상을 크게 추락시키고 있다. 한기총(한국기독교 총연맹)도 초기에는 좋은 역할을 하였다가 2011년 이래 기독교의 사회적 위상을 크게 추락시켰다. 한기총은 1989년 12월 28일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당시 36개 교단 6개 단체의 대표 121명이 서울 강남침례교회에서 창립총회를 갖고 출발하여 보수적인 연합기관으로 발전하여 지난 22년동안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런데 2011년 이래 한기총 지도자들이 불미스러운 권력 다툼, 금권 선거 파동과 파행적 운영을 하자 이에 분개한 교단들이 나가서 2012년 한교연, 한교총 등이 생겨나게 되면서 한기총은 대표적 지위를 상실하였다. 한기총, 한교연, 한교총 등 보수교단 연합기관들은 교권 쟁탈에 몰두하다 대의를 상실하여 사회적 신뢰를 상실한 데 대해 통렬한 자기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낙타와 같은 큰 문제들이 한국교회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래서 반동성애 운동에 열성을 지닌 지도자들은 반드시 동성애 이슈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한국교회가 가진 사회를 향한 정의와 긍휼의 실천, 목회세습의 폐단 그리고 교권 투쟁 등 우상숭배와 탐심에 대하여 크나큰 비판의식을 가지고 이를 근절하고자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한국교회 보수진영 지도자들은 손 교수의 자기들을 향한 충언을 겸허한 마음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동성애 반대에 그렇게 필사적으로 반대하는 자들이 사회적 정의를 세우기보다는 교권투쟁이나 명예욕의 우상에 갇혀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자기성찰을 해야 할 것이다. 6. 동성애와 동성애자를 구별해야 한다, 1) 동성애 선천적 경향 인정?손 교수는 “동성애와 동성애자를 분명히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해서 동성애자를 비난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기와 사기꾼을 구별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사기꾼은 자기가 결정해서 거짓을 저지르지만 동성애자가 모두 스스로 동성애를 택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힌다. 손 교수는 “보수교단의 목사의 대학생 아이들이 자신이 느끼는 동성애적 경향 때문에 심한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사람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며 동성애 성향자와 동성애 행위자를 구분해야 한다“고 밝힌다. 이에 대해 필자는 생각을 달리한다. 손 교수는 “동성애자 모두 스스로 동성애를 택한 것은 아니다.“ ”보수교단 목사의 대학생 아들이 스스로 느끼는 동성애적 성향”을 예를 들면서 “동성애 행위자와 동성애 성향자를 구분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는 동성애의 선천성, 즉 유전설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나 생각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동성애 성향을 선천적 기질적으로 부여하시고, 이를 가증하다고 금기하시는 자기모순적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도 동성애 유전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아래 7항 참조) 2) 동성애 성중독과 동성애자 인격의 분리: 동성애 행위는 죄, 동성애자는 치유받아야 할 인격 그러면서도 동성애 행위는 죄라고 지적할 수는 있으나 동성애 행위자 인격을 향하여 이성애자들이 혐오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금기해야한다고 말할 수 있고 구분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나 죄인은 사랑하시고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은 동성애 성중독에 빠져서 본인도 여기서 빠져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일반 사기꾼도 다를 수 있다. 그렇게 심리상담적으로 측면에서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동성애 반대자들이 자기는 동성애 중독에 빠지지 않았으니 스스로 의롭고 동성애자들은 죄인이라고 스스로 의로운 의식을 혹시나 가진다면 이는 교만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동성애 반대자들도 항상 자신을 돌보고 동료들을 돌보고 동성애 성중독에 빠진 자들에 대하여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들이 이러한 중독에 빠지게 된 것에 대해 마음 아파하고 이들이 이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마음을 갖고 실천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들이 혹시나 스스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면서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동성애 행위”도 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매주 주정 헌금과 십일조 드린다고 감사한다면 우리는 신바리새인과 율법주의자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토색, 불의, 간음, 동성애”를 하지 않았다는 외형적인 율법 규례 이행을 보시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도 우리 속에 끊임없은 죄의 욕망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겸허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면서 자기 죄 욕망 죽이기와 예수와 새로운 영적 연합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7. 동성애는 선천적이라는 유전설은 의학적 근거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손 교수는 “아직도 동성애가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스스로 택해서 잘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보다 동성애자들을 더 심각하게 반성경적이라고 보는 것은 전혀 공정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서 필자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1993년에 미국 동성애 의사인 해머(D. H. Hamer)가 동성애가 유전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염색체 Xq28이 남성 동성애와 관련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1999년 미국 의학자 라이스(G. Rice)는 염색체 Xq28이 남성 동성애와 관련없다고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하였다. 2005년 해머를 포함한 연구팀이 다시 Xq28이 동성애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B. S. Mustanski a. et., "A Genomewide Scan of Male Sexual Orientation." Human Genetics 116, 2005, 272.) 동성애는 유전적인 요인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과를 획득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동성애 찬성론자들이 동성애는 유전적이며 선천적이고 주장하나 이에 대하여 정통 신학자들은 동성애 선천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태생적으로 동성애 유전자를 주입하신 하나님이 동성애는 “가증한 일”이라고 금지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자기 당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동성애 선천성) 하시고 “아니오”(동성애 금지)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필자도 성경이 동성애를 명료히 금기하고 있는 것에 따라서 동성애는 동성애 선천성 견해는 성경적 신학적 원리에도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동성애는 선천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이든 비자의적이든 후천적 환경에 의한 동성애 성중독에 빠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의학자들의 정설이다. 8. 양성평등의 헌법을 유지하는 것은 필요하다. 이에 앞선 글에서 손 교수는 ‘양성평등’을 ‘성평등’으로 변경하려는 헌법 개정에 대한 반대는 당연하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손 교수는 “최근 우리나라에도 성소수자들에 대해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비판과 항거가 거세게 일고 있다.”며 “특히 사회 일각에서 헌법 제36조 1항. ‘혼인괴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에서 ‘양성의 평등’을 ‘성 평등’으로 고치자는 움직임이 있어 위기감이 더욱 커졌다. 성경이 동성 성관계를 분명하게 정죄하므로 한국 기독교인들이 세계 최초의 그런 헌법 개정을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필자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나라 헌법은 양성 평등(sex equality)을 천명하는 것으로 이를 세계풍조에 맞춘다고 성평등(gender equality)으로 개정해서는 않된다. 인류문화는 변하나 인간성(성적구조와 생리)는 변하지 않는다. 성평등이란 남성과 여성이라는 창조주가 주신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생물학적 성(biological sex)을 부인하고 인간 스스로 선택하는 사회적 성(gender, social sex)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신학적으로는 인간을 생물학적 성이 아니라 젠더 이데올로기로 재구성하고자하는 “제2의 반역”(the second revolt)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를 제2반역이라고 이름 부치는 이유는 선악과 먹지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반역이 “첫 반역”(the first revolt)에 대하여 이제는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성(biological sex) 를 인위적으로 거부하고 사회적 성(gender, social sex)을 만드려고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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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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